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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슈트의 등짝으로 말하는 그 남자]

얼마 전에 E3에서 공개했다던 <크라이시스 2> 플레이 영상을 봤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이거 1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데모가 있더군요. 시험 삼아 한 번 내려 받았습니다. 아마 이 게임을 해본 유저는 별로 없어도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겁니다. 1편을 공개할 당시만 해도 실사에 가까운 그래픽을 보여주며 크라이실사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죠. 오죽하면 진짜 사진과 합성해도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챌 정도. 이 게임을 돌릴 수 있는지가 컴퓨터 사양의 최대 관건이기도 했으며, 게임을 사놓기만 하고 손가락만 빨던 이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시에 쓸데없이 사양만 높다, 이만하면 그래픽 카드를 최대한 활용한 최적화다 등으로 말도 많았습니다.

 

컴퓨터 환경이 급변하는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옛날 게임이긴 합니다. 지포스 8400gs로 돌려봤는데, 이것도 좀 세월이 지난 그래픽 카드라 그런지 원활히 돌리긴 무리네요. 사양을 모두 낮음으로 해놓고, 안티 얼라이언싱 조금 먹여주면 볼만한 그래픽이 나오긴 합니다. 워낙 바탕이 좋으니까 최저 옵션으로 봐도 괜찮긴 해요. 하지만 중간 옵션으로 돌리면 슬슬 끊기는 게 영 불안합니다. 이걸 YouTube 등에서 최고 옵션으로 돌린 공략 동영상 등과 비교하면 한숨만 나오고요. 새로 나올 게임들을 소화하려면 컴퓨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드는군요. 사양 같은 건 자세히 모르고, 월등한 그래픽에도 별 관심이 없는 고로 별로 할 말이 없긴 합니다만. 이 게임의 그래픽은 어느 정도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야외, 특히 풀과 나무가 많은 정글에서는 무한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실제 밀림을 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니까요. 무성한 풀들과 나무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광경, 그 각각의 풀이 드리운 그림자과 햇살 등 보기만 해도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밀림에서만 그렇다는 겁니다. 서로 상호작용할 오브젝트의 수가 일정하지 않으면 별 효과를 못 본다는 뜻입니다. 이 게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밀림에서 진행한다면 모를까, 중반부 이후에는 주로 외계인을 쫓아 다닙니다. 물론 외계인 건물에 들어가면 나름대로 놀라운 그래픽을 보여주겠지만, 나무와 풀이 서로 뒤엉켜 햇살을 투과하고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그런 효과만큼은 안 나올 것 같더군요. 아직도 많은 유저들이 <크라이시스>의 그래픽을 논할 때 밀림을 예시로 듭니다. 우주선이나 그런 건 잘 안 찍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필연적으로 밀림을 배경으로 해야 자기 색깔을 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낮은 사양으로 체험판만 돌렸으니 단편적인 의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리뷰 등을 읽고, 공략 동영상도 참고하고 했더니만 대략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사양이 높은 게임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굳이 그래픽 카드를 고생시켜가며 이 게임을 돌린 건 설정이 흥미롭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FPS 게임은 쏘고 튀는 게 중점인데, 그와 달리 이 게임은 강화복을 이용하는 게 특징이라고 들었거든요. 예고편만 봐도 특수부대원이 강화복을 할 수 있는 온갖 묘기를 펼치는 내용입니다. 특히, 그 동안 강화복을 이용해서 싸우는 주인공이 많긴 했으나 게임에 그걸 온전히 반영한 예는 드물다고 봅니다. 가장 좋은 예로 <헤일로>에 나오는 마스터 치프가 있죠. 치프는 분명히 엄청난 괴력에 달리기도 빠르고, 묠니르 갑옷으로 보통 병사는 해내지도 못할 일을 수행하는 초인입니다. 하지만 막상 게임을 해보면 마스터 치프가 설정에 걸맞게 싸우는가 좀 의문이 들죠. 주인공이라서 잘 싸우긴 하는데, 그게 굳이 강화복 때문이란 생각은……, 글쎄요.

 

<크라이시스>는 시작부터 강화복 성능을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포화 속을 뚫고 들어가고, 차량을 뒤집어 엎고, 적진으로 잽싸게 뛰어가고, 허공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나노 슈트는 크게 4가지 기능, 방어, 근력, 속도, 위장이 있습니다. 방어는 적의 공격을 막아줍니다. 근력은 힘이 강해지는데, 팔만 아니라 다리에도 적용하기 때문에 보다 높은 곳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건물 꼭대기나 절벽 위로 뛰어올라가거나 하죠. 속도는 말 그대로 빨리 달리는 거나 헤엄치는 것. 마지막으로 위장은 프레데터처럼 광학 위장을 합니다. 유저는 이 네 모드 중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즉, 위장을 하면서 근력을 강화할 수 없다는 뜻. 그리고 일정한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무한정 모드 활용은 불가능합니다. 중간에 충전 시간을 두어야 합니다.

 

눈치가 빠른 유저라면 알아차리겠지만, 가장 쓸모가 많은 건 위장 기능. 밀림에 숨어서 적 군인들을 때려잡다 보면 정말 프레데터라도 된 듯한 느낌입니다. 코 앞에 있어도 적이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잘만 활용하면 전투 없이도 미션을 끝낼 수 있습니다. 물론 선택은 유저 마음이죠. 몰래 막사에 침투해서 적군 정보만 빼올 수도 있고, 장비를 얻기 위해 적과 싸우며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진행하면 잠입 액션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언급한 것처럼 무한정 위장은 어렵고, 격한 움직임에는 에너지를 과다하게 소모합니다. 공격을 하거나 받으면 위장이 풀리니 어느 지점에서 충전을 하고, 어느 곳에서 적과 교전할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죠. 흔한 묘사와 달리 물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편합니다. 물 속에서 접근하다가 위장한 채 물 밖으로 나와 방심하는 적을 목 조르면 진짜 특수작전을 하는 듯한 기분도 나네요.

 

문제 아닌 문제라면 위장 모드가 워낙 좋기 때문에 다른 모드들이 묻힌다는 겁니다. 방어 모드는 탄막 속에서도 생존을 보장해주지만, 그렇다고 방패로 삼지는 못합니다. 기껏해야 한두 방 더 맞아주는 정도. 근력 모드는 높이 뛸 때 좋은데, 높은 곳을 선점해봤자 특별히 유리할 게 없어요. 주먹 싸움을 할 것도 아니고요. 이동 모드는 적 차량이나 보트를 쫓아갈 때 좋지만, 눈 앞으로 몰려오는 총알을 피할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고요. 즉, 유저는 위장을 주력으로 쓰고 나머지 3가지를 보조로 쓰게 됩니다. 근력이나 이동을 주력으로 할 수도 있지만, 위장이 훨씬 전술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것만 씁니다. 그러다 보니 강화복을 입고 싸운다기보다 위장 장치를 활용해 싸운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것처럼 차량을 뒤집거나 건물 꼭대기로 날아다니며 싸우는 것보다 몰래 숨어서 하나씩 제거하는 게 편해요. 전면전을 선호하는 유저라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이동이나 근력 모드를 사용해 싸우겠지만, 그렇지 않은 유저라면 자연히 위장 모드에만 손길이 가겠죠. 그러다 보면 어설픈 잠입 액션이 되겠고.

 

에에, 말해놓고 보니 은폐가 최고고 나머지는 쓸모 없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나머지 모드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은폐가 그만큼 쓸모 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전술적으로는 가장 유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사람 일이 항상 계획대로만 되는 건 아니라서 위급할 시에는 나머지 모드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을 테지만요. 어차피 은폐 공격은 한 번밖에 못 하기 때문에 은폐가 풀리면 숨는 수밖에 없는데, 적 숫자가 많다면 그것도 힘듭니다. 은폐는 못하고, 나노 슈트 에너지가 많이 남았다면? 속도 모드로 바꿔서 최대한 공격을 피하며 재빠르게 근접전을 들어가거나 방어 모드로 바꿔 회피하거나 근력 모드로 상대를 잡아 지평선 너머로 집어 던지거나 해야죠. 모드가 여러 가지인만큼 유저들의 플레이 방식도 다양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데모만 해봤기 때문에 외계인들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는 미션으로 돌입하면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게다가 해외 평점은 상당히 높습니다. 게임스팟이나 IGN 같은 곳에서는 거진 9점을 다 넘기는군요. (흔히 이 게임이 그래픽만 좋고 게임성은 꽝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어떻게 9점이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만한 작품이 자기 개성이 없을 리가 없죠. 아마 실제 게임을 해보면 더 많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데모만 해본 느낌은 그렇다는 겁니다.

 

여하튼 그래픽으로 유명한 게임이지만, 설정과 게임 플레이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잘 생긴 배우들이 연기력을 인정 못 받는 것처럼 이 게임도 사실 설정이 꽤 괜찮은데, 너무나도 뛰어난 그래픽 때문에 나머지가 가리는 듯합니다. 강화복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도 이 정도 하는 게임이 없을 듯합니다. 그 동안 사양이 안 된다고 이 작품을 쳐다보지도 않은 게 후회스러울 따름이네요. 최소한 강화복 활용으로는 마스터 치프보다 나노 슈트 주인공 노매드가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