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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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물의 대표, 사이버펑크는 대략 이런 분위기입니다.]
SF 하위 장르 중에는 유독 ‘~펑크’들이 많은 듯합니다. 친숙한 사이버펑크나 스팀펑크부터 별별 희한한 종류들이 줄줄이 포진했어요. 아무 단어만 갖다 붙이면 신종이 생길 정도에요. 이런 펑크 장르들은 주류가 되는 기술과 사회, 개인의 문제를 짚어봅니다. 어떤 기술 산업이 급진적으로 대두하고, 그와 관련해서 정부와 기업이 바뀌고, 개인 생활상까지 영향을 미치는 식입니다. 신기술은 그에 따른 후유증이 상당하고요. 여기서 핵심 기술이 무어냐에 따라 장르가 갈리죠. 가령, 펑크 장르의 대표인 사이버펑크는 정보통신과 로봇 기술이 토대입니다.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고, 정보를 권력자들이 독차지하고, 가상현실에 쏠린 사람들이 피폐해지고, 해커들이 음지에서 활동하죠. 인공지능이 발달했으니, 사이보그나 로봇들도 설칩니다. 간혹 사람과 똑같은 로봇 때문에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부작용도 생기고요. 여기서 컴퓨터 기술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또 다른 펑크 장르가 탄생합니다.
펑크 장르는 핵심 산업 기술이 태동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이버펑크는 80~90년대 부흥하던 장르라서 일색(日色)과 마천루, 네온 사인이 도심지를 연출했습니다. 그때는 도시가 그렇게 휘황찬란했고, 일본 자본이 세계를 뒤흔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졌지만, 요즘 사이버펑크도 여전히 일색을 놓지 않았죠. 사이버펑크와 일본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스팀펑크는 19세기 영국과 단짝입니다. 이름답게 산업혁명 시기의 증기기관이 모태입니다. 도시화를 이루고, 공장을 세우고, 과학 엑스포가 열리고, 해외 무역이 증가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리던 장소가 바로 런던이니까요. 종종 다른 유럽이 나오지만, 그 외의 아시아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은 다소 논외로 치는 듯하네요. 사이버펑크가 펑크 문화답게 반골적인 기질이 있다면, 스팀펑크는 다소 온화합니다. 19세기 영국은 낭만주의가 떠오르고,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 아래 여러 환상이 공존했으니까요.
[칙칙한 공장과 대도시, 오염이 깃든 영국풍 스팀펑크.]
그렇다고 스팀펑크가 마냥 해맑은 건 아닙니다. 실제로 당시 런던은 온갖 사회문제를 떠안았고, 여기에 주목하는 작품도 있어요. 증기기관과 공장 덕분에 노동자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졌습니다. 당시 아이들이 악독한 환경에서 수 십 시간씩 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굴뚝 연기가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였고, 곳곳에 오물이 넘쳐났습니다. 외국인들이 길거리를 서성이며, 런던 시민들과 마찰을 일으켰어요. 귀족과 서민의 갈등이 심해진 것도 당연하고요. 권위에 도전하는 펑크 문화답게 권력층과 자본가, 귀족을 공격하는 스팀펑크 작품도 존재합니다. 또한 스팀펑크는 종종 마법을 뒤섞기도 합니다. 마법사가 공학자나 기술자와 비슷한 위상입니다. 다른 펑크 장르에도 이런 경향이 더러 보이죠. 기술 산업이 중점이라 마법마저 산업 기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입니다. 이게 심해지면 아예 도심 판타지와 엮이는 수도 있습니다. 사실 펑크 장르는 역동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러 요소를 뒤섞는 경우가 많아요.
스팀펑크와 비슷한 이웃사촌으로 디젤펑크가 있습니다. 당연히 디젤 엔진이 세상을 좌우합니다. 90년대 일본, 19세기 영국처럼 이것도 유사 배경이 있는데, 1930~50년대 서구(미국과 유럽)입니다. 희한하게 미국은 가솔린 엔진 위주인데, 이쪽을 배경으로 삼는 작품들도 다수에요. 아무래도 저 당시 유럽은 세계대전 때문에 휘청거렸고, 미국이 잘 나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펑크 장르는 대개 잘 나가는 선진국을 끌어와서 무대로 삼으니까요.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반영했기 때문인지 혼란스럽고 음울한 분위기도 없지 않습니다. 주적으로 나치가 나오기도 하고, 나치(게르만)의 비밀 무기도 등장합니다. 건물을 장식하는 요소는 직선과 곡선이 겹친 아트데코. 여기다 30년대 특유의 레트로 SF 디자인을 반영하죠. 곡선 모양의 자동차나 철도, 항공기 등이 그렇습니다. 고풍스럽지 않고, 다소 현대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게 특징입니다. 스팀펑크는 자칫 판타지로 넘어가도 무리가 없지만, 디젤펑크는 본격적인 SF라는 이미지입니다.
[디젤펑크의 밝은 면. 어두운 면이라면, <메트로폴리스>가 대표 사례.]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지나면, 냉전이라는 갈등이 떠오르죠. 미국과 소련이 맞붙은 냉전은 두 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우주 개발로 서로가 유리한 영역을 차지하려고 애썼죠. 다른 하나는 핵전쟁으로 누가 언제 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를지 몰랐습니다. 이전 전쟁과 달리 일단 핵탄두가 떨어지면 파괴력이 어마어마한지라 인류 멸망을 걱정하는 세태였습니다. 여기서 파생한 것이 바로 아톰펑크 혹은 뉴클리어펑크. 방사능 걱정이 사회에 만연해요. 세상이 끝장나고, 돌연변이가 생겨나고,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살아가요. 간혹 초인영웅물처럼 밝은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암울합니다. 아니, 초인영웅마저 방사선 맞은 괴물 취급을 받을 수 있죠. 방사능이란 물질이 극히 위험하므로 세상이 아예 초토화되기도 합니다. 이러면 아톰펑크에서 핵전쟁 아포칼립스로 귀화하죠. 어차피 방사능을 다룰 거라면, 화끈하게 전쟁으로 흘러가므로 아톰펑크는 홀로서기보다 아포칼립스에 기대는 경향이 잦습니다.
아톰펑크를 장식하는 기법은 다소 촌스러운 구기(googie) 디자인입니다. 하늘로 날아갈 듯한 지붕이나 낙하산처럼 얽힌 외벽, 들쑥날쑥 커다란 간판이 특징이죠. 우주 산업이 한창이므로 당연히 우주선, 우주복, 광선총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아포칼립스로 기울면, 폐허가 된 도시, 삭막한 황무지, 너덜너덜한 약탈자들이 대세가 되고요. 창작물서의 우려와 달리, 다행히 냉전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결정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서로 핵미사일 날리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어요. 이윽고 냉전이 끝나고, 90년대 이르러 새로운 산업이 떠오릅니다. 유전공학이 얼굴마담인 바이오 산업이죠. 시간이 지나자 동물 복제도 이루어지고, 줄기세포 이야기도 나오고, 유전자 조작 식품까지 도마에 오릅니다. 이런 것들을 골자로 삼은 작품이 바로 바이오펑크입니다. 컴퓨터 기술이 유전자 조작 기술로 바뀌었다고 보면 됩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조립하듯 생명체를 원하는 대로 설계합니다. 이른바 맞춤 생명체가 일등 제품으로 탄생합니다.
[돈이 된다면, 공룡도 만듭니다. 물론 기업은 이윤 우선이니까 생태 재난은 책임 안 지죠.]
창조는 신의 권능이기에 생명 설계를 다루는 작품은 예전부터 흔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는 20세기 초에는 관련 작품이 수두룩하게 나왔죠. 고전 SF에서도 미치광이 과학자가 피조물을 만드는 이야기는 자주 써먹었습니다. 사람을 만들거나, 동물을 바꾸거나, 죽은 자까지 다시 일으켰습니다. 혹은 자기 몸을 투명하게 만들거나 신체를 변형하기도 합니다. 고전 SF 소설과 달리 현대 소설들은 미치광이 과학자보다 대기업의 상업 윤리에 주목합니다. 사람들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마저 유전자 조작의 표적이 되었다는 전개입니다. 식량은 무기로 바뀌고, 식품회사가 특정 종을 점유합니다. 공산품처럼 식품도 대기업 상품에 매달려야 합니다. 해커들이 가상 공간에 침투해 소스 코드를 탈취하는 것처럼 유전자 해커가 유전자 코드를 조작해 대기업에 반항하죠. 비단 먹거리만 아니라 동력, 실험, 애완동물 등에서도 각종 조작 생물이 판칩니다. 이런 놈들이 간혹 통제를 벗어나면 재앙을 초래하죠. 덕분에 별별 돌연변이 괴물이 날뛰기 좋은 장르입니다. 크리쳐를 선호하는 독자에게 안성맞춤.
여기서 한걸음 나가면, 나노펑크가 등장합니다. 미세한 기계들을 다루는 나노 기술이 주류입니다. 나노 기술의 특징은 극도로 작고 무수한 기계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거죠. 그래서 조그만 틈바구니로 침투해 혼란을 일으키거나 제멋대로 형체를 바꾸기 좋습니다. 그저 외형만 바꾸는 게 아니라 성질마저 달라집니다. 숫자가 엄청나서 무한 증식하거나 개개는 멍청해도 무리 지능으로 전략을 짤 수도 있겠죠. 때로는 미세한 개체가 엄청나게 모여서 커다란 괴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런 놈은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상처를 입혀도 스스로 수리하거나 복구하거든요. 마음대로 형체를 변해 공격하거나 사라질 수 있어요. 입자 각도를 돌려서 은폐 기술도 구현하거나,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서 내구력을 증진시킬 수도 있고…. 대기업 손에 들어가면 바이오 산업만큼이나 위험한 재앙이 터질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한히 불어나는 데다가 머리까지 좋으니, 다른 질병이나 바이러스는 상대가 안 되잖아요. 나노 스웜이 세균과 비슷해서 그런지 바이오+나노 결합 펑크도 간혹 나옵니다.
[나노 기술은 환경 변화도 가능합니다. 엄청난 후폭풍이야 서민들 몫이고.]
증기, 디젤, 방사능, 정보통신, 바이오, 나노 등등 시대가 발전할수록 펑크 장르도 늘어납니다. 이밖에도 과거지향적인 별별 펑크들이 많습니다. 석기시대도 훌륭한 소재입니다. 선사시대 대체역사로 원시인들이 발달한 석기 기술을 이용했다면? 훌륭한 스톤펑크가 되겠죠. 혹은 과학기술 대신 마법을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과학처럼 발달한 마법으로 과학자 역할을 마법사가 대신합니다. 이른바 매직펑크에 해당하죠. 16세기 꽃피우는 문화를 배경으로 삼은 르레상스펑크도 가능해요. 레오나르드 다 빈치를 비롯한 온갖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넘쳐나죠. 워낙 이상한 걸 많이 만들어서 소재가 모자랄 일은 없을 겁니다. 시대 순서로 따지면, 스팀펑크 이전이라 하겠네요. 다만, 스톤펑크나 르네상스펑크, 매직펑크 등은 아직 완전한 하위 장르로 독립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유형을 임시로 묶은 터라서요.
저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두 가지는 사이버와 스팀입니다. 두 종류는 자기만의 확고한 분야를 정립했어요. 디젤펑크도 많긴 한데, 어째 스팀펑크만큼 영역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디젤 엔진이라는 물건이 증기기관처럼 로망이 넘치거나 겉보기에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그런 듯해요. 차라리 아트데코 양식이 훨씬 알아보기 쉽죠. 아톰펑크도 방사능 아포칼립스가 너무 잘 나가기에 묻어가는 느낌이 있고요. <폴아웃>은 훌륭한 아톰펑크 사례지만, 그냥 아포칼립스로 부르는 편이잖아요. 바이오펑크는 고전적인 프랑켄슈타인부터 최근의 복제인간까지 널리 쓰이는 개념입니다. 워낙 유명해서 자기 장르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감초처럼 여기저기 다 끼어들죠. 나노펑크는 기계와 생체를 넘나들며, 아주 못하는 게 없습니다. 워낙 혁신적인 개념이라 어느 설정에 갖다 붙여도 무리가 없는 듯.
이처럼 산업 기술과 펑크 장르는 함께 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기술 산업이 떠오르면,
새로운 펑크 문학도 등장할지 모르죠.
물론 고전적인 사이버펑크에 대한 정의는 따로 있지만
개인적으로 펑크란 장르는 기술 또는 현상과 그에 의한 반(비)국민적 계급사회, 약육강식을 다루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가권력은 부도가 나고 기업은 득세하죠.
스팀펑크는 아무래도 실제 계급사회가 당연시 되던 빅토리아조를 다루는 만큼
그나마 그 거부감이 덜한게 아닌가 싶네요.
상관없는 얘기지만, '뮤턴트 크로니클스(국내 개봉명 '뮤턴트: 다크 에이지')'라는 어정쩡한 호러 어드벤쳐 영화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흔해빠진 좀비 영화 중에서 스케일이 약간 더 큰 정도인데,
토머스 제인, 론 펄먼, 드본 아오키, 존 말코비치 등등 출연진이 제법 빵빵한데도
어정쩡한 시나리오와 연출이 그 출연진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 합니다. 시각효과는 무슨 게임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엉성했고요.
어찌어찌 영화를 끝까지 다 보긴 했는데, IPTV에서 무료로 봤는데도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기들의 내부기기들이 전기가 아닌 증기로 돌아가고 있더군요.
이 영화가 스팀 펑크라는 걸 깨닫고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런 식의 영화에서 스팀 펑크 세계관을 접할 줄은 몰랐거든요.
야구아 님의 글을 보니 스팀 펑크라기보다는 디젤 펑크에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