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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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리
추석 연휴 뒤끝을 맞이하여 뤽 베송 감독의 <루시>를 보았습니다.
SF 영화를 원했던 제 취향과, 예쁜 여주인공을 원했던 와이프가 같이 골랐죠.
결과적으로... 저는 너무 많은 SF 소설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익숙한 내용을 보았기에 무덤덤,
만삭의 임산부였던 와이프는 뜻밖에 잔인한 장면이 많아서 눈을 가리고 영화를 실눈으로 보았습니다.
뤽 베송이 직접 혼자 각본을 쓰고 감독으로 연출까지 맡았다는 <루시>는 인류의 진화를 다룹니다.
중국에 유학해 온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루시'가 우연히 사건에 연류되고, 사고를 당해 진화하게 되죠.
이후 진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결과... 결국 루시의 육신이 소멸하고 강력해진 정신이 사방에 존재하게 됩니다.
SF팬들에게 익숙한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시로 마사무네 &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유사하죠.
또 다른 작품이라면 아베 코보의 단편소설 <홍수>, 그렉 베어의 장편 <블러드 뮤직>의 결말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그 밖에 토미노옹의 <거신전설 이데온>과 안노 히데야키의 <에반게리온의 종말>에서도 마찬가지 결말이었죠.
인류가 어떤 계기로 진화하고, 그리고 물질의 형태를 버리고 다른 형태로 도처에 편재하게 되는 식이니까요.
다만 아서 클라크나 그렉 베어는 인류가 '군체'가 되어 진화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갔는데,
뤽 베송은 <루시>에서 사고를 당한 여주인공 혼자서 진화하게 된다는 정도가 차이를 보입니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만 놓고 본다면 SF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익숙한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최민식이 뤽 베송 작품에 나온다는 것 때문에 본 사람은 "최민식의 비중이 꽤 크다"는 것에 만족할 것이며,
SF를 잘 모르고 그냥 흥미롭게 영화를 즐기려던 관객이라면 "이게 도대체 뭐냐"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솔직히 상업 영화로 생각한다면 큰 흥행을 하기 어렵고 비교적 잘 빠진 영화라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지만,
독특한 구성과 편집,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직선으로 말하는 모양새는 독립영화스럽기도 해서 좋더군요.
실은 영화를 보면서 즐거웠던 것은 다른 면이었는데, 20년 전의 독서 체험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리처드 리키, 로저 레윈 공저로 쓰여져서 학원신서 1권으로 출간되었던 바로 그 책 <오리진>의 추억이었죠.
<오리진>에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추정된 '루시' 화석을 에디오피아에서 발굴하는 것이 큰 비중으로 나오고,
뤽 베송의 영화 <루시>는 최초의 인류라면서 원시인 '루시' 반복적으로 보여주어 주위를 환기시킵니다.
최초의 인간 '루시'와 스칼렛 요한슨의 '루시'를 중첩시키면서, "진화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거든요.
저는 왕년 중학생 시절 흥미롭게 읽었던 책 <오리진>을 영화 <루시>를 보면서 반추하게 되더군요.
최초의 인간이 '루시'라는 주장은 꽤 무리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루시'가 소위 진화의 "미싱 링크"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화석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에디오피아에서 최초의 인간 '루시' 화석을 발견한 미국의 고고학자가 바로 "도널드 요한슨"이고,
뤽 베송의 영화 <루시>에서 새롭게 한 단계 더 나아간 진화를 이루는 여주인공을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자리잡은 "요한슨 일가"에서 초지일관 '루시' 캐릭터를 밀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보이는 게 조금 웃겼습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야말로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잔재미가 되겠죠.
2. 감독
뤽 베송은 <그랑블루>, <니키타> 등으로 차츰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레옹>으로 정점을 찍은 후,
<잔 다르크>에서 너무 힘을 뺐는지 그 다음부터는 연출을 하기보다 제작, 각본, 원안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뤽 베송 주도로 제작된 <택시> 시리즈, <트랜스포터> 시리즈, <테이큰> 시리즈 등이 성공을 거두면서
독특한 액션과 카 체이싱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아냈고, 시간이 갈수록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죠.
왕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영화 인생을 반추하면서 회한 또는 탄식 비슷하게 투덜거린 것이 있었는데...
"흥행을 그리 염두해두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우겨서 만들었던 <미지와의 조우>가 예상을 깨고 크게 성공을 거두자,
그 이후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영화사에서도 제작진 중에서도 어느 누구도 내가 하는 일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 이게 오히려 내게는 불편하다. 평생 영화를 만들면서 주변으로부터 진실된 조언을 듣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감독들에게 이러한 스필버그의 넋두리는 부러움 반 어이없음 반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위상이 아닐 수 없고, 이런 레벨의 감독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죠.
현재 뤽 베송이 대략 비슷한 위상이 아닐까요? 그냥 자기 하고 싶은대로 영화를 만들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새겨나가죠.
<택시>에서 시작된 카 체이싱 액션 스타일은 <트랜스포터> 시리즈를 거쳐 <테이큰>에서 어느 정도 완성을 보았고,
이후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액션 영화들이 <테이큰>의 뤽 베송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루시>도 주제가 인류의 진화 어쩌구가 되었든 간에, <테이큰>을 제작한 사람답게 화려한 자기 스타일의 액션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번에 <루시>를 보면서, 뤽 베송 이 양반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성공에 대한 압박이 별로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 자기 스타일을 마음껏 드러내도 되는 몇 안되는 선택받은 영화 감독인 것이죠.
3. 최민식
<명량>에서 위대한 성웅 이순신 장군으로 감명을 준 최민식은 <루시>에서 잔인한 갱스터 두목으로 나옵니다.
같은 날 극장에 같은 사람이 주연을 맡은 영화 두 개가 나란히 걸려 경쟁하는 모습은 꽤 드물게 보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민식은 <취화선>에서 폐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고, <신세계>에서는 경찰 간부,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비리 공무원이었습니다.
나쁜 놈, 정의로운 사람, 갈데 없는 폐인까지 완전히 그 역할에 딱 맞는 바로 그 사람으로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는 게 특기죠.
<루시>에서의 최민식은 과거 헐리우드에 진출한 동양/유럽의 정상급 배우가 밟았던 바로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개성이 강한 악역으로 등장하여 주인공의 앞 길을 막고, 그리고 결국 주인공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는 역할말입니다.
이연걸이 <러셀웨폰3>와 <미이라3>에 그러한 역할로 나왔고, 장 르노가 <미션 임파서블>에서 했던 게 그러한 악역이었습니다.
한국인 배우로는 과거 비와 이병헌이 그런 역을 담당했었습니다. 이제 <루시>에서는 최민식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루시>에서 막나가는 갱스터 보스로 설쳐대는 최민식은 매우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저런 악역으로 등장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레벨의 대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또 한 가지라면...
<루시>는 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가 무척 많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주연을 담당한 최민식은 오로지 한국어로 연기하면서,
죄다 상스러운 말투로 욕설을 내뱉을 뿐입니다 - 악역이고 막나가는 갱스터니까 당연한 일이죠.
역할이 그러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겠지만,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듣기 거북하더군요.
작년에 개봉한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도 북한 출신의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을 점령하는 내용을 다루는데,
악역의 등장인물들이 한국어 대사를 무척 많이 말하지만 그 중 태반이 상스러운 욕설이어서 기분이 별로였죠.
이번에 <루시>를 보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 헐리우드에 진출한 아름다은 우리말이 왜 욕설 뿐이어야만 할까요.
그래도 덕분에 지루해지지 않고 잘 봤지요.
최민식 님의 연기는 "레옹"의 "게리 올드만"을 떠올리게 하더라구요. 연기 자체는 참 좋았지만 이 영화에서 액션은 정말 곁다리 정도라서 최민식 님 연기가 아까웠어요.
퓨처라마의 그 장면이 갑자기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