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 취미인 사람들 중에는 상당히 흔한 경우지만, 저도 수없이 많은 불법 복제 게임, 만화, 애니, 영화, 소설을 즐겼습니다. 물론 용돈 여유 되는 대로 그런 쪽에 지출하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을 분량을 불법으로 향유했죠. (특히 야동은...)


저 자신이 그러는 주제에 남들 보고는 그건 나쁜 짓이라고 말하니 위선자 맞죠.


단순히 나 나쁜 놈 맞다는 자기 고백이나 하려고 이 글을 쓴 건 아니고, 이렇게 오랫동안 불법/합법으로 컨텐츠를 즐기며 느낀 점, 그러니까 도둑질 하다가 깨달은 도둑질의 원리 같은 것을 얘기해볼까 해서입니다.

그 원리란 건 바로, 컨텐츠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진짜 가치 있는' 것에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돈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에 돈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일례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과 가장 좋아하는 애니는 정품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애니는 DVD 세트가 현지에서 77만원, 대행사 끼면 100만원을 훌쩍 넘는 감당 안 되는 가격인데다 지역 코드에 매여서 정작 구입해봤자 보지도 못한다는 변명이라도 있었죠.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지금도 손쉽게 온라인 결제가 가능하지만 안 하고 있습니다. 대신 그 돈을 모형 같이 돈이 없으면 구할 수 없는 상품을 구입하는 데 쓰죠. 

즉 저는 (제 기준에서) 명작을 도둑질하는 대신, 그 돈을 그보다 못한 것들 구입하는 데 쓰고 있는 겁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아래 세 상품 중에 어떤 것을 살까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컨텐츠 가격 만족도 가성비 불법 가격
게임 2만원 100 50/만원 0
애니 3만원 75 25/만원 0
프라모델 5만원 70 14/만원 5만원



이 경우 제가 가진 돈이 5만원이고 정품만 산다고 할 때, 가장 만족도를 높이고 싶다면 프라모델을 포기하고 게임과 애니를 사는 것이 정답이겠죠. 
하지만 불법 루트까지 손댄다고 하면? 5만원으로 프라모델을 사고 게임과 애니는 공짜로 즐기는 게 제일 만족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즉 이 경우 게임과 애니의 완성도와는 상관 없이, 다시 말해 얼마나 명작이냐와는 상관 없이 단순히 불법 다운로드에 노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쪽은 수익을 상실하게 되는 겁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만족도가 떨어지는 프라모델은 더 싸게 구입할 방법이 없으니까 팔리고 제작사는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어쨌든 내가 가용한 돈이 5만원 뿐이고 5만원을 다 문화 생활에 썼으니 컨텐츠 업계 전체로서는 손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컨텐츠 제작자 전체가 한 집안이 아닌 이상, 컨텐츠를 도난 당한 쪽은 분명히 손실입니다. A는 그로 인해 전용 제트기를 못 사거나, 수퍼 카 구입을 포기하거나, 애인과의 데이트 약속을 미루거나, 저녁을 굶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차기작은 제발 잘 팔리기를 기원하며 창작에 몰두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5만원을 썼지만, 나로 인해 수익이 늘어난 B가 A를 밥 먹여 주는 건 결코 아니죠.

이걸 보며 '업계 전체로 보면 득실이 없으니 나는 나쁜짓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군가는 도둑질을 하고 누군가는 기부하니까 사회 전체로 보면 손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런 행동으로 누군가는 손해를 입는다는 것이고, 그 손해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둑놈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도둑질이 나쁜짓이 아니라는 자기 기만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의 컨텐츠를 훔치고서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강간을 하고서 '여자도 즐겼다' 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실제로 강간을 즐기는 여자도 일부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부 사례가 존재한다고 해서 강간 자체가 합리화될 수 있는 건 절대 아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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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회는 이상 인간만이 만들 수 있어. 보통 사람은 보통 사회밖에 못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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