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헤비앙(Très bien) 4 - 1  
  
Part. 04: 펜토스

1.        사상

1426년 10월 11일, 트레비아령 펜토스시로부터 6마일 떨어진 어느 산등성이.


    숨을 헐떡인다. 육체는 더 많은 산소와 온기를 필요로 한다. 근육이 파르르 경련하고, 심장은 더 많은 산소를 요구했다. 하지만 들이 마셔진 공기는 탁하고 매케하여 기침을 유발하였다. 사방은 어둠으로 뒤덮혀 있었고, 이따금씩 불꽃과 번개가 어둠을 일부나마 채색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함성, 그리고 언덕 너머에서 번쩍이는 불꽃과 번개. 헤르만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공포를 느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미칠듯한 공포 때문인지, 피부에 닿는 빗줄기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하엘! 오토! 비텐!! 슈마허! 대답해! 모두 어디있는거야!!”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헤르만은 더 이상 소리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주위에 적군이 있다면 표적만 제공해 줄뿐일 테니까. 피로가 극에 달한 그의 다리가 그에게 휴식을 강요했기에 헤르만은 부러진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주저 앉았다.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그루터기만 남았거나 새까맣게 타들어가있었다. 한숨만 연거푸 나왔다. 호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담배는 없었다. 헤르만은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계속된 긴장의 연속이 그의 육체를 피곤하게 했다.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의 관등성명을 되뇌었다. 평소 좋아하던 책들이나 사상가들의 명언도 기억나지 않았고, 어렸을 적 집 안뜰에 심었던 올리브 나무에 붙인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소속과 관등성명만이 그가 기억해낸 전부였다.

"아르케디아 제국 육군 서북군관구 제 4집단군 참모본부 장교 헤르만 마이어 소령"

하지만 그의 되뇌임도 갑자기 끼어든 소음에 의해 계속되지 못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고함소리와 함께 들려왔고, 순간 헤르만은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린 후 뒤를 돌아보자 적군 병사가 나무에 박힌 대검을 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적 병사의 표정은 헤르만의 표정만큼이나 공포에 젖어있었다. 헤르만은 생각할 것도 없이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약실에는 더 이상 에너지가 들어있지 않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군인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네의 편지는 잘 받았네. 새로운 소식에 대한 자네의
불안감과 기대감이 가득 담겨있더군. 한가지 확실한 건
그다지 나아진게 없다는 거지. 모두들 노예가 되는 것
보다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것을 더 두려워
하더군. 노예로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 불과한데도 말이야. 그게 지금의 상황이야.
모두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사태 개선을
위해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네.’
    
- 시케론의 「서한집」, ‘앤더슨에게 보내는 편지’, 1223년 3월 21일 자 중에서 -


“각하?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무례한 질문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면서도 일단 입을 열어 질문했다. 방년 28세의 헤르만 마이어 소령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상관이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각하께서 읽으시는 책이라면 분명 수준높은 책일 거야’. 물론 사령관실에서 한없이 서있기는 지루해서이기도 했다. 마이어 소령의 질문에 책을 읽던 노인은 그제서야 얼굴을 들었다. 마르고 주름진 얼굴은 퉁명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인자해 보이기도 했다. 단지 약간 깐깐해 보이는 표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헤르만은 그것이 코에 걸쳐진 은테 안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약하게 경련하는 입꼬리 때문이었으리라.

“시케론의「서한집」을 읽고 있네.”
“아, 「서한집」 말씀 이시군요. 그....   네!?”

젊은 부관의 경악에 찬 표정을 보며, 리텐슈타인 대장은 조소와 같은 웃음을 내비쳤다.
“적을 이기려면 적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네, 안 그런가 소령?”
마이어 소령은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에 이 책을 읽어보았으리라 믿네. 많은 학생들이 읽어왔지. 그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건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끌려가기 때문이 아닐까? 군대는 이성을 없애도록 훈련시키는 곳이니까 말이야. 제대할 때쯤 되면 더 이상 대학 때 읽은 내용 따위 기억나지도, 필요하지도 않지. 자네는 어떤가? 군대에 끌려오고 나니 뭐 기억 나는게 있나?”

소령은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새로 모시게 된 지휘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일지 정확히 알고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이마에서 땀이 한방울 흐르는 것을 느끼며 헤르만은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자진입대 했습니다만.”

리텐슈타인 대장은 계속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알고 있네.”

마이어 소령으로써는 대장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임신고 후 작전회의 한번, 그 후로는 의례적으로 얼굴을 보는게 전부였었고, 이번에는 군단장이 따로 호출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르케디아 제국 육군 제 5 집단군 총사령관 에리히 리텐슈타인 대장은 굳이 사적으로 만나지 않아도 충분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대장의 직위까지 올라, 현재는 한 집단군의 총사령관이 된 그는 평민출신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는 묘한 매력도 가지고 있었다. 냉소적인 태도는 그가 60줄에 접어들면서 더 확연히 드러났다. 하지만 더 희안한건 그가 대학교수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헤르만은 그런 약력을 가진 대장의 책상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여러 문서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중에는 장교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철도 있었다. 헤르만은 자신의 이름이 리텐슈타인 대장의 팔 아래에 살짝 깔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장군이 부관을 조롱하고 있는건지, 시험하고 있는건지 헤르만으로써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리텐슈타인 대장의 깡마른 표정이 굳었다.
“「서한집」을 읽어보았나, 안읽어보았나?”



13세기 전후의 트레플은 트레비아 반도의 작은 독립 공국이였으나, 1221년에 북부의 엥겔리오스 제국이 침공하여 점령된 적이 있었다. 엥겔리오스에서 도시국가 트레플을 병합했을 때 시민들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6년간의 투쟁끝에 트레플 공국은 1227년에 결국 다시 독립을 쟁취했고, -이는 엥겔리오스 제국이 황실 내전에 휘말린 탓도 있었다- 공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 공화주의에 매료된 지식인들, 종교의 자유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제국들에서 수탈받던 하층민들이 새로운 기회와 민주주의를 찾아 공화국으로 몰려들었다. 관세 적용이 크지 않으며 북해의 요충 상업지대에 위치한 트레플을 매력적으로 느낀 장사꾼들도 막대한 양의 사업자금과 함께 트레비아에 정착했다. 나날히 인구를 늘리며 세력을 키우던 도시국가 트레플은 주변 도시들을 병합, 결국 트레비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트레비아 공화국으로 재탄생했고, 건국된지 200여년만에 현재는 주변의 제국들과도 견줄만한 강국이 되어있었다.

트레플 공국의 법조인이며, 정치가이자, 타고난 웅변가이기도 했던 시케론은 ‘시민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제국 점령기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일께우고 저항운동을 이끌어, 이후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한 위인이 바로 시케론이었다. 시케론이 점령기 동안 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에는 시케론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갈망과 사상들이 담겨있었고, 그 편지들을 모아 출판된 책이「서한집」이였다.


「서한집」이 바로 그런 책일지언데, 제국에서 그 책의 내용을 인정할리 만무했다. 아르케디아는 이미 나름대로 평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였다. 평민들은 주 이하 행정단위의 지방관리를 투표로 선출할 수 있었고, 스스로 정치에 참여해 하원에 선출되면 국정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상원은 오직 귀족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장관급의 공직은 모두 귀족들이 담당했다. 그런 차에 ‘시민’들 스스로가 국가를 통치한다는, 민주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내건 트레비아 공화국과 그 사상들은 국가 체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었고, 제국은 혁명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에 담긴 사상은 많은 젊은이들의 지식에 대한 열정을 자극했고, 대학가에서는 암암리에 불법 복사본이 나돌았다. 헤르만도 대학생 시절 이 책을 구해 읽었고, 그 내용은 거의 암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헤르만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네, 네! 대학 2학년 때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리텐슈타인 대장은 헤르만의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는 듯 했다.

“호, 그래? 그럼 자네는 시케론의 사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헤르만은 당황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얘기해야 하나,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하나. 헤르만이 택한 것은 절충안이었다.

“흐,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국가의 지도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게 신선했습니다. 아마 본인이 자수성가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영에 대입했을 때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뿐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왜 이지?”

“평민들이 ‘대중’이 될 때는 제대로된 판단력을 갖추기 힘듭니다. 정치는 대중적이 되기 십상이고, 국가 지도자가 평민이 될 경우 국가가..  국가가..”

헤르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무턱대고 시작하긴 했으나 시케론의 사상에서 특별히 반론을 제기할만큼 뚜렷한 주관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어느쪽이냐 하면 그는 제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아도 트레비아 공화국의 체제를 동경하는 쪽에 속했다. 당황하는 부하를 앞에 두고 리텐슈타인 대장은 마치 면담을 받으러 온 학생을 관찰하는 대학교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헤르만은 이에 거북함을 느꼈다. 입을 다문 헤르만 대신 리텐슈타인 대장이 입을 열었다.

“네이룬 공화국은 제국 보호령에 불과해졌고, 그 수괴인 뤼크는 정치범 수용소에 같혀 있지. 하지만 그곳 국민들은 여전히 격렬히 저항하는 중이네. 민주주의라는게 그렇게 소중한 것일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리텐슈타인 대장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서랍에서 지도 한장을 꺼내 헤르만에게 내밀었다.

“이곳을 정찰하고 트레비아 육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나아가서 이 도시를 점령하고, 그곳을 방어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네. 우리 군은 현재 서북 군관구의 거의 3분지 1의 병력을 이곳에 투입할 예정이네. 그 선발대의 지휘를, 자네에게 맡기겠네.”

노장군의 가는 검지가 지도위의 한 지점에 멈춰 있었다. 헤르만 마이어 소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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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사실, 민주주의가 뭔지 저도 모릅니다. 그저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 거창한 말들을 늘어놓는것에 불과해요. 헤르만 마이어도 민주주의가 뭔지 모릅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연구한 리텐슈타인 전직교수도 민주주의가 뭔지 모릅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건 아마도...

안녕하십니까, 월광토끼입니다. 공상과학물에 관심이 있다보니까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