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다큐멘터리 등 모든 작품에 대한 이야기. 정보나 감상, 잡담.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 이 게시판은 최근에 의견이 추가된 순서대로 정렬됩니다. )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 이 게시판은 최근에 의견이 추가된 순서대로 정렬됩니다. )
글 수 22,958
영화 <깨어난 포스>의 두 주인공은 레이와 핀입니다. 그런데 핀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원래 이 청년에게는 이름이 없고, 그 대신 군번만 있었습니다. FN-2187이라는 군번이죠. 퍼스트 오더는 스톰 트루퍼에게 이름이 아닌 군번만 붙였고, 그래서 핀은 자기 이름을 묻자 군번으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저항군 쪽에서 FN이라는 명칭에 착안해 핀이라는 이름을 즉석에서 붙여요. 그리고 이름이 생긴 핀은 우주를 모험하며 점차 저항군 편으로 각성합니다. 어찌 보면, 핀에게 이름이 생기는 순간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만약 저항군이 FN-2187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남들이 FN-2187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이 청년은 뭐라고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혹은 자기 이름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신 대답했겠죠. 그러니까 이 청년에게는 핀이라는 이름이 생긴 이후로 새로운 정체성이 함께 탄생한 셈입니다. FN-2187은 저항군으로 각성하기까지 여러 가지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름이었죠.
사실 전체주의 집단이 개인을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부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들> 같은 소설에서 이런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는 단일 제국이라는 조직이 등장하고, 주인공은 이 조직의 과학자입니다. 주인공 이름은 D-503입니다. 퍼스트 오더의 스톰 트루퍼 군번이랑 번호 형식이 비슷하죠. 알파펫을 붙이고, 그 다음이 숫자입니다. 단일 제국과 퍼스트 오더는 모두 구성원에게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비슷한 번호를 붙입니다. 퍼스트 오더의 장교들은 그나마 이름이 있지만, 핀처럼 소모품에 불과한 구성원에게는 그저 이름만 붙이는 수준이죠. 이렇게 본다면, <깨어난 포스>의 퍼스트 오더는 <우리들>의 단일 제국과 위상이 비슷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퍼스트 오더의 악랄한 행위가 그렇게까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성원에게 번호를 붙이는 행태로 보면, 퍼스트 오더 역시 단일 제국처럼 전체주의를 지향한다고 추측할 수 있죠. 뭐, 이렇게 추측하지 않아도 어차피 은하 제국이나 퍼스트 오더나 둘 다 우주 버전 나치 제국이니까요.
소설 <우리들>의 단일 제국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기 때문에 단일 제국입니다. 개개인의 차이를 말살하고, 다양성을 무시하고, 공존과 상생 따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성향을 버리고, 지배자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민들은 사회의 보편적인 규범만 따라야 합니다. 괜히 이름이 '단일' 제국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단일하기 때문입니다. <깨어난 포스>에서 퍼스트 오더의 실상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마 단일 제국처럼 어딘가 획일적인 면모가 있을 겁니다. <스타워즈> 프리퀄 시리즈에서도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신생 은하 제국은 민주주의의 반대를 지향하죠. 그래서 아미달라가 팰퍼틴의 제국 선포를 보며, “우뢰 같은 박수와 함께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운운했습니다. 은하 제국과 퍼스트 오더의 사회 구조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의 모습은 대충 짐작이 갑니다. <우리들>의 단일 제국과 근본적인 부분이 다르지 않을 겁니다. 군부가 시민들을 통제하고, 다양성과 개성과 소수 의견을 묵살하겠죠. 군부는 자기들 기준에 벗어난 시민을 가차없이 처단하겠죠.
FN-2187은 이런 조직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찾고,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FN-2187이 핀이 되는 순간은 나름대로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김춘수의 <꽃>을 이야기했는데, 이름이야말로 정체성을 대변하는 수단이니까요. 사실 사람에게 이름 대신 번호를 붙이며 인격을 모독하는 설정은 비단 디스토피아 소설에만 나오지 않죠. 이름이 생기는 순간은 중요하고, 그래서 <깨어난 포스>에서 그 장면을 좀 더 중요하게 부각했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워낙 바쁘고 전형적인 터라서 이름을 명명하는 장면도 휙휙 지나갑니다. 그게 쌍제이 감독의 특기라면 특기인데, 그래도 아쉬운 장면이었습니다. 스톰 트루퍼 주인공이 이만큼 등장하는 실사 영화 시리즈가 드물잖아요. 그러니까 스톰 트루퍼 탈영병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에 퍼스트 오더의 전체주의 실상을 보다 자세히 드러냈으면 싶었습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전제주의와 개인의 부조리보다 주인공의 영웅 신화를 더 중시하는 편입니다만.
개인적으로 FN-2187의 이름 장면이 좀 더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아마 우리 사회가 그만큼 전체주의로 굴러가는 중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상 획일화는 <우리들>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지금도 정부 윗대가리들이 어떻게든 개개인의 역사관을 자기들 입맛대로 통합하려고 애쓰니까요. 가끔 농담처럼 21세기 의열단을 언급했지만, 진짜 저항 연합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의 포스 균형을 잡아줄 저항 연합은 어디 있을까요.
비록 실패작이었지만 RTS로 나왔던 <스타워즈: 포스 커맨더>란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시작은 스톰트루퍼였던게 참 신기했습니다.
FPS게임이었전 <다크 포스> 메뉴얼 보면 스톰트루퍼 자체에 "이들은 똑똑하지 못하지만", "제국은 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능력을" 등의 설명이 버젓이 나와있는 수준이었던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