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년 전에 <여제>라는 만화를 꽤 관심을 갖고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TV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지만, 본질은 적당히 진지한 성인만화죠.

그 만화에서는 주요인물 하나가 유명 소설가인데, 그 사람이 만화의 여주인공을 모델로 소설을 씁니다.

소설이 발매된 후 "이츠키 선생의 <청춘의 운>의 여성판에 비견된다며 호평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오죠.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고, 그냥 지나가도 무방한 대사 한 토막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대사를 읽으며 <청춘의 문(門)>의 오타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았습니다.

한국에는 <불꿈>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이츠키 히로유키의 <청춘의 문>을 과거에 이미 읽었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번역하는 사람은 일본어 원판에는 한문으로 쓰여 있었을 테니'청춘의 문'으로 제대로 번역했을 것이고,

글씨를 식자하여 만화번역본에 붙이는 사람이 '문'을 '운'으로 혼동하여 '청춘의 운'으로 잘못 타이핑한 것이겠죠.

   

평생 제가 관심있는 분야가 문학이었기 때문에,
과거 열심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오타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겠지만 제게는 자꾸 그 대목이 눈에 밟인 것이겠죠.

   

 2.

물류와 유통은 제 주전공 분야 중 하나입니다.

석사 박사를 모두 물류 시스템과 유통 관계를 수리적으로 풀어서 전개하고,

그것을 최적화하는 알고리듬을 설계해서 프로그래밍으로 짜서 증명하는 논문을 썼으니까요.

학교에서 강의도, 이후 논문 게재도, 또 IT 컨설팅과 시스템 구축도 거의 대부분 물류 쪽으로 많이 했습니다.

     

한겨례 신문과 조선일보라는 한국의 양극단을 대표하는 신문을 놓고 볼 때,

논조가 어떻고 스탠스가 어떻고 다 관두고 저는 "물류 유통"의 관점에서 자꾸 비교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조선일보는 물류와 유통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열심히 투자하는 기업이고,

한겨례는 경영진이 물류와 유통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일말의 관심도 없이 아예 방치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제 아버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본래 청년시절까지 시골에서 농사 짓다가 서울로 상경해 평생을 보내셨지만, 정년 퇴임후 귀농하셨죠.

그리고 시골에서 계속 여러 신문을 바꾸어 보십니다. 주기적으로 이런 저런 신문을 바꾸어 구독하시죠.  

조선도 보시고, 동아도 보시고, 중앙도 보시고, 경향도 보시고, 한겨례도 보시고, 한국일보도 보십니다.

별다른 편견 자체가 없기 때문에, 여러 매체를 돌아가면서 구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시골 가셔서 놀라워하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신문을 구독하던, 거의 대부분 배달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조선일보 지국에서 배달을 한다는 것이죠. 그 매체가 한겨례라고 해도 조선일보 지국이 배달합니다.

시골 동네에 조선일보 외에 독립된 지국에서 직접 배달을 해 온 곳은 오직 중앙 밖에 없었고,

일부 신문은 신문사에서 배달하기보다 우체국 집배원이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지국이 한겨례를 배달하다보니...

한겨례는 배달이 늦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게 아버지 말씀이셨습니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이틀 늦게 배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조간이 밤에 배달되는 것은 별로 늦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애교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은 늦는 법이 없습니다 - 칼 같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배달되어 있다는 것이죠. 

        

물류와 유통은 기업이 만든 상품이 시장에 잘 흐르게 만드는 혈관과 같은 것입니다.

상품의 퀄리티가 아무리 높아도, 혈관이 막혀 있으면 제대로 흘러다닐 수 없습니다.

물류와 유통망 정비와 투자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인데,

한겨례는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개선되지 않습니다.

서울이나 경기권의 대도시가 아니면 배달 자체를 직접 하지도 않고 있고,

심지어 불구대천지 원수처럼 싸우는 조선에게 대신 하도록 맡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달이 늦어져서 뭐라고 해도 개선하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 형편입니다.

   

"물류 쟁이"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핵심 역량 중 하나를 완전히 손 놓고 있는 기업은,

향후에도 경쟁력을 갖기 쉽지 않다고 진단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업이 물류와 유통에 손 놓고 있으면 영업이 잘 돌아갈 턱이 없습니다.

신문의 논조나 기사와 칼럼의 퀄리티가 제 아무리 높고 훌륭할 지라도,

물류와 유통에 손 놓고 있는 경영진의 모습은 매우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소설 원작도 히트했고, 일본에서 TV 드라마와 영화로 나왔고, 한국에서도 영화화되었죠.

여자친구의 출세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고 음지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또한 도입부의 수수께끼 사건이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결말부에 가서 진상이 밝혀지는 추리물이기도 하지요.

   

저는 <백야행>을 읽으면서 작가가 IT 전문가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백야행>은 컴퓨터 발전의 역사, IT 시스템의 발전의 역사가 이면에 흐르고 있고,

상당히 디테일하게 IT 시스템이 어떤 절차를 거쳐 발전해 왔는가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알고보니 히가시노 게이고는 본래 전기 기술자로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이자 전직 IT 쟁이였습니다.


제가 줄거리나 주제보다 오히려 소설의 뒷배경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유는,

왕년에 코볼 프로그래머로 IBM에서 근무하셨던 제 어머니의 영향이기도 하고,

또 저 역시 사회생활을 프로그래머로 시작하였고 이후 학위 따고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항상 IT 시스템 구축에 관련된 일을 놓지 않고 계속 해 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와 같이 IT 시스템 구축을 해 왔고 IT에 관심있는 사람 사람,

게임의 발전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백야행>은 남다르게 읽힐 겁니다. 

그런 내용이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기술된 재미있는 소설 자체가 세상에 무척 드물 테니까요.

IT 전문가가 제대로 된 프로 소설가로 전직하여 글을 쓰게 된 사례가 달리 또 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4.

저의 가장 주된 관심분야는 문학, IT, 물류 세 가지로 압축될 것입니다.

아마도 최고 전문가까지는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수 십 년 동안 집중적으로 들이 팠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해 오면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왔다고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해당 분야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갈 때, 오류나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바로 캐치되는 편입니다.

   

이건 저만 그런게 아닐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다 마찬가지겠죠.

자신이 관심을 가져 왔고 비교적 잘 아는 분야는... 누구든 잘 보입니다.

다만 사람들마다 평생 관심 가지고 꾸준히 들이 판 분야가 서로 다를 뿐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