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전을 다시 보는 중입니다.
책은 물론 에니까지도.
이제와서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여러 기분이 들어요. 이전엔 지나쳤던 것이 다시 보인단 느낌이랄까요.
근데 이상하게 전체적인 것보다 부분적인 것에 눈이 갑니다.


프레데리카 그린힐: 좋아하는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군에 입대하고 기어이 그 남자가 있는 곳까지 간다니... 게다가 남편이 위기에 처하니 스스로 군복을 입고 무기를 꺼내듭니다! 우와. 참 시대를 앞서간 여성입니다--b. 요즘도 이런 여케는 찾아볼 수 없는데 말이죠.

뷰코크 부인: 등장은 짧지만 인상이 무척 강렬합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군인의 아내로 30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남편이 죽을걸 뻔히 알면서도 미리 제복을 챙겨주다니...

힐더가르트: 예전에 민간인인줄 알았더니 다시 보니 군인이었습니다. 그것도 톱클래스인 참모총감. 근데 왜 예전엔 이 여자가 전투원인줄 몰랐을까? 그땐 책을 참 날림으로 봤나 봅니다(먼산).

기함: 예전엔 교양이 일천해서 그냥 그런갑다~하고 넘겼는데 이제와 보니 각각의 기함은 지휘관의 성향에 아주 딱 어울립니다. 언제나 높은 이상을 추구한 양의 기함은 히페리온. 양이 걸어가고 연주한 길을 자신이 물려받아 번안곡을 내야했던 율리안의 기함은 율리시즈. 생의 최후까지 전투로 고별한 라인하르트의 기함은 브륜힐트. 사랑으로 인생이 꼬인 로이엔탈의 기함은 트리스탄. 다만 브라운슈바이크의 기함이 베를린인건 좀 악취미 같지만요(먼산)




대체적으로 여성 케릭터에게(전함도 여성으로 본다면) 눈길이 갑니다. 사실 그땐 남케에만 눈이가서 여케에 대해선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요.

그치만 남케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사람은 있네요. 양 웬리(이젠 얀이 아니라 양쪽이 더 친밀하게 느껴집니다)가 그런 쪽인데... 뭐랄지... 이사람, 무척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져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만(심지어 적에게도) 과연 행복했을까요.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죠. 자신을 인정받는 것이 남자의 행복이라는 건데... 이 점에 있어서 양은 그렇지 않거든요. 심지어 아내와 양자에게도 자신의 이상을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저 '양이 원하니 따른다' 정도일까...

온통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채로 느끼는 고독함이란... 제겐 상상조차 안되네요. 그런걸 겪어 봤어야 말이지--;




반면 과거엔 지나쳤던 단점이 이번엔 명확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먼저 지구교는... 딱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딴 것에 사람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단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사는지, 보다 나은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으며, 어떤 자세로 살라는 요구도 없으며, 초자연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으로도 명확한 비전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게 뭐야? 어이없단 점은 둘 다 같지만 차라리 FSM은 창조론자를 비웃는데 쓸모나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교는? 지구에 관광이라도 가면 좋은거라도 생긴답니까?


다음은 민주주의인데... 작품 내내 전제정치와 민주정치를 비교합니다만... 은영전에서 민주주의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전제정치에 대해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 나옵니다. 하지만 민주정치에 대해선 오직 나쁜 점밖에 안나옵니다. 이 부분이 제게 무척 큰 빡침을 안겨주는데, 보다 공정하게 하기 위해선 민주정치의 좋은 점도 이야기해야합니다. 아니,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은영전에서 민주정치의 좋은 점. 곧 인민들이 자주적으로 이룩한 업적이 있기나 하나요? 하다못해 인민들이 정부에 대한 감시를 더 엄격히했단 언급이라도 나오나요? 없어요. 은영전에서 인민들의 역할이란 그저 영웅들에게 끌려다니는 양떼와 다를바 없습니다. 작가가 민주정에 대한 악의라도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뭐랄까... 체제의 변화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지구교보다 더욱 어이가 없는 부분이 라인하르트에 대한 환호입니다. 동맹의 수도 하이네센에 라인하르트에 대한 칭송이 울려퍼지다니... 이건 대체 뭘까요?

앞뒤 잘라내고 우리나라를 일본이 정복해 서울에 일본군이 퍼레이드를 벌이고 천황이 행차했다칩시다.
여기서 '텐노 헤이카 반자이'라든지 '다이 닌뽄 데이고쿠 반자이'를 외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하물려 동맹과 제국은 150년이 넘도록 피를 피로 씻어왔습니다. '지크 카이저 라인하르트'라든지 '지크 노이에 라이히'같은 구호가 절대 울려퍼질리 없단 말이죠.

거기에 구 동맹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단 운동이 있단 부분은... 으음... 물론 반제국 인식이 강해 후반에 이런일 저런일 생기긴합니다만, 그걸 감안해도 무척이나 순진한 생각으로밖엔 안보입니다.

사실... 은영전을 보면서 은근히 느낀건데, 이 작가. '강한 사람에겐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따른다'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깔고 들어갑니다. 멀게는 루돌프 대제의 은하제국 성립에서 가깝게는 라인하르트 군벌결성과 양 패밀리 결성에까지요.

이 작가의 기본 마인드는 '사람은 체제가 아니라 사람을 따른다' -> '그 사람이 추종하는 체제를 다른 사람이 추종한다' -> '그러므로 충분한 힘이 있는 사람은 구 체제를 뒤엎고 그 사람만의 체제를 만들 수 있다'같습니다.

어느정돈 이해는 가지만(어디까지나 '이해만' 한단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정도되면 불쾌감이 듭니다.

거기에 은영전 특유의 '무능한 인민'까지 곁들여지면 '이 작가는 민주주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안들래야 안들수가 없어요...(먼산).



확실히... 예전에 봤던 시절과 비교해보니 참 많은게 다르게 느껴져서 놀랍습니다. 설마 은영전을 제가 스스로 나쁘게 평가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동시에 까면서도 정독하게 되는걸 보니 그래도 제가 은영전을 좋아하긴 하나 봅니다.



덤) 가끔 은영전 팬픽을 보는데... 은영전 소재의 개그. 아니면 자기투영 케릭터로 원작 가지고 놀기밖에 안보여서 참 답답합니다(특히나 에리히 발렌슈타인 시리즈... 양 웬리를 보고 '제국 귀족이나 하면 딱이겠다'라니!! 나의 양 웬리는 그렇지 않아!!ㅠㅠ).

제가 원하는 것은 양과 라인이 모두 생존해 있으며, 동시에 라인하르트 치세 3~5년후가 배경인 물건이거든요. 작품에서 양이 '이때쯤이면 라인에게도 빈틈이 생긴다'라고 말하며 은거하면서 구상한 대역전의 전략이 부딫히는걸 보고 싶은 거에요. 라인은 황제로서 절정의 힘을 지니고, 양은 양대로 이전까지의 모든 제약의 굴레를 벗어던진후 전력으로 맞서는 것 말이죠(살아생전 단 한번도 전력으로 싸운 적이 없는 양이니 기대가 안될 수 없거든요). 거기에 양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올바른 모습이 제대로 서는 모습까지 보여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구요.

누가 이런거 안써주나요? 아니, 아시는 분은 소개좀 해 주세요(굽신굽신)

[물고기군] 밤이면 언제나 아름다운 인생을 꿈꾼다. 사랑하고픈 사람과 별을 바라다 보고 싶을때 비오는날 우산들이 공허하게 스쳐갈 때 노래부르는 물고기가 되고 싶고 날개달려 하늘을 날고싶다. 아침의 차가운 바닥에서 눈을돌려 회색의 도시라도 사람의 모습을 느껴본다 부디 꿈이여 날 떠나지 마소서... [까마귀양] 고통은 해과 함께 서려가고 한은 갑갑하메 풀 길이 없네 꿈은 해와 함께 즈려가고 삶과 함께 흩어지네 나의 꿈이여 나의 미래여 나의 길을 밝혀 밤의 끝을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