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포상


체스는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포로들을 바라보았다.
‘산 자들은 산 자들 나름대로겠지만, ’
씁쓸하게 생각하는 체스의 눈에, 자신의 세이버가 들어왔다. 피로물든 기병도의 날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 소유주의 몰골도 나을 바는 없었다. 원래 짙은 녹색이던 군복은 군데 군데 피로 물들어 검붉은 빛을 띄었고, 반짝이던 흉갑은 이곳저곳이 패이고 찌그러져 있었다. 군단장 본인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장병들이 피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헐떡이고 있었다. 찰과상과 총상은 부상 축에도 끼지 못했다. 어깨 아래가 잘려 비명을 지르는 중상자나, 복부에 마력탄을 맞아 내장이 뚫려버린 소생불능의 빈사자.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상처를 불평하지는 않았다. 아니, 불평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저 각자의 소속부대와 함께, 사라진 전우와 남아있는 전우를 구별하며 주저앉을 뿐이었다.

체스는 이 승리가 너무 희생을 많이 치르고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전장 가득히 들어찬 시체 더미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이때 체스의 사고는 느닷없는 진급과 이례적인 인사에 대해 의문을 가지던 4월 말과는 정 반대로, 더 일찍 군단 창설을 지시하지 않았던 군 사령부에 대한 불만으로 전개됬다. ‘제식 훈련에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젠장! 나에게 두 달만 더 주어졌더라면...’

“각하, 각하의 왼쪽 허벅지가...”

멍하게 서 있던 체스에게 말을 건 것은 참모장 세지릴이었다. 그녀는 전투 내내 본대에 남아 체스가 전방에서 내리는 지령들을 통합해 다시 각 부대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체스의 지령들은 매우 신속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실행되어야 했는데, 그 지시들을 제 때 전달, 여기저기 분산되어 기동하던 각 부대가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은 세지릴의 공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지릴도 전장의 피비린내나는 풍경 –피뿐만이 아닌, 총에 맞아 부서진 머리 라던지, 공포에 질린 병사가 쏟아낸 오물, 칼에 절단된 신체부위, 또는 말굽에 다져진 시체등- 에서까지 이지적 태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군단장보다도 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거? 별거 아냐. 신경쓰지 말도록.”

체스는 마치 그제서야 생각 났다는 듯이 자신의 상처를 가렸다. 그러나 상처는 별게 아닌게 아니었다. 대검에 깊게 베인 상처였다. 벌어진 살 아래로 뼈가 보일 정도였기에, 보는 사람이 몸서리를 치게했다.

“피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가만히 계세요.”

세지릴은 목의 스카프를 풀어 체스의 상처에 묶었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눈이 빠질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체스는 엄청난 자제심을 발휘해 약간 얼굴을 찡그리기만 했다. 그는 그저 슬쩍 세지릴의 얼굴을 봤고, 미쳐 닦아내지 못한 구토자국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시각적으로든, 후각적으로든,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광경이지?”

손수 지혈제를 바르던 세지릴은 군단장의 말투에, 그리고 그의 표정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마른 피가 엉겨붙은 얼굴의 그가 히죽, 웃었기 때문이다. 체스는 시데르와 사담을 나눌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씁쓸하거나, 심각하거나, 냉정한 표정으로 일관했었다. 그래서인지 세지릴은 그 이질감에 오히려 거북함을 느꼈다.

‘그런데 나는 말야, 촉각적으로도 유쾌하지 못했어. 칼날이 살을 갈라 뼈를 자르는 느낌은 손잡이에 단단히 전해지지. 건틀렛에 감싸인 주먹은 부서지는 사람의 턱뼈를 느끼지. 몇 년 째 해오는 일인데도 여전히 불쾌해. 오늘도. 아니, 오늘은 스케일을 늘려 했어. 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칼을 휘두르던 팔에 힘이 빠질 때까지 많이 싸우고, 죽였어. 매우 피곤한 일이지.’

체스의 생각들은 그의 목구멍까지 올라와 내뱉어질려했다. 하지만 그는 역겨움을 삼켰다. 그리고는 기껏 움직인 혀와 목젖을 더 사용해주어야겠다는 의무감에서 말했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거야. 그건 모두에게 있어 마찬가지고.”

세지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 처리와 장비 점검, 전사자 믿 부상자 결산, 부대 재편성 등 할 일이 많을 텐데, 일은 다 끝내고 온건가?"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시행하도록.”

피와 시체들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걷는 세지릴의 뒤로, 멀리서 시데르가 보였다. 7군단의 기병대장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맥주 한병을 들이키고 있었다. 적의 사령부에서 획득한 전리품일 듯 했다. 체스는 시데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맥주병을 뺏기위해.




1426년 7월 16일, 두잔 전투는 공화국 육군 제 7군단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에 참가한 기병 2,800명 중 900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보병 6,700명 중 2,500명이 사상당했다. 전 병력의 무려 36%에 달하는 사상율로 보아선 제 7군단이 패잔병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한 제국군의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다. 제국 육군 제 17군단에서 무사히 패주에 성공해 재규합된 자들은 16,000명 중에서 겨우 5,400여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만여명은 모두 죽거나 실종, 또는 포로가 되었고, 압도적 전력 차이를 감안한다면 이는 실로 엄청난 전과였다.

각 부대가 별동대 등으로 나뉘어 분산되 전투를 벌인 것은 압도적인 적 앞에서는 되려 자승자박의 결과를 낳을 작전이었다. 그러나 각각 산개된 부대가 잘만 연계될 경우, 움직임이 둔중한 적의 병력 활용 기회를 뺏는 것도 가능했다. 제 7군단이 실행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였다. 여기에 제국군의 지휘부를 무방비 상태로 이끌어 내, 일격에 전멸시킨 것 또한 공화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군단장 체스 본인은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적 지휘관의 방식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으며 소극적인 대응만을 해오며 비전투 잉여병력을 만든 제국측 지휘관이 없었다면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런 얘기를 참모장 세지릴에게 털어놓았을 때 세지릴은 오히려 그런 적 지휘관의 성격을 파악한 군단장의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라며 되려 체스를 추켜세웠다. 그 얘기에 체스는 멋적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상황은 제 7군단이 마냥 승리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7월 19일에는 제국군의 후속 군단이 도착하여 대치 상태에 들어갔고, 제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는 결국 요새 안으로 후퇴해 농성전이 전개되었다.

애초에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도록 설계된 성이 아닌 두잔 요새에 수비군 이외에 군단이 들어가 있는 것은 식량의 빠른 고갈로 이어졌고, 체스는 탈출 작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이도 7월 24일에 공화군의 제 22군단이 원군으로 도착, 1개 군단에 불과했던 제국군은 후퇴하고, 요새 수비대와 제 7군단은 구원받게 된다.





‘제22군단장 쥬이체브 장군 특집 인터뷰’

“에라이 썩을!”

시데르는 신문지를 마구 구겨 수 미터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구겨진 신문은 열어논 창문에서 때마침 분 바람으로 인해 쓰레기통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더럽군.”

시데르는 입술을 깨물고는 걸어가 신문지를 주워 다시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시데르의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하는 행동이었으나, 시데르 본인은 물론 체스도 웃지 않았다.

“또 뭐가 그리 불만이야?”

초콜릿을 씹으며 한 말이었기에 발음은 좀 탁했다. 체스의 물음에 시데르는 커피잔을 체스에게 내밀며 답했다.

“신문에서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 활약은 쏙 빼고 22군단 얘기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불만이야? 이미 군단 표창도 받고 사령부에서 상여금도 나눠줬잖아. 충분히 인정 받았구만.”

“아니, 각하와 제가 특수전대 소속이였을 때야 뭐 아무도 우리 전공을 알지도, 알아서도 안되었지만, 이젠 우리는 정규군이 잖습니까? 우리가 한 일은 펜토스 전투에서 제 1군단의 활약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였다구요!”

“그러면 교과서에 실리겠네.”

체스의 심드렁한 반응에 시데르는 기죽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국민학생들 교과서에 말입니다. 사관학교 교과서 말고!”

다리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홀짝이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상관과, 눈썹을 찌푸리며 책상위에 앉아 삿대질을 하는 부관의 모습은 상사와 부하의 대화모습은 물론이고, 건설적이고 열띈 토론의 전형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둘 사이의 이런 따뜻한 담화는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고, 이는 언제나 참모장 세지릴의 잔소리에 주제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런 잔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체스는 시데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일주일 전 신문들에 눈길을 주었다.

‘동북 경계 무사 방어! 아피아 직로는 보호되다’
‘제 22군단의 적시 도착과 제국군 후퇴’
‘포위받은 요새를 구한 제 22군...’

“이봐 시데르. 자네는 이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

커피잔을 비운 체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중령이 수백 단어를 수백 방울의 침과 함께 내뱉은 후였다.

“에?”

체스는 시데르의 얼빠진 표정을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관은 함께한 4년동안 대부분 웃거나 찌푸린, 두 가지 표정만을 보여주었었다. 표정의 다채로움은 없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이 전쟁은 좀 오래 갈 것 같네.”

체스의 설교조의 말에 시데르는 ‘얼빠진’ 표정을 ‘찌푸린’ 표정으로 바꾸었다.

“장군님. 전쟁이 오래가도 말입니다. 우리가 단독으로 활약할 일이 많다는 보장은 없잖습니까? 월급 못받는 것도 서러운데 ‘폼 좀 잡을’ 기회도 없어진건 더 서럽죠.”

체스는 ‘그렇게 서러우면 가서 술이나 마셔!’ 라고 대꾸하려다 말을 삼켰다. 너무 심한 말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군단장실의 문이 갑자기 덜컥 열려서였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들어온건 라에비트 소령이었다. 두 상관의 얼빠진 시선이 집중되자 라에비트 소령은 씩씩대기만 할 뿐이었다.

“소, 소령. 경례는 안할건가?”

당황한 군단장의 물음에 군단 보병대장도 당황했다. 얼굴을 붉히며 거수경례를 하는 라에비트 소령을 보며 체스는 한숨을 쉬었고, 시데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7군단 보병대장, 라에비트 소령, 군단장 각하와 대화를 요청합니다!”

“요청을 수락하네. 그래, 뭐가 말도 안된다고 했나?”

체스는 라에비트 소령의 대화내용이, 더 나아가 불만이 무엇일지 이미 짐작한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령은 다시 흥분했다.

“군단 급료 지급을 10개월간 연기하겠다는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10개월 후에 열 달치 월급을 한번에 다 지급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그 10개월치 봉급은 모두 군인연금으로 들어가, 자네들 제대하고 나면 연금으로 지급되겠지.”

체스의 말투는 담담했다. 눈은 감은 채였다.

“의회에서 결정한 사안이야. 장교들도 포함해서, 전 군에 해당되는 거네.”

라에비트 소령은 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을 한숨과 함께 떨구었다.

“각하.. 장병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틀 전에 제 3대대를 이끌고 기동훈련 나갔을 때 장병들 얘기 들어보니까 이건 좀 아니더군요. 많은 전우들이 두잔에서 죽었음에도, 언론에서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매달 지급받는 10타렌의 봉급마저 1년간 유보된다면, 정말 말이 아닐겁니다. 그리고 편성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대규모 전투를 치르고 ‘고참병’이 되어버린 녀석들은, 보충병들을 너무 굴리더군요. 전 병력의 3분의 1이나 되어버린 보충병들은 군단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훈장 몇 개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기로는 전투나 한번 제대로 치룰지 걱정입니다.”

군단 보병대장의 말은 체스가 이미 고민해 오던 문제였다. 애초에 체스와 시데르가 속해있던 저항제거여단 같은 특수부대는 극한의 상황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기에 사기가 전투 이외의 요인에 의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사기 자체가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야전군은 달랐다.

“사기를 고양시키고, 모두를 좀 위로할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네. 그 동안 자네도 어떻게든 장병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보게나.”

“저는 이미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라에비트 소령이 축 처진 어깨를 보이며 방 문을 닫았을 때, 시데르의 기분도 이미 머쓱해져 있었다.

“저도 이만 가봐야겠군요. 어차피 휴일이고 근무 교대까지 시간도 남았으니 잠이나 자렵니다.”

‘용무 끝’의 거수경례 후 방을 나서는 시데르에게 체스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왠만하면 신문은 자네 방에서 읽지그래? 뭐하러 내 집무실까지 와서 읽나?”

“제 방은 글 읽을 분위기가 아니어서 말입니다.”

시데르는 히죽 웃고 문을 닫았다. 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달력을 흘낏 보았다.

‘세지릴에게 휴가를 주는게 아니었어.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아직 1주일이나 남았군. 젠장.’


더위도 사그라들기 시작한 8월. 그들이 첫 전투를 용맹스럽게 치룬지도 한 달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트레비아 공화국 제 1 야전군 제 7 군단에 소속된 자들은 주둔지 프리디아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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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첫 전투였던 ‘두잔 전투’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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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시골마을.

SAT가 나흘 남았습니다.

그런데 소설이나 끄적였습니다?

몇달간 손 대지 않았던 소설을 이제야 이어 올립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야 고맙고...
안녕하십니까, 월광토끼입니다. 공상과학물에 관심이 있다보니까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