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든 미국이든 제대로 일하면서 살아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다.
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네트워크로 기회를 얻어야 실력을 보일 수 있다.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 평판으로 네트워크를 갖추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
   
2주 전 모 글로벌 기업 한국법인에서 전무로 계신 분을 만난 자리에서,
그 분이 제게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면서 말씀하신 요지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번 달부터 새로 네 번째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략 2000 년 대학원 시절부터 프로그래머로 일을 시작해서,
2015년 올 해까지 정식으로 입사한 직장이 세 곳이었고, 정확히 평균 5년씩 일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직장만 바꾼 것이 아니라 아예 직업 자체를 통채를 바꾸면서 일해왔기 때문에, 
이번에 네 번째로 새 직장을 갖게 되면서 최소한 직업을 바꾸지 않고 같은 일을 하게 된 것만 해도
과거 이직할 때의 충격과 부하에 비하자면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직장만 옮기는 게 아니라 아예 직업을 바꾸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직장을 구하러 다닐 때 생각보다는 그렇게까지 큰 어려움을 겪어 본 바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직 어리고 젊었기 때문에 채용하는 쪽에서도 그렇게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고,
또 새로운 직업에 도전한다고 해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 역시 즐기면서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터뷰에서 어필하면 항상 OK이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여름부터 새 직장을 물색하면서, 직장을 옮기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40 줄이 넘어선 나이에서부터 단박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간 일을 너무 고되게 해 왔기 때문에 조금 쉬고 싶어서 천천히 알아보기는 하였지만, 
Resume 단계에서 거절을 당하거나 인터뷰에서 낙방하는 것은 매우 낮선 경험이었습니다.
심지어 인터뷰가 아주 잘되어 면접관들이 모두 OK라고 했는데, 정작 저를 써야 할 팀의 팀장이  
"나이도 그렇고 학력도 그렇고 내가 데리고 쓰기에 너무 부담스럽다"고 하여 결과가 뒤집히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다녀 온 회사가 글로벌에서 큰 패착을 저지르며 망가져서 한국 법인도 다 박살났기 때문에,
제 위로 있었던 이사, 상무, 전무, 대표까지 보고 라인 전원이 이직하는 엑소더스가 벌어지는 판이었죠.
저는 올 해 집 두 채를 마련해 저희 가족과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친척 가족 모두 동시에 이사를 시켰고,
이 과정에서 그 동안 모아두었던 전재산을 몽땅 다 썼기 때문에... 반드시 좋은 직장을 잡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올해 2분기부터 대한민국 경제 지표는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고,
그 때문에 한국에 적을 두고 있는 거의 모든 기업들이 인력을 감축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사람을 뽑는 기업도 드물었고, 특히 경력직은 오직 추천만으로 - 사전 내정 형태로 뽑더군요. 
나이 40을 넘긴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더욱 까다롭게 보고, 잘 안뽑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 놓은 학위, 학교에서의 재직 경험 및 세계 최대의 글로벌 기업에서의 근무 경력.
50 건이 넘는 IT 시스템 및 PI 프로젝트 실적, 두 권의 저서 출간, 30 편의 논문 퍼블리싱 실적,
대략 Resume가 천하무적이라 해도 나이 40의 벽은 높았고 기업에서 바라보는 골은 깊었습니다.
짐 캐리가 주연한 <뻔뻔한 딕 & 제인>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가 되는 느낌이더군요.
무리하게 집 넓혀 이사 왔는데 강남 가는 지하철 새로 개통한다고 좋아라하고 있을 게 아니라,
잘못하면 흙구덩이에서 뒹굴면서 가족들을 고생시킬 것 같아 위기감에 머리가 쭈뼜했습니다. 
     
절박해지니까 용기가 났습니다.

용기를 내자 미친듯이 달려들 수 있었고, 네트워크를 풀가동했죠. 
이거 태평하게 있다가는 안되겠다 싶어서... 늦여름부터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뛰어다녔습니다.
컨설팅 업계 사람들, 학교 교수님들, 선후배 분들, 논문 같이 썼던 사람들을 모두 찾아다녔습니다.
서슴없이 아쉬운 소리를 하였고, 혹시 괜찮은 자리가 보이면 추천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일단 유력한 신뢰받는 사람이 추천을 하지 않으면 Resume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그런 든든한 사람의 추천이 반드시 존재해야만이 인터뷰 기회나마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한 두 달 지나자...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닌 보람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헤드헌팅 업체 몇 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지인의 추천이 들어가 인터뷰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결과가 좋더라도 기업들의 경영실적이 너무 나빠서 올해를 넘기게 되는 케이스가 꽤 있었고,
되도록 좋은 조건에서 오퍼를 받아 직장을 옮기기를 원하는 저의 입장 때문에 결렬되기도 했습니다.
늦가을부터 비로소 취업 시장에서 제가 주도권을 쥐고 직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죠.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당초 제가 이직을 생각하면서 기대했던 조건을 거의 충족하는 곳이었고,
천신만고 끝에 원하던 직장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고생은 심했지만, 다행히 결과는 좋았습니다.
     
이번에 대략 6개월 가까이 마음고생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다는 것을 새로 배우고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는 했기 때문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희망하였던 곳에 결국 원하는 조건으로 갈 수 있었던 키 포인트는,
체면 따위 죄다 내팽개치고 고개를 숙이며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은 내가 먼저 찾아가고 내가 먼저 아랫 자리를 자처하면서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다가설 때
거의 반드시 좋은 피드백이 돌아오는 그런 사회이기도 합니다 - 결국에는 그게 통했던 것이죠. 
      
언제 어느때나 허들은 높은 데,
미친듯이 달려 들면 어느새 그 허들을 넘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어차피 안정된 삶이 없는 정글에 내던져 진 인생은 그런 것이겠죠.
실력이 없으면 깡이라도 있어야 하고,
어려움이 예상 외로 크면 좌절하고 주저 앉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더 굳세게 먹고 용기를 내어 맞받아 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토록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각인할 수 있었던 뼈저린 6개월이었습니다. 
      
실은...
4년 전 남들이 보기에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왔던 것을 최근 1~2달 동안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과거 제가 있었던 곳도 엄청난 구조조정의 태풍으로 사람들이 죄다 날아갈 판이고, 
새로운 직장이 정해지니까 후회가 사라지면서 잘 판단한 것이라고 또 금새 마음이 바뀌더군요.

어차피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이렇게 처지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바뀌는 그런 것이겠죠.
하여간 이제는 대한민국 땅에 안정된 직장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어차피 어디든 정글이라면 적어도 제가 직접 사냥이라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