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이 쓴 <백경>에는 피쿼드라는 포경선이 등장합니다. 소설 내용은 고래를 찾아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는 것이니, 사실상 피쿼드는 작중의 주요 배경입니다. 주인공 일행이 낸터킷 항구를 떠난 이후에는 사실상 바다 아니면 포경선이 배경이며, 다른 배경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항해 분량이 소설의 90%를 차지할 정도니까 <백경>의 무대는 무조건 피쿼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래서 간혹 일부 평론가들은 피쿼드가 허먼 멜빌이 꿈꾸었던 국가의 이상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니까 피쿼드는 그냥 포경선이 아니라 이상적인 국가의 축소판인 셈이죠. 선장은 대통령이고, 항해사는 각종 관리들이고, 선원들은 국민인 셈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멜빌이 바란 이상향은 수많은 인종과 사상과 종교가 뒤섞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쿼드에는 백인 기독교도만 탄 게 아니라 북미 원주민부터 남태평양 식인종까지 여러 인종이 탑승했거든요. 출신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고, 당연히 종교도 다릅니다. 기독교 독자가 보기에 <백경>은 이교도가 득실거리는 소설이죠.


작중 화자인 이스마엘은 그걸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비좁은 배에 온갖 종족과 이교도가 우글거리지만, 오히려 이스마엘은 이를 긍정하는 편입니다. 애초에 여인숙에 머물 때부터 그랬죠. 이스마엘은 기독교를 믿는 미국 백인이지만, 사실 신앙이 그리 깊지 않고, 제일 친한 친구는 작살잡이 퀴퀘그입니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이 퀴퀘그는 사실 태평양 어딘가의 식인종이며, 조그마한 우상을 섬깁니다. 포경선주들은 퀴퀘그가 식인종, 이교도, 야만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채용을 거부하죠. 하지만 이스마엘은 식인종이든 이교도든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합니다. 모두가 함께 손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설득하며, 결국 퀴퀘크는 피쿼드의 작살잡이로 승선해요. 피쿼드에는 퀴퀘그 말고도 별별 인종과 신앙이 가득한데, 도대체 포경선주가 어떻게 승선을 허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마엘은 나중에도 세계인이 화합해야 한다는 주제를 전달하는데, 고래 지방을 짜낼 때가 그렇습니다. 선원들이 직접 지방을 쥐어짜다가 다른 선원의 손을 잡는데, 이스마엘은 이를 세계의 화합으로 비유해요.


저런 주제와 장면 때문에 평론가들은 <백경>이 백인 우월주의와 기독교 우월주의를 타파한다고 평가합니다. 확실히 별별 인종들이 모두 모인 피쿼드는 인종 시장이라는 미국의 축소판 혹은 세상 전체의 축소판 같습니다. 작중에서도 어떤 노인네가 세상은 돌고 도는 원이라며, 특정한 중심이 없다고 떠들죠. 하지만 피쿼드를 마냥 이상 사회로 보기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일단 선장과 항해사는 모조리 백인이라는 겁니다. (그나마 선장과 항해사 일부는 기독교도가 아닙니다.) 제아무리 다수의 인종이 섞였어도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선장, 항해사는 백인이에요. 에이허브만 해도 그렇고, 스타벅, 스텁, 플라스크도 그렇죠. 그나마 작살잡이들은 폴리네시아인, 북미 원주민, 아프리카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살잡이가 지위상 고급 선원이라고 해도 막상 업무는 항해사와 달리 매우 거칠거든요. 선원들의 인종과 종교가 어떻든 피쿼드라는 사회를 좌우하는 인물들은 모두 백인이죠. 이거야 멜빌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낸터킷 항구에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지휘하는 포경선은 없었을 테니까 잘못 설정하면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아울러 피쿼드에는 여자가 안 보입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주방에 요리사 아주머니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퀴퀘그가 바다에 빠졌을 때, 몸을 데우라고 생강차를 줬거든요. 하지만 그 장면을 제외하면 항해 내내 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백경> 자체가 여성을 등한시하는 건 아닙니다. 이스마엘이 항구에 머물 때, 거친 남성 선원도 함부로 내쫓는 여관 아주머니가 나왔으니까요. 이 여자 주인장은 고래잡이들조차 마구잡이로 대할 정도로 털털한데, 검마 판타지의 노련한 여관 주인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멜빌 본인은 어느 정도 여성 차별이 심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에서까지 남자들만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피쿼드에 여자가 없는 건 워낙 배에는 여자를 안 태누는 관습 탓이겠죠. 예전에는 배에 여자를 태우면 망한다는 미신도 강했고, 더군다나 포경선처럼 험하고 궂은 작업에는 여자가 끼어들기 힘드니까요. 어디까지나 시대의 반영일 뿐이죠. 하지만 인종과 종교와 사상을 초월한다는 피쿼드에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건 좀 아쉬운 설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인종과 국경과 종교 때문에 시끌시끌합니다. 얼마 전에도 가슴 아픈 비극이 벌어졌죠. 아니, 우리가 보지 않을 뿐 그런 비극은 매일처럼 벌어지죠.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가 괜히 생각나서,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서>가 개봉했다고 해서 겸사겸사 이야기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