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그래비티>가 7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감독상을 비롯해서 촬영상, 시각효과상, 음향상 등을 수상했죠. 아쉽게도 작품상은 후보에만 그쳤는데, 이를 두고 해당 작품을 비난하기도 하더군요. 수상 내역이 대개 기술 쪽에 몰린 터라 ‘기술적으로 우수하지만 이야기나 연출은 실속 없는 영화라고 하나 봅니다. 하지만 이는 미인 배우가 연기 못한다는 속설이랑 비슷한 과소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극장 화면으로 안 보면 감성이 떨어질 정도로 기술이 중요하긴 한데, 그걸 작품으로 녹여내는 실력은 돈만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예상 가능한 플롯이라도 거기에서 극한을 뽑아내는 솜씨는 거장이라 할만 하죠. 다른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알폰소 쿠아론의 연출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줄거리가 간단해서 취향에 안 맞는다고 하면 몰라도 그저 3D 효과만 노린 실험작으로 치부하기는 아까운 영화입니다.



비단 이번만 그런 게 아니라 개봉 당시에도 그런 목소리가 있었죠. 내용 누설이라고 할 것도 없이 줄거리가 간결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라이언 스톤이 우주에서 고립되어 표류하는 게 전부니까요. 너무 뻔하다는 비판부터 생각 없이 제작비만 부어서 만들었다거나 아예 스토리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는 평가 기준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창작물이 꼭 복잡한 구성과 치밀한 전개를 포함해야 할까요. 때로는 단순함 속에서 묵직함을 담아내는 작품도 있는 법이고, <그래비티>는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라이언 스톤의 불안감을 극대화시키려고 일부러 단순함을 추구했죠. 만약 여기에 괜히 인물 갈등이나 모호한 암시를 집어넣으면 오히려 몰입감이 떨어졌을 겁니다. 더군다나 SF 장르, 특히 하드 SF 계열은 아이디어나 디테일을 부각시키기 위해 캐릭터와 플롯을 의도적으로 평범하게 깔아놓기도 하고요.



사실 <그래비티>가 작품상을 못 받은 건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감독상과 작품상을 별개로 주는 경우는 예전에도 있었고, SF 영화에 큼지막한 상 안 주기로도 유명하니까요. 솔직히 감독상이라도 받은 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음, 따지고 보면 본격적인 SF 장르로는 작품상이든 감독상이든 처음 아닌가요. 이쪽 업계에서 수작으로 손꼽히는 <블레이드 러너>나 <2001 우주대장정>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니까요. 예전에 <이티>가 할 뻔했지만, 아쉽게도 후보에 그쳤고요. 루카스 옹도 <스타워즈>로 올라간 전적이 있는데, 스페이스 오페라에 수상을 바란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아폴로 13>도 후보에 올라간 적 있는데, 우주 탐험물일 뿐 SF 장르는 아니죠. 최근에는 <아바타>가 있긴 한데, 이건 정말 시각효과 쪽으로만 치중한지라 수상 못 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디스트릭트 9>는 참 좋았는데, 대중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매니악한 구석이 많아서 탈이었고요. 게다가 아카데미 성격상 시대극이나 위인전 등을 높게 쳐주는 경향이 강하니까요. 아마 향후에도 이런 사례가 별로 안 나올 정도로 예외가 아닌가 싶습니다. (흠,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 관련한 SF 영화들만 모아봐도 재미날 것 같군요.)



어쨌든 <그래비티>가 참 대단하긴 하네요. 그토록 오래 기다려서 만든 작품이라는데, 엄청난 흥행과 비평으로 열매를 땄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전작인 <칠드런 오브 맨>을 더 좋아하는지라 이 참에 이것도 재평가를 받고 재개봉 흥행을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