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도 봐야 하는데, 흠, 찾아보니 예전에 쓰다 만 글이 있군요. 스포일러는 제일 아래 덧에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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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부터가 좀 뭔가 '없어' 보이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전에 예고편 보고 참 별 거 없어 보인다고 생각한 영화였더랩니다. 워낙에 유명한 클리셰를 인용한 엑스 마키나라는 제목부터 그렇죠. 다들 Deus ex Machina는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 건지 마키나만 떼어낸 데이어스 엑스라는 제목의 게임도 있지만, 세 단어 중 하나만 떼어내면 별로 말이 되지 않거든요.

 줄거리 역시 소개만 보자면 참 별 거 없어 보이는 영화입니다. 외딴 저택에 사는 어떤 천재가 예쁜 여자 로봇을 만든 다음에 한 평범한 남자를 데려와 튜링 테스트를 시킵니다. 이 인공지능이 얼마나 완벽한 것인지 테스트해보라고 말이죠.

 여기서 어떤 식의 이야기가 전개될까는 SF 물 좀 먹었다는 사람이라면, 아니 사실 물 좀 먹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눈에 뻔히 보일 수밖에 없어요. 예고편을 보면 영화 초반부가 좀 더 명확해지고 맥이 빠지게 되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을 거다 싶을 정도로 말예요. 아니, 진짜로 보지 마세요.

 헌데 개인적으로 놀랬던 건, 이 영화가 의외로 개봉하고 나자 평이 상당히 좋았다는 겁니다. 2015년 최고의 영화라고 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어요. 제 생각은 어땠냐고요, 흠...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긴 한데요...

 포스터가 돈 없어 보이는 것처럼, 특수효과가 좀 나오고 경치도 때깔도 좋게 나오기는 해도 별로 돈 들이지 않고 소수의 등장인물끼리, 좁은 세트에서 대화 위주로 전개하는 영화입니다. 그런 류의 영화 아시죠? 대화 내용이 어떤 것들일까는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했으니 물론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데도 이 좁은 스코프의 영화가 효과적인 건 물론 흔한 공식을 차용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치밀하게 잘 써먹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로서도, 배우들도 연기 굉장히 잘 하고 특수효과도 간단하지만 굉장히 그럴듯하고, 미묘한 연출들, 음악들, 장면 장면 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건 이 영화가 이런 류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왔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식의 이야기에서 흔히 나올 만한 질문이나 반전 요소들을 알아서 언급해줄 정도는 된다는 것이죠. 꽤 영리합니다. 튜링 테스트가 영화의 핵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 모르는 사람들을 항상 친절하게도 고려해주는 헐리웃 영화처럼 설명 잔뜩 붙여서 강조해대지는 않는다는 것(물론 일반 관객들이라면 여기서 좀 혼란스러워질 수는 있겠죠), AI 관련해서 기본적 철학을 잠깐 읊을 정도는 충분히 된다는 것이죠. (감독이 인공지능 학자들을 자문으로 써먹었습니다. 그리 깊게 들어가진 않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이야기에서는 정말로 인간과 다르게 사고하고 인간 같지 않은 지성체로서의 인공지능과 인간 같지 않은 외계인에 대한 장면을 ‘체험’해보고 싶긴 하지만...사실 인간으로서는 상상력의 한계가 있으니 그런 건 보기 쉽지 않은 게 당연한 거고, 적어도 영화에 나오는 인공지능들 중에서 따지자면 엑스 마키나의 인공지능은 뭔가 미묘하게 보기 불편하고 이질감이 느껴질 만한, 보고만 있어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꽤 괜찮은 편에 들기는 합니다. 여배우 연기 잘 해요.

 영화가 잘 나온 거야 당연히 감독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감독작으론 이 영화가 데뷔작이지만, 각본가로서는 28일 후와 선샤인과 드레드 3D라는 상당히 좋은 물건들을 써낸 경력이 있거든요. 직접 각본 쓰고 감독까지 해서인지 영화가 대사도 장면도 낭비가 없고 참 깔끔하게 느껴지는 게 참 좋았어요.

 생각해보면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던컨 존스의 더 문과도 많이 비슷한 느낌이 들긴 하는군요. 소재도 주제도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익숙한 공식의 솜씨 좋은 변주고, SF 데뷔작에, 감독이 대본도 썼고, 고립된 공간을 다루는 비교적 소규모 영화지만 결코 저렴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점에서 말입니다.
 
 아무튼 잘 만들었기는 하지만...많은 클리셰들을 영리하게 비껴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엑스 마키나의 한계는 거기에 있다 싶습니다. 그 소재가 여전히 고전적이고  익숙한 이야기라는 거죠. 우리는 그 공식을 너무나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이번의 변주 자체가 흥미롭기게 느끼기는 해도, 결국은 펼쳐진 무대에서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거 보자면 어떻게 끝날 수밖에 없는가의 가능성을 몇 개쯤 떠올리게 되고, 개중 하나가 정답이 됩니다. 사람 따라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긴 하겠지만, 저로서는 좀 무리수가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정말로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AI란 소재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던가, 결말에서 더 충격적이거나 예상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보여줬다면 좋았겠다 싶지만, 익숙한 공식을 갖고 그런 거 만드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긴 하죠. 그런 걸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아마 이 영화는 훨씬 더 유명해졌을 겁니다만,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다 싶습니다. 그래도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소품이고, 나름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는 하네요. 꽤 괜찮았어요.





 덧. 그러고보니 더 문의 던컨 존스는 워크래프트라는 대작 영화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요, 이 영화의 감독 알렉스 가랜드는 어나이얼레이션이라고 2014년 네뷸라상 수상작 SF 소설을 차기작으로 골랐더군요. 정체불명의 지역에 탐사대를 계속 보내봤는데 가자마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들 자살하고 서로 죽이고 아무 기억도 없이 자기 집에 돌아온 일주일 뒤 암으로 죽고 해도 계속 보내다 보니 소설에서 다루는 건 12번째...꽤 흥미로워 보이는군요.





 덧.


 스포일러.






 개인적으로 가장 큰 불만이었던 거라면야...제발 육체를 가진 AI를 만들면 긴급정지 리모콘 정도는 마련해 둡시다. 아니면 명령어도 좋고요, 자폭장치도 좋고, 특정 선을 넘어가면 전기 충격으로 전자뇌를 태워버리게 하던가, 뭐든 간에 말이죠. AI box 사고실험 같은 것처럼 초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인간보다 똑똑하니까’ 멍청한 인간들으로서는 완벽히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게 당연하고 따라서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대사를 하죠. 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 하잖아요?

 물론 영화에서 그에 대해 최소한도의 이유를 붙이지 않은 건 아니죠. 그거 만든 사람이 오만했기도 하고(오만함으로 저지른 실수가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 키카드라니...) 흔해빠진 SF 영화의 살인로봇처럼 아바가 엄청 힘이 세고 튼튼했던 것도 아니니까 말예요.  불필요하게 튼튼하고 빨라서 사람 잘 죽일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개인적으로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래도 단순한 실수라고 치고 넘어가기엔 뭐...뭔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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