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을 암살하는 무슬림이라…]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암살자는 그 쿨한 분위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단골로 다루는 요소입니다. 암살자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게임 등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장르 판타지에서도 전사나 마법사처럼 고정 클래스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죠.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나오는 로그 클래스부터 <자칼의 날>에 나오는 저격수까지 암살자는 시대를 넘나들며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마 먼 미래에도 이런 사랑은 변치 않을 거고, 암살자는 각종 미디어에서 여전히 몸을 숨긴 채 활약하고 있겠죠.
이런 암살자를 가리키는 단어는 이슬람 쪽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마초를 가리키는 하시시가 변해서 아사신이 되었고, 그 결과 어쌔신(assassin)이 되었다는 건데요. 실상 이런 이야기는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야사에 가깝다고 합니다. 실제 아사신들은 이슬람의 극렬한 교파이며, 오랜 기간을 두고 꼼꼼한 계획을 짜서 실행에 옮겼다고 합니다. 대마초에 취해서 살인을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덕분에 이슬람 극렬파는 어쌔신의 기원으로 굳어지고 말았지만요. (판타지 게시판에 아사신의 정확한 유래에 관한 글이 올라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는 이런 아사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2012년 미래로 주된 이야기는 어떤 남자가 조상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기계 애니머스를 사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애니머스는 조상의 기억을 따라가다 제3차 십자군 침공 때까지 이르고, 거기서 알타이르 이븐 라 아하드라는 인물을 불러냅니다. 알타이르는 아사신파의 일원이었는데, 플레이어는 알타이르를 조종해 십자군 세력의 아홉 지도자를 암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군 시대를 다룬 작품들이 십자군 쪽에 우선순위를 두는 반면, 이 게임은 십자군을 처치하는 이슬람 세력이 주인공인 셈이죠.
처음에 이 게임을 보고 굉장히 놀랐는데, 저렇게 무슬림이 주인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무슬림이 아닌 유럽인을 암살하는 아사신입니다. 저야 유럽이나 이슬람과는 상관없는 동양인이니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만. 유럽인들은 이 게임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이 게임을 하면, (지금도 그렇게 친근한 관계가 아닌) 무슬림을 움직여 자기네 조상인 십자군을 죽이는 셈이지 않습니까. 조상을 암살하는 게임이라니 유럽인은 <어쌔신 크리드>를 상당히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왜군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임진왜란 게임이 있다고 합시다. 이 게임은 왜군을 조종해 청이나 조선군을 제거하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이런 게임이 한국이나 중국에 나온다면 많은 유저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낼 겁니다. 예전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고, 요즘 <적색경보 3>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십자군을 처치하는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도 십자군을 조상으로 둔 유럽인 입장에서는 심기를 건드리는 물건 아닐까요. 거기다가 주인공은 가뜩이나 안 좋은 이미지가 쌓이고 쌓인 무슬림입니다. ‘무슬림 = 과격 테러분자’라는 잘못된 공식이 퍼진 곳은 미국만이 아닐 겁니다. 상당수의 유럽인도 이슬람을 저렇게 생각할 테죠.
기실 이슬람이 유럽인을 때려잡는 작품은 이전에도 있긴 했습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가 좋은 예로 여기서 살라딘 미션을 진행하면 사라센 문명으로 브리튼과 프랑크 문명을 공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살라딘 미션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일부분일 뿐 게임 자체는 중세의 여러 전투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 게임 역시 여러 모로 유럽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사라센이 브리튼을 몰아내는 게 그렇게 튀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쌔신 크리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슬림이 중심입니다.
물론 십자군 침공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성지를 되찾는다는 명분 하에 멀쩡히 잘 살던 아랍인들을 두들겨 패고 쫓아냈으니까요. 그 동안 서방에서는 십자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거의 없었으나 최근에는 그런 움직임이 조금씩 일기도 합니다. <킹덤 오브 헤븐> 같은 영화가 나오는 것도 다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죠. 그러니 <어쌔신 크리드>도 그런 분위기를 타고 나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게임이 직접적으로 십자군을 비판하는 건 아니지만, 무슬림의 십자군 암살이 용납될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겁니다. 유럽인들도 이 게임을 하면서 ‘십자군 침공은 잘못된 일이었고, 그러니 게임 내용에 불편함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과 달리 유럽인들은 그나마 자기네 과오를 인정하는 편이니까요.
아직까지는 게임 사이트 등에서 유럽인이 <어쌔신 크리드>를 싫어한다더라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어쌔신 크리드>를 신경쓰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을 볼 때도 그랬지만, 서방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서양의 눈으로 본 이슬람인지라 아직도 오해의 소지가 많이 남아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슬람의 비중이 커진다는 게 반갑기도 합니다.
※ 아사신의 이름인 Altaïr를 ‘알테어’로 부르는 유저가 많더군요. 하지만 이 아사신은 아랍인이니까 알타이르 혹은 알따이르 등으로 부르는 게 옳지 않을까요.
※ 순수 역사물인 줄만 알았던 이 게임이 알고 보니 SF였더라… 했던 게 가장 큰 반전이었습니다. 내용은 제3차 십자군 침공인데, 배경이 2012년이라니 충격이었어요.
必. 엄밀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십자군 전문 암살범은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이 세상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하는 거고, 이를 어지럽히는 자는 기독교도든 무슬림이든 가차없이 처단합니다.
제가 했을 땐 기독교 지배지역인 예루살렘보다 이슬람 지역인 다마스커스에서 활동하는 게 더 어렵더군요. ^^;
십자군 역사를 개관해보면 아사신 일파는 무슬림보다는 십자군 세력에 동맹자로 활동했습니다. 아사신 일파, 정확히는 이스마일파는 이슬람 분파 중 순니파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시아파 중에서도 강경파였는데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은 시아파 내에서도 동조를 구하지 못할정도였습니다. 당시 아랍세계는 순니파를 중심으로 종교적으로 통일된 상태였고 시아파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지방으로 밀린 상태였는데 시아파의 중흥을 광신적으로 도모하는 아사신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대신해 순니파를 엿먹이는 십자군을 오히려 동조자로 생각했죠.
서구인 시각으로 저술된 십자군 저서 (ex. 십자군,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God willst it! -W. B. 바틀릿 저) 뿐 아니라, 아랍인의 시각이 잘 살린 저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저' 에서도 적과 손을 잡는 아사신은 아랍의 통일을 저해하는 암적인 요소로 평가됩니다. 당면한 적인 십자군보다 내부의 적인 아사신을 더 증오했다고 하지요. 이들 손에 암살된 인물들 역시 프랑크인 (유럽인) 보다는 아랍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암살된 다수가 초기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인의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점이 문제였죠. 모술의 에미르 (영주) 마우두드, 알레포의 카디 (재판관, 주로 종교법을 다루기에 권위가 무척 강했으며 십자군 전쟁 시 정신적 지도작 역할을 합니다) 이븐 알 카샤브, 바그다드의 카디 아부 사드 알 하라위, 알레포와 모술의 에미르 알 보르소키 등 수많은 지도자들이 순니파였다는 이유로, 아사신의 이해관계에 위해된다는 이유로 암살당합니다. 더욱이 공포감 조장을 위해 아랍의 일반 민중까지 죽음을 당했다 하며 심지어 바그다드의 칼리프까지 이들의 칼날에 공포에 떨었다고 하죠.
아사신은 훌라구칸에 의해 괴멸될 때 까지 아랍 내에서의 십자군 동조세력으로 많은 활약을 합니다. 심지어 일부 십자군 지도자는 십자군 내의 본인의 정적을 암살하는 데 이들을 이용했다는군요. 사자심왕 리처드가 살라딘과 전쟁 중일 때 권위에 도전하는 콘라드라는 십자군 영주가 있었습니다. 콘라드는 아사신파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암살당하는데, 이 암살의 뒤에 리처드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저는 게임에서 아사신들을 저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이 사건의 본질은 모른 체 그저 신비스럽고 이국적인 이유로 소재로 채택 한 전형적인 오리엔털리즘으로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본인들 조상의 동조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적으로 그릴 지경인데 조상들에 대한 예우 따위를 생각이나 했을라고요.
혹시모르죠 `콜오브듀티13:지하드의전사` ......주인공 압둘 알 아지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