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작품 주제나 분위기가 장르에 고정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보다 장르를 먼저 살펴보고, 가볍거나 무겁다고 판단하는 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스팀펑크가 이런 쪽인 것 같습니다. 디지털 시대를 탈피해서 아날로그 감성을 덧칠하고, 아련한 19세기의 향수를 일깨우는 복고풍이라고 할까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스팀펑크의 주 무대인 빅토리아 통치기는 화려한 문화가 번성했던 시절로 회상하니까요. 영국 해협 건너 프랑스에서는 소위 벨 에포크라고 해서 유래 없는 번영기이자 황금기로 꼽습니다. 과학이 꽃 피우고, 산업이 발달하고, 장밋빛 20세기를 앞둔 낭만적인 시대처럼 보이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팀펑크 인테리어, 그러니까 태엽과 크랭크 축과 아르누보 무늬와 가스 파이프가 복잡하게 설치된 장비들은 그런 낭만에 기댄 물건입니다. 그래서 스팀펑크 소설이나 영화, 게임 등도 밝고 가벼울 거라고 오해합니다. 사실 스팀펑크 창작물이 항상 밝은 건 아닌데요.


여기서 스팀펑크라고 하면, 19세기 바이오펑크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스팀펑크를 다루는 여러 작품에서 바이오펑크가 섞여서 나타납니다. 이는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가 글을 쓰던 시기에 멜리 셀리나 로버트 스티븐슨 같은 작가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스팀펑크와 바이오펑크는 엄연히 다르지만, 19세기 상상 과학이라는 명목 아래 한 울타리에 묶이는 셈이죠. 게다가 이 당시에는 아직 미신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스팀펑크에는 마법이 끼어드는 사례도 잦습니다. 유명인들까지 강령회니 요정이니 하는 소리를 믿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날 스팀펑크에는 조준경 장착한 플린트록 라이플로 유전자 개조한 늑대인간을 때려잡는 사냥꾼이 등장하죠. 칼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사악한 마법사와 언데드를 처단하기도 하고요. 간혹 검마 판타지에 스팀펑크가 출현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가 기계 장치 가득한 골렘을 제작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검마 판타지는 선하고 밝기 때문에 스팀펑크도 그럴 거라는 인식을 부추기죠.


어쨌든 스팀펑크, 바이오펑크, 마법이 뒤섞이는 창작물이라고 항상 가벼운 건 아닙니다. 빅토리아 시기의 잘 나갔던 시절을 띄워주거나 벨 에포크를 찬미하는 작품도 많지만, 어두운 작품도 그에 못지않게 많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허버트 웰즈만 해도 그렇죠. 웰즈가 쓴 스팀펑크 중에 그리 밝은 게 없잖아요. <타임머신>은 어디로 봐도 세상이 멸망하고, 충격적인 진화를 밝히는 작품입니다. 비극은 아니지만, 작중 분위기는 내내 우울하고 정적입니다. 하긴 지하에 몰록들이 들끓는데, 분위기가 밝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우주전쟁>이야 인류가 우수수 죽어나가고요. 바이오펑크인 <투명인간>과 <모로 박사의 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로 박사의 섬>은 그냥 어두운 걸 넘어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뼈와 살이 뒤틀리는 느낌입니다. 여기다 각종 단편을 떠올려도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아마 쥘 베른의 계몽적인 과학 사상 때문에 19세기 스팀펑크가 밝다고 생각하는듯 한데, 다른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하등 그렇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저 당시는 희대의 흡혈귀 캐릭터 드라큐라를 만든 브람 스토커가 살았습니다. <드라큐라>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는 흡혈귀입니다. 그러니 19세기 스팀펑크와 바이오펑크에 심령 공포나 흡혈귀가 끼어들어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흡혈귀가 등장하는 스팀펑크가 밝을 리 없죠. 소설은 물론이고, 비디오 게임조차 그렇습니다. 슈팅 게임이야 결국 플레이어가 괴물들 무찌르는 결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정 자체는 음침하고 으스스하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스팀펑크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도 사이버펑크 때문입니다.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가 살던 시절에는 스팀펑크라는 개념이 없었고, 웰즈는 자기 소설이 과학 로맨스라고 생각했죠. 나중에 사이버펑크가 유행하면서 비로소 스팀펑크라는 용어가 덩달아 파생했습니다. 그리고 사이버펑크는 그리 밝은 장르가 아니며, 여기서 파생한 스팀펑크 역시 그렇습니다. 아니, 펑크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어딘지 기괴하게 비틀린 셈이니, 어두운 쪽으로 흐르기가 훨씬 쉽습니다.


기괴하게 비틀린 스팀펑크, 신체 개조, 마법 등을 조합한 작품이라면,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이 그럴 듯하겠네요. 차이나 미에빌은 소위 뉴 위어드를 주장하면서 따스하고 활기찬 검마 판타지와 다르다고 선언했습니다. 위어드 픽션은 러브크래프트나 클라크 스미스 같은 양반들의 작품을 가리키는데, 이걸 현대적으로 새롭게 단장한 셈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의 소설들은 그래서 우중충하고, 역겹고, 추레합니다. 청소년 소설인 <언런던>도 이름부터 기괴하고, 실제 작중에서도 어딘가 삐뚤어진 캐릭터가 줄곧 등장하죠. 쓰레기가 쏟아지는 환상 세계가 무대이니 당연하겠습니다. 이름부터 뭔가 떨떠름한 <쥐의 왕>은 구역질 나는 시궁창 생활을 보여줍니다. 쥐의 왕이 먹다 버린 케이크를 먹는 장면은 몇 번 읽어도 기가 막힐 정도. <퍼디도 정거장>은 제목이야 그럴 듯하지만, 속내용은 여타 미에빌의 소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코를 틀어막고, 뒷골목으로 달려가 토하고 싶을 내용이 줄줄이 쏟아집니다. 이거 작가가 제정신으로 쓴 건지….


현대적 스팀펑크의 문을 연 <아누비스의 문>은 시간여행물이라고 하지만, 사실 스팀펑크 느낌이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스팀펑크라고 해도 내연기관과 태엽장치보다 신체 개조가 더 두드러지죠. 그러니까 바이오펑크가 지배적이고, 여기다 각종 마법까지 더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 영국의 퀴퀴하고 어슴푸레하고 맛이 간 뒷골목을 재현했습니다. 사람에게 주술을 걸거나, 사악한 신을 섬기거나, 피의 의식을 치르는 마법사들이 우르르 나오며, 그들을 뒤쫓는 비밀 결사가 등장하죠. 마술사와 거래하는 거지들의 소굴은 또 어떻고요. 어둠 속에서 보면 흠칫 놀랄 기형아들이 우글거립니다. 그 사이에 늑대인간 같은 괴물이 뛰쳐나오고, 이 모든 것이 한데 엮어 지저분하게 돌아갑니다. 판타지 비중이 커서 그냥 스팀펑크를 상상하고 읽으면 좀 실망할 공산이 크지만, 어쨌든 스팀펑크가 마냥 밝지 않다는 사례입니다. 밑바닥에 깔린 분위기는 은근히 개그 만점이지만, 괴물이나 기형아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아마 스팀펑크가 가볍다는 인식은 영화도 한몫 할 겁니다. 우중충한 소설이나 만화가 영화화되면서 밝아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은 소설과 만화보다 영화를 훨씬 많이 보죠. 가령, 크리스토퍼 프리스트가 쓴 <프레스티지>가 그렇죠. 니콜라 테슬라가 마술사에게 희한한 장치를 만들어주는 소설입니다. 마술 쇼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눈속임을 위해 미지의 과학까지 손을 대고, 기계 장치에 휘말려 파국을 거듭하는 마술사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로 만들어서 화제였죠. 소설을 읽어보면, 꽤나 음침하고 어딘지 끈적거립니다. 마술 쇼에 집착하는 마법사의 성격도 문제지만, 기계 장치가 하필 사람 잡는 물건에 가까운지라…. 마술 쇼를 위한 네크로맨서가 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게 영화판에서는 설정이 전혀 달라집니다. 영화판에서도 여전히 꺼림칙한 기계지만, 소설판보다 훨씬 순화되었고, 막판 결말도 그리 당혹스럽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끈적한 느낌도 희석했고요. 이게 감독의 결정 때문인지, 아니면 상업 영화는 밝아야 하니까 원작을 고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영화가 소설보다 훨씬 밝아졌다는 사실은 분명하죠.


사실 장르만 보고, 해당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가늠할 수는 없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무조건 가볍다거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언제나 묵직하다는 거야 상식 수준입니다만. 장대하고 무거운 스페이스 오페라도 있고, 웃기고 쾌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도 있는 법이죠. 사실 이안 뱅크스나 댄 시먼스가 쓰는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는 상당히 장중하잖아요. 장르라는 게 공통 속성을 묶었지만, 절대적인 게 아니니까요. 스팀펑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는 정말 19세기 유럽의 낭만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도 있습니다. 반면, 산업 사회의 부정적인 면이나 과학 만능주의의 위험성, 고딕 호러와 결합한 창작물도 다수겠죠. 그러니 막연하게 빅토리아 치세와 벨 에포크, 스팀펑크 전시회를 보고, 장르 창작물까지 판단하는 건 선입견이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두운 작품을 더 많이 봐서 그런지, 스팀펑크라고 하면 기괴한 것부터 떠오르더군요. <타임머신>부터 <제틀맨 리그>를 거쳐 <퍼디도 정거장>까지, 이런 작품들이 뇌리에 깊게 남았습니다.


※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게임 <블러드본>도 스팀펑크 요소에 가깝죠. 증기기관 같은 게 표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배경은 근대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분위기입니다. 작중 주인공이 총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기관총 같은 게 나오니까요. 이 게임은 시종일관 칙칙하고 어두우며, 나중에는 아예 러브크래프트식 공포로까지 승화합니다. 팀 파워스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결합하면 이런 분위기가 탄생하겠죠. 우리 클럽에서도 몇 번 언급했고 인디 게임 쪽에서 화제였던 <다키스트 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형적인 중세 검마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총기 사용의 비중이 높다거나 개조 생명체가 등장하거나 합니다. 완전히 스팀펑크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런 요소가 상당수 끼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 역시 이름부터 아주 그냥 우울하죠. 역시 팀 파워스와 러브크래프트 냄새를 물씬 풍깁니다. 이런 것만 봐도 스팀펑크가 밝다는 건 편견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