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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에게 은밀한 테러를 수행하는 결사 조직…. 뭔가 로망이 아닙니까.]


얼마 후 드디어 <깨어난 포스>가 개봉합니다. 이번 영화는 화기애애한 프리퀄과 달리 어둡고 묵시적인 클래식 시리즈에 가까울 듯합니다. 저항군 후예가 새로운 제국군과 싸우는 구도니까요. 역시 이런 SF 작품의 재미는 저항군의 처절함에서 빛나는 것 같습니다. 저항군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문득 예전 <뉴요커>에 실린 평론이 떠오르네요. 2013년 12월에 <주술사>라는 소설을 비평하던 평론이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SF 장르는 태생부터 정치적이다. 미래를 상상하는 이유 혹은 대체 역사를 상상하는 이유는 '세상은 어때야 한다.'라는 소망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소망이 정치의 중심 투쟁이다. 현재의 상황이 정당하다고 믿는 보수주의와 다르다." 그러니까 이 평론에 따르면, SF 장르는 밑바닥부터 저항을 주장하는 셈입니다. 사실 SF 작가 중에는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거나 붓까지 꺾은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특히, 이런 성향이 두드러지는 쪽이 디스토피아 계열일 겁니다.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디스토피아 소설 속에서 비밀 저항 조직이 거대 집단에 맞섰죠.


초기 SF 디스토피아의 유형을 확립한 작품로는 허버트 웰즈의 <잠든 자들이 깨어날 때>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백색 의회라는 세계 기구가 인류를 통치하고, 거기에 맞서 혁명과 투쟁이 발생하는 소설입니다. 19세기부터 이런 내용들이 등장했고, 이후 1908년에 잭 런던이 <강철 군화>를 쓰죠. 소위 3대 디스토피아에 들어가지 않지만, <강철 군화>는 20세기 이후의 디스토피아 유형을 확립한 기념비적인 책입니다. 민중을 억압하는 정부, 기술과 자본 독점, 선동과 프락치와 언론 조작, 테러와 암살과 고문과 신분 세탁, 비밀 저항 조직의 눈물 나는 결사 항전까지 나올 건 죄다 나옵니다. 주인공이 너무 영웅주의적이지만, 어쨌든 비밀 저항 조직의 로망을 치열하게 다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압제 권력층과 저항 조직의 싸움은 예브게니 짜마친의 <우리들>, 조지 오웰의 <1984>, 레이 브래드베리의 <화씨 451>, 차이나 미에빌의 <퍼디도 정거장> 등에서도 줄기차게 등장하죠. 거의 불가항력적인 집단에 맞서서 은밀하고 고독하게 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결사 조직…. 이야, 뭔가 로망이 아닙니까.


디스토피아의 기술과 자본 독점이 더욱 심해지면, 그게 사이버펑크로 발전하죠. 사실 사이버펑크는 디스토피아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암울한 사회상이 바탕입니다. 정치권과 대기업과 인공지능이 허약한 시민들을 등쳐먹습니다. 이런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종 데커와 해결사와 총잡이가 모여서 대기업을 털어먹거나 인공지능을 해킹하죠. 게다가 압제의 주체가 꼭 인류 정부일 이유는 없어요. 할란 엘리슨이 쓴 <나는 입이 있지만 비명을 지를 수 없다>처럼 인공지능이 인류를 정복할 수 있죠. 인류는 무소불위의 기계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일 테고요. 스팀펑크는 산업 혁명 시대가 배경이라서 노동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을 부각할 수 있어요. <퍼디도 정거장> 같은 스팀펑크는 펑크 계열인지라 사이버펑크와 유사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또한 디스토피아 분위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거대 약탈자에 대항하는 생존자들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소설 <메트로 2033>의 붉은 여단은 인터내셔널과 체 게바라의 이름 아래에 네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들을 털어먹고 다니죠. 아포칼립스 빨치산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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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부터 SF 소설은 혁명과 투쟁, 결사 조직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비밀 저항 조직의 면모는 디스토피아뿐만 아니라 여타 하위 장르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거대 권력에 맞서는 소수 저항군의 모습이 비장미를 자극하니까요. 가령, 디스토피아 색깔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꽤 흔하죠. <스타워즈>가 <스타트렉>보다 어둡다고 하는 이유는 이런 결사 항전이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번듯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과 호스 행성에서 벌벌 떨며 추레하게 살아가는 구공화국 저항군….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후자가 뭔가 비장미를 장식하는 점은 분명하죠. 혹은 <듄>이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처럼 지배 종족이 피지배 종족을 착취하는 행성 로망스도 있습니다. 사막 곳곳에서 암살, 매복, 기습으로 사다우카와 하코넨 병사들을 탈탈 털어먹는 프레멘들은 게릴라의 표본입니다. 이런 행성 로망스는 식민 통치부터 소수민족과 성적 차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은유할 수 있습니다. 지배 종족에게는 나름대로 먹고 살만한 세상이겠지만, 피지배 종족에게는 확실히 디스토피아일 겁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수 작품들이 혁명과 투쟁을 외칩니다. 행성 로망스의 저항군, 전체주의 사회를 뒤엎는 해방군, 대기업과 인공지능에 맞서는 해커들, 공장주에게 저항하는 노동자 연대, 약탈자 우두머리를 처치하는 생존자 무리, 은하 제국을 테러하는 공화국군 등등. 물론 <강철군화>의 사회주의 저항군과 <스타워즈>의 구공화국 저항군은 동일한 위상이 아닙니다. 은하 제국은 누구나 인정하는 악당이지만, 자본가 계급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자본주의 경쟁의 모순을 지적하면서도 자본주의를 유지하죠. 위에서 언급한 <뉴요커> 평론이 가리키는 진보 성향은 <우리들>이나 <퍼디도 정거장>에 가까워요. 진정한 저항군은 안정된 질서를 거부하고 약자를 위해 싸우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스타워즈>는 혁명 과정보다 영웅 신화에 더 관심이 많고…. 하지만 그 위상이야 어쨌든 절대적인 집단에게 소규모 비밀 조직이 덤빈다는 형태는 비슷하고, 거기서 풍기는 레지스탕스의 로망은 멋집니다. (개인적인 취향은 대놓고 싸우는 저항 연합보다 은밀하게 테러하는 사회주의 저항군 쪽이지만.)


좀 더 대중적인 영화들, 그러니까 <이퀼리브리엄>과 <브이 포 벤덴타>와 <매트릭스> 등도 모두 잭 런던과 예브게니 자마친과 조지 오웰의 머나먼 후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매트릭스>의 혁명 과정은 <우리들>의 얼개와 꽤 비슷해요. <매트릭스>는 예브게니 자마친과 윌리엄 깁슨과 홍콩 느와르를 짬뽕한 비빔밥인 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레지스탕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조직도 <우리들>에 나오는 '메피'였습니다. 메피는 단순히 전체주의 정부와 싸우는 집단이 아니라 일종의 아웃사이더 모임입니다. 주인공이 그 조직에 가입하기까지 겪는 정체성 분열과 실존주의도 상당히 혼란스럽고요. <우리들>은 이런 혼란의 연속을 서술하기 때문에 저항군이 시원시원하게 거대 집단을 까는 재미는 없습니다. <강철군화>처럼 혁명군 주인공이 과두 체제를 청량하게 까주는 장면은 안 나와요. 하지만 오히려 그게 암울함을 부각하죠. 아마 이게 미국 문학과 소련 문학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미국 작가가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해도 실제로 먹구름이 드리울 예정인 소련보다야 더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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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이버펑크의 레지스탕스 역시 잭 런던과 예브게니 자마친의 후손인 셈이죠.]


디스토피아 문학은 다수와 은밀하게 싸우는 소수를 이야기했고, 그런 대결 구도는 다른 하위 장르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항군들은 언제나 추레하고 절망적이지만, 비장미를 한껏 풍기죠. 체제 순응으로 고민하는 시민군이든, 전뇌 공간을 누비는 해커든, 블래스트를 쏘는 우주군이든 간에 말입니다. 요즘 <새틀라이트 레인>이라는 사이버펑크 게임을 하는데, 거대 기업을 테러하는 레지스탕스의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뭐, 안타깝게도 비단 소설과 게임 속의 디스토피아만 이런 저항군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흠, 혹시 또 누가 압니까. 요즘처럼 단일화 역사관을 주장하는 전체주의 정부가 대가리를 쳐들면, 어디선가 21세기 의열단이 등장해서 테러를 하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