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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금 나침반>은 비행선과 마녀가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스팀펑크는 곧잘 판타지와 어울리는 장르입니다. 산업혁명 시대에 마법이 등장하거나, 마법사가 기계 공학과 동력 마법으로 태엽 로봇을 조종하는 식이죠.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19세기 유럽이 그만큼 과도기였기 때문일 겁니다.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고, 기술과 기계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완전히 자리잡았다고 하기에 아직 부족했죠. 이 시기에도 요정이니, 마녀니 하는 것들을 믿었으니까요. 게다가 유럽은 해외로 발 뻗기 시작하면서 외국 풍습이 오컬트를 조성했습니다. 특히 제국화에 앞장선 영국은 이게 심했죠. 머나먼 동방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요. 현실 자체가 과학과 마법이 뒤섞인 시기였습니다. 허나 스팀펑크와 판타지 조합이 온건히 19세기 차지인 건 아닙니다. 종종 중세 유럽이 무대인 검마 판타지에 증기기관을 집어넣기도 합니다. 중세 배경에 자동인형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이런 설정도 드물지 않은 편입니다.



판타지에 스팀펑크를 첨가하는 이유는 설정이 다채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무대는 중세인데, 현대적인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죠. 가령, 교통수단이 그렇습니다. 평범한 검마 판타지에서 하늘을 날거나, 해저를 여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비행이나 수중호흡 주문이 있겠지만, 이것만으로 장거리 여행하기는 불편하겠죠. 이럴 때 스팀펑크 요소를 슬쩍 섞어주는 게 해결책입니다. 비행선이 있다면, 마법을 모르는 전사도 얼마든지 하늘을 날아갈 수 있습니다. 잠수함을 만들면, 모험가 일행이 심해 괴물을 처치하러 내려갈 수 있겠죠. 반대로 스팀펑크에 판타지를 접목하면, 미약한 과학과 마법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죠. 스팀펑크의 과학 기술은 현대와 달리 이제 막 발돋움했습니다.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테고, 그걸 마법으로 때우죠. 샐러맨더가 석탄을 팍팍 태운다든지, 번개 마법으로 부족한 전기를 보충한다든지 등등. 기술자가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할까요. 다만, 시대 배경에 따라 과학과 마법의 비중은 크게 달라집니다. 근대에 가까울수록 보다 ‘과학적인 묘사’를 시도합니다. 중세 배경은 마법 위주에 과학을 은근슬쩍 끼워 넣고요.



겉으로 보기에 판타지인데, 알맹이는 과학적일 수 있습니다. <황금 나침반>이 그런 사례죠. 마녀가 있고, 평행세계가 존재하고, 말하는 곰에다가 악마도 나옵니다. 진실을 가려내는 마법까지 등장하죠. 하지만 곳곳에 근대 기술다운 소품이 등장하고, 우아하면서도 복잡한 디자인을 자랑합니다. 길거리를 희한하게 굴러가는 자동차와 초원 위를 가로지르는 비행선, 렌즈를 고풍스럽게 감싼 영사기 등이 그렇습니다. 소설에서도 이런 걸 언급하지만, 영화판은 한층 신경 쓴 모습입니다. 제목이자 중요 소품인 황금 나침반부터 그렇습니다. 복잡한 톱니바퀴가 기계적으로 얽힌 모습이죠. 마법보다 고전적인 과학 기술이 떠오르는 생김새입니다. 어쩌면 말하는 곰이나 기이한 마법보다 자동차나 비행선에 눈길을 뺏긴 관객이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작가가 처음부터 배경을 근대로 잡았으니, 판타지보다 스팀펑크를 강조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죠. 마법적인 설정을 논리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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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철도, 비행선, 로봇, 마술사가 뒤섞인 <퍼디도 정거장>]



스팀펑크+판타지 수작으로 자주 꼽는 소설이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입니다. 굳이 비중을 따지면, 스팀펑크가 우세합니다. 지저분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각종 인종이 도시로 몰리고, 노동자들 등골이 휘고, 열차와 비행선이 다니고, 군인들이 화승총으로 무장했죠. 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수준도 놀랍습니다. 로봇 청소기가 알아서 먼지를 치우고, 사람만큼 사고하는 인공지능까지 나타납니다. 인공지능을 작중 중요한 해결책으로 써먹죠. 끔찍한 인체 개조는 덤입니다. 주인공부터가 로봇도 다루고 공학에 능한 과학자에요. (의도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름이 아이작입니다. 흐음.) 여기까지 보면, 전형적인 스팀펑크 같습니다만. 이 세계의 한쪽에는 엄연히 마법이 숨쉽니다. 물의 정령을 조종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투명 마법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죠. 꿈은 그저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고, 다른 차원으로 넘나들 수 있습니다. 악마니 화신이니 하는 것들도 실재하고요.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상당히 독특한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줄거리보다 설정과 묘사가 끌렸던 책이네요.



<귀족탐정 다아시 경> 같은 소설도 스팀펑크와 판타지 조합인데…. 배경은 1966년이니까 사실상 현대죠. 차라리 어반 판타지에 속할 것 같지만, 의외로 기술 수준은 근대에 머뭅니다. 영국이 배경답게 증기기관차나 가스 가로등이 나오지만, 제목처럼 부족한 기술을 마술로 보완합니다. 대체역사에다가 스팀펑크를 접목하고, 마법으로 풀어간다고 하겠습니다. 작가가 현대물을 의도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 작품의 마술이란 게 꽤 골 때리는데, 간단히 말해서 과학적인 능력입니다. 검마 판타지의 마법사가 마나 능력이 있어서 수련해야 주문을 부리는 것과 비슷해요. 덕분에 재능이 없으면 마술을 부리기 어렵죠. 허나 그 원리는 과학과 유사하고, 그래서 스팀펑크 버전 법의학을 보는 듯합니다. 주인공 다아시가 마술사를 고용해 조사하고, 과학 마술적 증거와 뛰어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에요. 과학의 대체재로 마법을 부각하는 설정의 원조라고 할까요.



위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시대가 근대와 비슷합니다. 이와 달리 중세 유럽과 닮은 판타지에도 얼마든지 과학 기술이 나오죠. <워해머 판타지>는 언뜻 보면, 전형적인 검과 마법 서사시입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악마, 수인 등이 나와서 죽어라 싸워요. 당연히 기사, 검사, 궁사, 마법사 등이 우르르 출현합니다만.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지상에서 전차를 굴리거나, 중화기를 펑펑 쏴대는 모습 또한 보입니다. 이런 기술이 발달한 게 드워프와 스케이븐(쥐인간) 진영입니다. 드워프는 긍정적인 쪽으로, 스케이븐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묘사하죠. 드워프는 자이로콥터가 있기 때문에 험한 산맥을 넘어 보급품을 전달하고, 증기기관을 이용한 포를 쏘거나 폭탄을 투하합니다. 스케이븐은 마법 동력원인 워프스톤을 이용하기 때문에 별별 괴상한 걸 만들어요. 드워프처럼 각종 화기나 엔진은 물론이고, 약물 남용에다 돌연변이 괴물까지 실험하는 미치광이들입니다. 허나 이들 종족을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스팀펑크 분위기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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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드워프가 건조한 잠수함(!) 블랙 크라켄.]



<워크래프트 2>도 <워해머>의 영향을 받았는지 묘사나 설정이 비슷합니다. 어디로 보나 뻔하디 뻔한 검마 판타지인데, 해군에 잠수함이 있습니다. 노움이 만든 발명품으로 이름답게 바다 밑을 잠수합니다. 이물에 커다란 창문이 붙었으며, 잠수함이니까 잠망경이나 스크루도 붙어있어요. 평소에는 물속에 잠겼다가 적 전함이나 해안 건물에 어뢰까지 쏩니다. 이렇게 말하면 현대적 잠수함 같지만, 디자인은 스팀펑크다운 기색을 팍팍 풍깁니다. 지나치게 커다란 창문이나 사방에 때려 박은 대못 자국, 수중 저항력이랑 별 상관없는 모습까지…. 다만, 노움 잠수함은 어디까지나 해군 특수 유닛에 불과합니다. 인간 보병과 트롤 창병, 성기사나 오우거, 마법사 등의 위상이 훨씬 크죠. 해군 내에서 따져도 엘프 구축함이나 오우거 전함 등이 보편적이고요. 이는 <워크래프트 3>를 거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형적인 판타지 요소에게 밀리는 경향이 있어요.



<엘더 스크롤> 시리즈에도 드워프가 스팀펑크 종족으로 나옵니다. 여기 설정의 드워프는 사실 지하 엘프입니다. 남들은 마법을 부릴 때, 로봇을 만들고, 천체를 관측하고, 사이보그까지 만듭니다. 이 정도 기술력이면, 헬리콥터를 띄우거나, 굴착기를 만들거나,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도 가능할 듯합니다. 그렇다고 시로딜 전체에 스팀펑크 문화가 남은 건 아니에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종족이고, 유물만 겨우 남은 수준이거든요. 그것도 드워프 아니랄까 봐 죄다 지하에 남아서 지상은 그냥 평범한 검마 판타지 세상입니다. 드워프를 골라서 화승총을 쏘고, 로봇을 타고 다니고,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식의 플레이는 불가능합니다. 남은 이들은 인간이나 엘프, 수인 등입니다. 그러니 과학 기술을 남용하는 대신 검을 휘두르고 주문을 외우는 수밖에요. 그나마 스카이림 지방에 남은 유적을 발굴하면서 드워프 로봇이나 건축물이 나오지만,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스팀펑크와 판타지 조합에는 이처럼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 근대가 배경인 스팀펑크에 판타지를 집어넣는 겁니다.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하고, 다양한 종족을 선보이며, 낭만적이거나 기괴한 감성을 한층 부각할 수 있죠. 둘째는 중세 판타지에 기계장치를 덧대는 겁니다. 마법으로 한계가 있는 문제점을 근대 기술로 돌파할 수 있어요. 한정된 공간을 넓혀서 모험가 일행이 하늘이나 심해로 이동하게 해주고요. 과학 기술은 보조용이라 여전히 검과 마법이 우세하지만요. 과학과 마법이 서로를 보충하는 건 비슷하지만, 비중은 전혀 다릅니다. 첫째 방법은 아무래도 근대니까 마법보다 과학을, 최소한 과학적인 논리라도 앞세우려고 합니다. 둘째 방법은 검마 판타지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과학 기술을 사용하죠. 아무리 헬리콥터나 잠수함이 등장해도 결국 검과 마법이 우선입니다. 이거 말고도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이 두 가지가 가장 대세인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스팀펑크 자체보다 이렇게 판타지와 조합하는 것이 재미있더군요. 검마 판타지에서 잠수함을 타고 바다괴물과 대결하는 것처럼 상당히 독특한 이야기를 짤 수 있으니까요. 스팀펑크 수중전 같은 것도 만들어보면, 그럴 듯할 것 같습니다. 고전적 발전기로 항해하고, 아르누보 장식과 톱비바퀴가 돌아가는 잠수함도 로망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