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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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X김에 일을 벌인다고,
기왕지사 투덜거린 김에 아예 투덜이가 되어버리려고 하였더니...
일부러 (쪽지도 아니고) 메일까지 주시면서 "그렇게 흑화하는 것이 더 치졸하다"고 말리는 분도 계시고,
그 말씀을 듣고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다들 편한 마음으로 놀자고 만들어진 곳에 드나들면서
아예 대 놓고 툴툴거리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잘못된 행실 맞다고 반성하게 되어서...
닉네임까지 투덜이로 바꾸어가며 노골적으로 흑화하는 것은 관두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반 나절만에 벌거지로 되돌아 왔습니다. 벌거지나 투덜이나 구질구질한 느낌이지만서도...
하여간 다시금 마음을 정화하기 위하여, 마음에 평안을 주는 책장을 지그시 살펴보기로 했죠.
표도기님께서 서울 이사 기념으로 책장샷을 올리신 것을 보고... (자랑 삼아 올리신 것이겠죠)
저도 야밤에 책장을 찍었습니다 - 무지 복잡해 보이고 너저분해 보이는 책장이긴 하지만....
저 책장은 저희 집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현관앞 신발장 옆에 둔 책장입니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현관앞이라는 곳은 책장을 두어서는 안될 자리가 맞습니다.
습기 차고, 외기가 수시로 들이치고, 온갖 먼지가 나풀거리는 책에게 최악의 환경입니다.
심지어 책장 옆에 장우산이 굴러다니고, 휴지통도 있으며,책 위에 목장갑까지 올려져 있습니다.
실은... 어쩔 수 없이 저런 곳까지 책장을 놓아 둔 겁니다. 방에는 더 이상 둘 공간이 없거든요.
딱 18 평 아파트에 방 두 개, 거실겸 주방이라고 해 봐야 두 사람이 밥 먹을 공간 밖에 안됩니다.
방에 책장을 넣고 싶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이 좁은 집에 책장은 총 6개가 있군요.
그 결과... 억지로 책을 우겨 넣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책장 사진 보고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두 겹으로 책을 놓았습니다.
뒷 편에 들어간 책은 예전에 본 것들이고, 앞에 온 책들이 새로 사서 읽고 둔 겁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별로 심심한 상황 아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위에 찍힌 사진에서 책 제목이 식별되는 책도 있고 잘 안보이는 책도 있고 그런데,
저 중 SF로 볼 수 있는 책이 무엇이고, 팬터지로 볼 수 있는 책이 무엇인지 따져보았습니다.
열심히 본 책은 그냥 표시 색깔만 봐도 뭔지 알지만, 반대로 다 읽고 기억에서 휘발된 책도 있죠.
왼쪽 하단에 척 봐도 황금가지 밀리언셀러 클럽의 책이 좀 있는데,
예전부터 저는 밀리언셀러 클럽의 책이 좋은 작품 많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왠지 거부감이 드는 장정과 종이를 쓰고 해서 그렇게 열심히 사 읽지 않았습니다.
위에 있는 책은 권수로는 7권이지만 작품은 세 작품입니다.
스티븐 킹의 <셀> - 개인적으로 킹이 교통사고 후 많이 떨어진 증거물로 생각합니다.
좀비물에 휴대폰을 대입하고 결말에서는 재부팅하면 정상이 될 것이라고하는데, 어이가 없더군요.
가운데 세 권은 [뱀파이어 헌터 애니타 블레이크] 이고, 그 옆에는 PKD상을 받은 <얼티드 카본>입니다.
사이버펑크물 <얼티드 카본>은 기억을 저장소에 담아서 육체를 막 옮겨 다니는 게 신선한 충격이었죠.
그 옆에 제목이 작은 글씨여서 잘 안보이는 누런 표지의 책은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입니다.
- 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가 크게 성공한 덕분에 분위기가 비슷해서 번역된게 아닌가 하고 있죠.
그 위에 쌓아 둔 것이 이타카(D&C미디어)에서 나온 <록 라모라> 시리즈 1편 2편입니다.
이타카는 <은하영웅전설> 신판을 다시 낸 곳인데, 왕년에 저기서 SF 출간을 검토할 때 좀 참여했었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몇몇 괜찮은 SF 원서를 제공받아 읽고 출간에 대한 의견을 주는 것이었는데,
<가니메데>는 괜찮았고, 영 이상하다 싶은 책도 있어서 읽다 읽다 중간에 퍼져버리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 출판사에서 머리 좀 식히면서 지내라고 빌려 준 책이 <록 라모라> 원서 1권이었습니다.
미천한 영어 실력에 조금씩 야금야금 읽고 있었는데, 동생이 뺏어가서 읽더니 열광해 버리더군요.
마법이 횡횡하는 가상의 무대를 배경으로 해적+사기꾼 일당의 리더가 벌이는 모험 팬터지물이죠.
옆에 있는 책 중에는 괴물 좋아하는 작가 차이나 미에빌의 <언런던>은 괴물들이 날뛰는 팬터지물이고,
그 옆의 <6월 26일 하멜른>은 "하멜의 피리부는 사나이" 전설을 진지한 소설로 확장한 꽤 좋은 작품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저로 쓴 작품인데, 유명 작가의 책이 아니어서 묻힌 느낌이지만... 상당히 잘 쓴 책이죠.
요시카와 에이지의 대표작이자 무사시 소설 중 가장 유명한 <미야모토 무사시>는 원판 6권만 사서 봤습니다.
(후속 4권은 다른 작가가 억지로 쓴 속편이라 가치가 적죠 - 원작은 무사시가 코지로를 이기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위에 놓인 빨간 책은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 6권 <또 다른 바람>입니다(단편집 빼면 장편으로는 5권째죠)
그 위의 와타리 무츠코의 <되살아난 마법>은 개인적으로 르 귄의 <어스시>보다 더 윗길로 생각하는 책인데,
[하나하나와 민미 이야기] 3부작의 완결편으로 소인족 팬터지로 시작해서 강렬한 반전 메세지를 담아낸 걸작입니다.
좌측 상단에는 그냥 오다가다 읽은 책들을 넣어 놓아서 좀 두서가 없습니다.
<종말 문학 걸작선>은 여기 클럽에서도 몇 번 이야기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앤솔러지이고,
그 옆의 팀 파워즈의 <디클레어>는 냉전 시대를 무대로 정령을 소환하여 싸우는 스파이들의 팬터지+첩보 소설입니다.
하여간 쓰는 작품마다 정령을 등장시키는 파워즈가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듬뿜 담아서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옆의 <기병총 요정>은 다니엘 페낙의 말로센 시리즈입니다 - 프랑스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면 재미가 반감되죠.
같은 프랑스 작가이지만 훨씬 더 예술적으로 글을 잘 쓰면서도 유머 감각 역시 발군인 선배 작가가 마르셀 에메인데,
<파리의 포도주>가 바로 마르셀 에메의 단편집입니다. 재미있기는 한데, 작가의 진정한 대표작은 별로 없죠.
마르셀 에메는 주요 단편이 싸그리 다시 묶여서 제대로 큰 책으로 출간될 필요가 있는 작가입니다.
물론 장편 <초록 망아지>도 좋았고, <파리의 포도주>도 좋고, <나무 위로 올라간 고양이> 동물 팬터지 시리즈도 좋지만,
작가의 진정한 대표 단편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 <사빈느>, <집달리>, <하늘을 나는 장화>, <시간 배급 카드> 등은
개별 단편작품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유명한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하나의 책으로 번역된 적이 사실상 없거든요.
오래전 '백상'에서 나온 단편집을 시골 본가에 두고 있기는 한데, 대표작 중 하나인 <집달리>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성귀수 번역으로 나온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는 왠일인지 유명작 <사빈느>가 빠져있고...
그 옆의 책들은 작가 레벨이나 뭐 그런 것에 비해 실제로 읽은 소감이 별로였습니다.
<검은 예언>은 러디야드 키플링의 호러 단편집인데, 이 작가는 그냥 동물소설이나 구도 소설 쓰는 게 낫습니다.
왕년에 <킴>을 읽으며 받았던 충격에 비하면... 호러 단편집의 작품들은 꽤 약하더군요.
키플링 단편집을 펴내면서 <왕이 되려 한 사나이>같은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또 빠져 있고...
그 옆에 옆에 <목요일의 남자>는 체스터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철학+추리+인문 소설입니다.
또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 중 <석유 시장 쟁탈기>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그랜드 펜윅 시리즈는 분명히 다 봤는데,
석유 시장 쟁탈기는 처음에 볼 때 빌려 본 게 이상하게 기억에 입력되는 바람에
기왕 구입한 그랜드 팬윅 시리즈의 짝을 맞춘다고 석유 시장 쟁탈기만 세 번 샀습니다.
한 권은 지방에 가 있고, 또 한 권이 저기 있죠. 그리고 또 한 권은 어디 쳐 박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세 번 모두 제 값 다 주고 구입한 적은 없고, 헌책방에 흘러 나온 새책같은 책을 샀으므로 큰 부담이나 억울함은 없지만서도...
그 위에 <텔레마코스의 모험>은 오디세이아의 속편됩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직접적인 속편은 카잔차키스의 서사시가 있지만,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은 카잔차키스보다 200 년 이상 빨리 쓰여진 작품이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찾아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타카'섬을 떠나 돌아다니는 모험담입니다.
루이 14세의 손주를 위해 써서 왕에게 바친 책인데, 책 서문에서부터 왕에게 '덕치'를 펼치라고 훈계하는 게 너무 강해서...
결국 이 책 내용은 태양왕의 노여움을 사서 페늘롱은 직위해제되고 월급도 빼앗긴 채 탈탈 털려 맨 몸으로 쫓겨납니다.
루이 14세의 손주가 대혁명으로 목이 짤린 루이 16세였던 것을 생각하면, 페늘롱 말을 경청하지 않은 대가는 너무 컸죠.
그 위에 붉은 책이 마이클 무어콕의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20 대의 청년 SF 작가이자 편집자였던 무어콕에게 네뷸러상을 안겨 준 초기 대표작이죠.
예수님을 만나 힐링하려고 시간여행을 한 현대 영국 청년이, 결국 예수 역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는 종교 SF입니다.
그 위의 <우즈 vs. 알렉스 우즈>는 커트 보네거트 토론회를 결성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득달같이 사 본 책이죠.
전반적인 줄거리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와 비슷해서 책 좋아하는 노인과 우정을 맺은 청소년 이야기입니다.
그 위로 두 칸 올라가면 <화성 아이, 지구 입양기>의 경우 SF 소설가와 스스로를 화성인으로 여기는 꼬마 이야기죠.
존 쿠삭 주연의 영화 <지구 아빠 화성 아이>의 원작이고, 역자도 <어둠의 속도>를 옮긴 SF 전문 번역가 정소연씨입니다.
책장과 우산이라, 안 어울리는 조합이긴 하군요. 물과 상극인 책들 옆에 우산이 버젓이 있다니….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전자책이 빨리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드는데, 언제나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데, 여러 사람 손에서 찢어지고 더러워지는 걸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도대체 책에다 왜 그리 오물을 많이 묻히는 건지, 원.
저는 <언런던>은 살짝 실망했습니다. 아무래도 성인풍 소설을 기대한 게 잘못이죠. 애초에 청소년용으로 쓴 거니까요. 차이나 미에빌이 청소년 소설도 쓸 줄 몰랐습니다. <6월 29일 하멜른>을 보니, <쥐의 왕>도 생각나네요. 미에빌도 '피리 부른 사나이'를 가지고 현대적으로 비틀었죠. 권력자들이 피지배계층을 어떻게 다루는지, 도시란 게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러운지, 어둠 속의 종족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묘사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미에빌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현대 음악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좀 이해도 안 갔지만요.
르 귄 소설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나오는 편이니…. <세상을…숲>은 의외로 두께도 얇고, 다른 헤인 시리즈보다 인지도도 떨어지는 듯합니다만. 책에 담긴 주제나 철학은 꽤나 심금을 울리더군요. 솔직히 그 전까지 르 귄 여사가 왜 그리 대단한지 실감이 잘 안 났는데, 이 책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어떻게든 조화를 이루려는 해법이 보였다고 할까요. 오히려 <어둠의 왼손>이나 <빼앗긴 자들> 같은 책들보다 훨씬 기억에 남았네요.
잘 하셨습니다.
흑화하면 자기만 망가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