다크나이트 라이지즈(배급사에서는 늘 그렇듯 그냥 라이즈로 밀어붙였지만. 여하튼 영문법은 인기가 없으니.) 잘 보고 와서 관해서 글을 좀 써보려다가 실패하고 주제를 바꾼 오늘의 망한 전자오락 감상글입니다. 스포일러 없습니다..

 일단 별 쓸모없이 글 분량만 늘리기 위한 정보로서 스펙옵스 시리즈에 대해 설명을 해봅시다. 90년대 말에, 그러니까 레드스톰이 레인보우 식스를 내놓으면서 현실적인 밀리터리 총질 FPS를 유행시키기 시작하자 비슷한 스타일의 현실지향적인 군대 FPS 게임들이 몇 개 나왔습니다. 요즘은 좀 다른 방식으로의 밀리터리 FPS들이 유행이지만...개중 노바로직의 델타포스 시리즈가 나름 유명했었고, 좀비 스튜디오스라는 곳에서는 스펙옵스라는 게임 시리즈도 만들어서 당시로서는 약간 인기를 끌었죠.

R6-Cover.jpg Spec_Ops_II_Green_Berets.jpg Soldier Of Fortune 2 Double Helix[2].jpg
-가운데 있는 것이 스펙 옵스 시리즈의 2편인 그린베레의 표지. 양측에 있는 비슷한 시기의 다른 게임들과 비교해 참 몰개성합니다.
당시엔 꽤 멋져 보였는데 지금 보니 가죽장갑에 레일도 광학도 없는 쌩 M4에 우드랜드 BDU와 부니햇...미군이 저랬던 시절도 있었죠

 해보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게임잡지에서 공략을 좀 본 기억으로는 그냥 이런저런 인질 구출이나 시설 폭파 같은 군사 작전을 스테이지별로 수행해나가는 꽤 직설적인 느낌의 게임이었는데, 10년도 더 지난 후에 갑자기 이 시리즈의 부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작권이 어떻게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연한 B급 개발사로 전락해 아무도 모르는 게임만 만들고 있는 좀비와는 상관없이, 2K의 지원 하에 독일의 Yager라는 역시 이름 별로 없는 신생 회사에서 전혀 다른 스타일의 게임으로 만들어낸다는 거였죠. 군바리들이 나와서 총쏴댄다는 것 이외에는 전 시리즈와의 연결고리가 없다시피 해서 왜 그 이름을 달고 나오는가를 문제 삼을 법도 했지만 사실 원래 시리즈도 별로 인기 있던 편은 아니어서 사람들은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결과물은 생각보다 좀 다른 물건이었습니다.

 이쯤에서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비디오게임 작법론에 대해서 조금 늘어놓아 보자면,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비디오게임이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도전’ 내지는 퐁의 ‘대결’이라는 직설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스토리텔링 장치를 핵심적 겉포장으로 도입하기 시작한지도 아주 오래되었지만, 게임 산업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대폭 성장했고 게임 하나 만드는 제작비가 수억 달러 단위로 들어가는 일도 있는 2012년의 오늘날에조차도 꽤 많은 게임들이 상당히 원초적인 모티브의 이야기를 갖고 있기는 합니다.

  바로 플레이어를 주인공에게 그대로 대입시키고, 주인공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어낸다는 거요. 지구에 쳐들어온 외계인들을 때려잡고, 천 년만에 부활한 악마를 다시 봉인하고, 세계정복을 꿈꾸는 비밀조직을 박살내고, 핵무기를 밀반입한 동네북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나 러시아 극우주의자들을 헤드샷한 뒤 탱고 다운! 을 외쳐주고, 아무튼 뭔가 거창하고 멋진 걸 말입니다. 주인공이 플레이어의 마음대로 통제되는 만큼 플레이어의 분신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대리만족의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게임 제작사들은 가장 원초적인 부분에서 플레이어에게 성취감을 제공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택해서 적당히 힘든, 하지만 너무 넘기 힘들지는 않은 장애물들을 배치한 뒤 결말에선 당신이 세상을 구했습니다! 만세! 를 외치며 예쁜 헐벗은 여자를 보여주고 신나는 음악을 틀어주며 성취감을 만끽하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 게임이 어딨냐고요? 여기 최소 하나는 있네요.

 그런 맥락에서 비디오 게임들의 스토리들은 아직도 깊이라는 면에서는 갈 길이 멉니다. 물론, 진부하고 단순무식한 이런 이야기가 꼭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또 아주 많지는 않은 명작과 걸작들이, 심지어 졸작일지라도, 이런 진부하지만 잘 팔리는 플롯에서 벗어나 독특하고 멋진 시도들을 꽤 해내며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웅답지 않은 영웅 컨셉 쯤은 어느새 흔해빠진 게 되었긴 하지만, 이 모든 진부한 클리세들이 넘쳐나는 현대사회의 대량양산형 데이터베이스식 스토리라인 속에서도 비디오게임의 플롯과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꽤 미개척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게 스펙옵스: 더 라인이 돋보이는 이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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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부제가 더 라인인 건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더 라인의 이야기는 일견 꽤 단순해 보입니다.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를 아주 가까운 미래, 애꿎은 두바이가 전례 없는 거대한 모래폭풍에 휘말리고 구조를 위해 파견된 미군부대 역시 혼란 속에서 실종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별 일 없이 국제사회는 이 사건을 무시한 채로 몇 주가 지났는데, 갑자기 두바이에서 들려오는 무선 구조 요청 메시지를 조사하기 위해 플레이어와 2명의 미군 특수부대 델타 포스 요원이 두바이에 투입되죠. 잘생긴 백인 주인공에 깡마른 백인 저격수 한명과 덩치 좋은 흑인 중화기 사수라는 참 역으로 인종차별적인 느낌이 드는 3인조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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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만 읽어도 좀 미심쩍은 느낌이 드는데, 바로 시작되는 게임플레이는 사실 상당히 무덤덤합니다. 기어즈 오브 워에서 시작된 인기 좋은 3인칭 엄폐 전투 시스템을 도입해 전투지마다 참 편리하게 널려있는 엄폐물들 뒤에 숨었다가 몸 조금 내밀고 총질하고 재장전하고 또 총질하며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수백 명씩 쏴죽여나갑니다. 이미 검증된 요즘 유행하는 시스템이니 나쁘진 않지만 조작도 다소 불편하고 무기들도 단조롭습니다. 현대 컴퓨터 기술이 받쳐주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인공지능 동료들은 전투에서 별 쓸모가 없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 역시 지나치게 단순하죠. 완성도로 놓고 보자면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눈에 띌 만한 참신한 점이라곤 없어서 매우 진부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심지어 ‘모던 워페어 2’에서 봤던 저거넛이 튀어나오는 데서는 살짝 실소까지 터뜨릴 뻔 했습니다. 신생개발사니 경험이 부족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너무 심심합니다. 그렇죠, 당연하지만 여기까지였다면 흔한 양산형 게임 A 정도 취급받았겠죠.

  하지만 참 희한하게도 이야기나 연출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스토리의 비중이 높은 탓에 게임플레이에 비해 컷씬이 너무 길고 많다는 느낌이 있고, 앞뒤를 재어봤을 때도 스토리가 구석구석 완벽하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저의 짜증나게 사소한 것까지 따지고 드는 밀덕의 혼을 불태워 왜 여기 나오는 M4는 가늠자가 2개(그나마 하나는 거꾸로) 붙어있는 거고 왜 이런 작전에 델타포스가 그것도 도보로 투입되는 건지 따진다던가, 아님 좀 더 넓은 시각에서는 탈영이라는 심각한 사태가 어떻게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거고 두바이가 어떻게 모래더미에 파묻히는지 등 스토리의 이런저런 요소들에 태클을 거는 건 얼마든 가능하고, 또 저는 제 성격답게 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좀 쓸데없이 복잡한 감이 있으며 전개상에서의 무리수 역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희한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기묘하게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적어도 제가 이야기했던 잘 팔리는 익숙하고 진부한 공식과는 확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도덕이고 해답이고 뭐고 없는 중요 장면마다 숨이 턱 막혀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날 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고 반문하게 되더군요.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흔해빠진 게임의 1. 착한 선택 2. 못된 선택의 객관식 답안지에서는 아마도 뭘 해야 할지 잘 알 것만 같은데 이 게임에서는 이상하게 생각 없이 무언가를 하게 되더군요. 설핏 납득이 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의 영역에 걸쳐 있고 그래서 묘하게 플레이어를 빨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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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에 이 중동의 사막도시는 분명히 매우 우수한 무대입니다. 모티브로 따온 하트 오브 다크니스(물론 저는 그 소설이 모티브였다는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밖에 안 봤지만)의 축축한 정글은 아니지만 모래에 파묻힌 화려한 거대도시, 너무나도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이지만 희한하게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바이 내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한 꺼풀씩 드러내 보이는 새로운, 이상하고 기괴하며 좀 많이 미쳐있는 이 멋진 신세계에는 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기막히게 어울리는 딥 퍼플이나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고, 하늘이 갈수록 더욱 새카매지고, 이전까지의 대부분의 다른 미디어는 다뤄줬으나 비디오게임들은 다루길 원하지 않았기에 묘하게 진부한 동시에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어두운 이미지들이 떠오르는 가운데 주인공은 천천히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내려가죠. 미장센적 그림에서부터 주인공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변해가는 것이나 로딩시 나오는 팁까지, 참 세세한 것까지 기존의 장르적 공식을 숙지하고 비틀어 잘 준비해놓고 플레이어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싱글플레이의 연출은 신생 개발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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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스펙옵스의 싱글플레이는, 스토리, 연출, 무대가 어우러져 등장하는 게임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신선하며 동시에 만족스럽게 씁쓸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같은 배급사인 2K에서 나온 바이오쇼크가 어떤 맥락에선 상당히 비슷한 시도를 하긴 했지만, 스펙옵스는 훨씬 더 불친절하고 어둡고 애매모호하며 어쩌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냉소적입니다. 플레이어는...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총 4개가 존재하는 엔딩을 보고 나서 이런 건 내가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고, 내가 보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마 제작진은 제 말에 대해, 흔한 콜 오브 듀티 아류 따위가 그렇듯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총으로 적들을 쏘는 것이야말로 댁이 원한 거 아니었냐고 차갑게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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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에 걸맞게 게임플레이 방식 부분에서도 좀 더 과격하고 참신한 시도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점수를 많이 깎아먹기는 하겠지만, 스펙옵스: 더 라인은 전반적으로 제법 우수하며 새로운 스토리와 연출이 다른 단점들을 덮을 수 있는 물건입니다. 어쨌건, 비디오게임 산업은 아직 꽤 젊으니까요. 완벽하게 공식들이 정립되기 전에 이리저리 튀어나오는 새로운 시도들이 모두 성공할 수는 없고 모두가 그런 방향을 추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꽤 기억에 남을 만한 물건은 종종 나오곤 하는 거죠.

 명작도 대작도 되지 못했지만 묘하게 만족스러운 물건입니다. 영어가 부담되시는 분이라면, 비공식 한글패치가 아마 몇 주 정도 있으면 나올 것 같고요. 총질 자체가 별반 재미없는 덕에 더 재미없는 멀티플레이는 어차피 할 이유도 없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좀 기다린다고 손해 볼 것도 없을 거고. 흥미가 동한다면 언젠가 스팀 세일 같은 거 할 때까지 한참 기다려 저렴하게 한 번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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