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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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소설과 영화, 게임 등을 하나의 대중문화로 분류합니다. 특히, 장르 쪽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한데, 똑같은 작품이 소설, 영화, 게임 등이 각 매체를 오가며 멀티 유즈로 쓰이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나죠. 그런데 이 중에서 특징이 유난히 두드러진 하나가 바로 게임일 겁니다. 소설과 영화는 작가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형식이지만, 게임은 유저가 직접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이야기를 따라가는 소설, 영화와 달리 게임은 유저가 이야기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죠. 물론 게임 역시 외길 진행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설보다는 자유의 폭이 큰 편이고, 아예 이걸 모토로 하는 게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잘 만든 게임일수록 ‘자유도’의 비중이 늘어난다고 하죠. 특히, 시뮬레이션이나 롤플레잉 등을 만드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이게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흔히 ‘자유도’라고는 하지만, 이를 가리키는 용어도 여러 가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샌드 박스, 오픈 월드 그리고 멀티 엔딩이 그것입니다. 이 단어들의 정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것들과 달리 게임은 학문으로서 연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외국에서는 아마 게임학개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고, 국내에서도 그런 학문을 연구하려고 시도 중인 것으로 압니다. 우리 클럽의 표도기님께서도 게임 교과서를 집필 중이라 고민이 많다는 말씀을 몇 번 하셨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게임학개론은 경제학개론 같은 책처럼 쉽게 찾아보거나 표준화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샌드 박스 등이 가리키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저는 저만의 경험을 살려 이 단어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직접 공룡을 키우고 공원을 꾸미는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
우선 샌드 박스라는 건 간단히 말해 빈 터에 집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건축/경영 시뮬레이션이 주를 이루죠. 게임을 시작하면 일정한 자원이 주어지고, 각종 건축 도구가 생깁니다. 그러면 자원을 이용해 기초적인 건물을 짓고, 그 건물을 활용해 다른 자원을 얻고, 그 자원으로 더 큰 건물을 짓고… 등의 행위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유저는 자신만의 공간을 창조하는 거죠. 그 규모는 다양해서 <마인크래프트>처럼 그저 집 하나만 만들 수도 있고, <블랙 & 화이트>처럼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건축만 하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생물을 채워서 생태계를 꾸미기도 하고, 아예 지형을 갈아엎어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게임이 아니라 일종의 모드로 지원되기도 하는데, 밸브의 게리 모드나 크라이텍의 샌드 박스 등도 있죠. 공통점은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것. 그 때문에 딱히 정해진 방법이 없고 유저의 취향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샌드 박스라는 용어는 윌 라이트가 <심시티>를 만들면서 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도시만 짓는 게 아니라 뭐든 가상 공간에서 창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편이네요. 오히려 실제 도시보다는 판타지 왕국이나 우주 세계의 행성을 경영하는 편이 변수가 많아 선호되는 편입니다. 현대식 대도시를 지어 운영하는 것과 용과 악마를 막아내는 강력한 성벽 도시를 세우는 것 중 뭐가 더 매력적일까요. 여하튼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이지만, 사람의 손길을 타면 여러 모래성이 나오듯이 샌드 박스 게임에서는 유저의 손길에 따라 다양한 세계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누가 뭘 만들었든 정답은 없습니다. 공략이란 게 있긴 하지만, 목표가 상당히 느슨하기 때문에 정석이 없죠.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하느라 자유도는 오픈 월드와 멀티 엔딩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도는 웹 게임의 인생 막장으로 이어지기도…)
[넓은, 더 넓은 우주로 끝없이 향하는 <이브 온라인>. 저 우주 어딘가엔 모노리스도 있다고….]
오픈 월드는 무한히 확장된 세계를 말합니다. 대개 판타지 롤플레잉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데, <울티마>, <모로윈드>, <페이블>, <투 월드> 등이 이걸로 유명하고, SF에서는 현재 <이브 온라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죠. 무에서 유를 만드는 샌드 박스와 달리 오픈 월드는 이미 제작자가 모든 걸 만들어놨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으며, 돌아다닐 수 있는 맵도 방대합니다. 즉, 주어진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지만, 상당히 다양하니까 여러 갈래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주로 퀘스트를 해결하는 식으로 게임을 진행하는데, 퀘스트의 해결 방법도 천차만별이고, 그 중에 하고 싶은 것만 고를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 역시 플레이어의 마음이고, 어느 지역을 탐험할 것인가도 선택 사항이죠. 다만, 선택권의 제한이 있기는 있는지라 완벽한 자유라고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다른 게임에 비한다면야 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지만.
오픈 월드는 말 그대로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에서 진가가 드러납니다. 제작진이 맵을 무지막지하게 크게 만들어서 여행하다가 지칠 정도. 화면에 표현하는 컨텐츠가 적거나 표현이 간단할 경우 맵이 지구 넓이를 넘어가는 수도 있습니다. 2000년대 후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하도 인기를 끌어서 이 정도의 스케일이 꽤 큰 것으로 아는 유저도 많은데, 소위 오픈 월드 게임은 이것보다 더 방대하죠. 거기다 <이브 온라인> 같은 SF물은 실제 지도에 상관없이 체감상 느끼는 맵도 엄청나게 넓으니까요. 차세대 게임 중에는 말 그대로 별의별 쓸데없는 구석까지 다 구현해서 맵을 다 여행하려면 환장할 정도라고도 합니다. 다만, 맵을 크게 만드는 건 좋은데, 그 맵에 무얼 채울까 하는 점이 문제. 자칫 잘못하면 땅덩어리만 크고 할 일이 없는 휑뎅그렁한 풍경이 보이기 십상입니다.
오픈 월드를 표방하는 게임 중 가장 흥행한 최근작은 <폴아웃 3>일 듯합니다. <엘더스크롤>을 만든 베데스다의 그 솜씨가 어디 안 가는지라 <폴아웃 3>도 탐험하는 재미가 상당하죠. 아니, 사실 서브 퀘스트를 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전부일지도. 그리고 일본 게임은 서구 게임보다 획일화된 진행이라고 하지만, 오픈 월드를 표방하는 대작도 가끔 나옵니다. 하지만 서구권의 오픈 월드만큼 장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흥행에 실패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일본 유저들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것인지.
[넓은 맵을 탐험하고, 엔딩도 다양한 분기가 있던 <폴아웃 3>. 그런데 어째 엔딩이 다 비슷한 느낌도….]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자유도’란 말을 쓰지만, 정작 자유도를 중시하기로 소문난 서구권에서는 이런 말은 안 쓰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들은 멀티 엔딩이란 말을 자주 하더군요. 우리한테 가장 친숙한 예로는 <발더스 게이트>, <구공화국의 기사들>, <드래곤 에이지> 같은 바이오웨어 작품이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며, 맵이 그렇게까지 넓은 것도 아닙니다. 갈 수 있는 지역이 많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행’에 가깝지 ‘탐험’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부족하죠. 대신 퀘스트 수행에 따라 결과가 여러 차례 달라지고,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이 변하며, 그 결과가 쌓이고 쌓여 엔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오픈 월드 게임 중에서 맵이 상대적으로 작은 게임들이 이러한 멀티 엔딩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멀티 엔딩은 오픈 월드의 울타리 안에 있는 셈이죠.
그나마 멀티 엔딩은 샌드 박스나 오픈 월드보다는 만들기가 쉽지 않나 추측합니다. 저야 업계 관계자가 아니니까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겉으로만 살펴보면 가상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는 샌드 박스, 오픈 월드와 달리 멀티 엔딩은 시나리오로 승부하니까요. 멀티 엔딩은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세계 그 자체가 흥하거나 망하기도 하지만, 결론을 정해놓고 주변 상황을 조금씩 바꾸기도 합니다. 가령, <폴아웃 3>은 결국 식수난을 해결하는 것으로 엔딩이 나옵니다. 주인공의 카르마가 선하든 악하든 마침내 식수난을 해결해 볼트 주민을 구한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아요. 대신 동료나 NPC 행동이 바뀔 뿐이죠. 그래서 메인 줄거리는 정해졌고, 서브 퀘스트에만 자유도를 부과했다고 욕도 좀 먹었습니다.
이 게시물에서는 샌드 박스, 오픈 월드, 멀티 엔딩을 각각 따로 설명했지만, 이 세 가지가 모든 게임에서 명확히 구분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는 건축을 한다는 점과 맵이 무진장 방대하다는 점 때문에 샌드 박스와 오픈 월드의 조건을 동시에 갖추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맵이 크니까 멀티 엔딩도 있을 것 같지만, 유저가 뭘 하든 결과적으로 시나리오는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MMORPG의 한계이기도 하죠. 반면, 그런 한계를 깬 <이브 온라인>도 있는데, 컨텐츠 자체를 유저가 만들어간다는 점에 있어서 멀티 엔딩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자유도를 조합했다고 하겠습니다. 한편으로 <크라이시스>처럼 분명히 맵도 좀 넓고 미션 해결 방식도 다양한데, 샌드 박스나 오픈 월드로 보기엔 애매한 것도 있고요. <대항해시대>처럼 시리즈에 따라 평범한 롤플레잉을 추구하거나 오픈 월드를 지향하는 등 성격이 바뀌는 게임도 있습니다.
[FPS 게임치고는 큰 맵과 자유도가 인상적이었던 <크라이시스>. 하지만 오픈 월드라고 하기엔 좀….]
개인적으로는 저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오픈 월드에 가장 끌리는 편입니다. 낯선 세계를 탐험한다는 게 꽤 매력적이라서요. 저는 주로 상상 속의 동물이나 괴물이 나오는 SF/판타지를 즐겨 봅니다. 그런데 이런 SF/판타지의 대개 줄거리는 주인공이 먼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와중에 새로운 환경과 동물을 마주치는 거죠. 비경탐험물인 셈입니다. 그래서 게임에서도 뜻밖의 지역을 여행하고, 거기에 사는 동물 등을 탐색하는 게 좋습니다.
결국 이 모든 요소들은 유저에게 체험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일 겁니다. 게임은 유저가 직접 결정을 내리는 식으로 진행이 되고, 그러므로 결정할 수 있는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더 많은 재미를 느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만들기는 더 어려우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참, 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흔히 특급 개발자라고 하는 시드 마이어, 윌 라이트, 피터 몰리뉴, 리처드 개리엇 등이 저런 요소를 잘 다룹니다. 거대한 맵과 정해지지 않은 시나리오, 명확하지 않은 목표 등이 서로 닮았어요. 아마 이들이 특급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이처럼 너무나 거대해서 손대기조차 쉽지 않은 개념을 게임으로 구현하고 정립했기 때문일 겁니다. 단순한 창작가를 넘어 창조자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아깝지가 않을 테죠.
더불어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세계관을 만들었을 때 그걸 (독자든 관객이든 유저든) 제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자유도 높은 게임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세계관 체험의 극을 달린다고 봐요. 가끔 설정놀이를 하다 보면 오픈 월드 게임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요즘 고사양의 고만고만한 게임에 질려서, 검색하다 물건하나 발견했는데, 아마 이 카페 회원분들이 잘 알고 계실 '어떤 게임'의 온라인 모드입니다.
http://cafe.daum.net/Europa/H2b/24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