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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스틸러 무리와 대치하는 터미네이터 중화기 사수.]



<워해머 40K>는 미니어쳐 전쟁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프랜차이즈가 으레 그렇듯, 다른 형식의 게임들도 있죠. 롤플레잉이나 보드 게임처럼요. <스페이스 헐크>도 바로 그런 종류 중 하나입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제목이기도 한 스페이스 헐크는 거대 우주 유령선입니다. 하지만 옛 기술이나 유물이 남았기에 인류 제국은 이를 조사하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최정예 스페이스 마린, 그 중에서도 터미네이터 분대를 투입합니다. 그런데 이게 겉보기처럼 빈 우주선이 아니었습니다. 안에는 치명적인 외계 괴물 타이라니드가 득실거립니다. 터미네이터 분대는 우주 유령선을 헤매며, 끝도 없이 밀려오는 진스틸러들을 격퇴하고, 임무를 달성해야만 합니다. 줄거리에서 딱 감이 오겠지만, 플레이어 두 명이 각각 공격과 방어를 맡아 싸우는 방식입니다. 터미네이터 측은 소수 정예라서 방어 위주이며, 진스틸러 측은 끊임없는 물량 공세라서 공격 위주입니다.


내용 자체야 우주선에서 벌어지는 인류와 괴물간의 전형적인 싸움입니다. 허나 양측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격이 가능한 소수 정예와 무조건 돌격하는 괴물의 인해전술이죠. 덕분에 전술이 상당히 균형 잡혔고, 여러 모로 머리 굴리는 재미가 충만합니다. 목표가 무조건 상대방 절멸인 진스틸러 측은 이런 재미가 살짝 떨어지는 편입니다만. 터미네이터 측은 극히 불리한 조건으로 어려운 임무를 수행합니다. 시작부터 중후반까지 내내 긴장을 놓칠 틈이 없어요. 우주선이 좁다는 특징 때문에 적재적소에 분대원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각이 생기지 않도록 시야 확보도 필수적이죠. 병과와 무장을 고려하여 진행 상태를 결정하고, 몇 수 앞의 동선을 내다봐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스틸러 측이 무조건 시시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좁은 통로를 가로막고 우주 방어를 펼치는 스페이스 마린에게 돌격하고, 돌격하고, 끝까지 몰아쳐서 깨버리는 쾌감도 상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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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스페이스 헐크> 보드 게임.]



풀 컨트롤 스튜디오에서 만든 <스페이스 헐크>는 이 보드게임을 바탕으로 한 비디오 게임입니다. 게임 규칙이나 분대 구성, 우주선 구조, 임무 등은 원작을 그대로 본떴습니다. 특히 2009년에 나온 리메이크판이 기준인 것 같네요. 제가 원작 게임을 해본 적이 없어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듯합니다. 터미네이터 미니어쳐 모양까지 똑같거든요. 공식 도색과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어차피 색칠이야 유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겠죠. 파워 피스트나 장식 색깔이 다른 정도니까요. 다만, 비디오 게임이란 특징상 싱글 캠페인 진행은 무조건 인류 진영입니다. 스페이스 마린은 워낙 세심한 전술이 필요한 데다가 타이라니드는 어차피 단순무식 돌격 위주니까요. 멀티플레이 대전에서는 보드게임처럼 각각 인류 제국와 타이라니드로 나누어 싸울 수 있고요. 그리고 DLC로 오리지널 임무 외에 추가 임무를 따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원작을 그대로 이식했다는 건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원작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대신 매체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죠. 그 때문에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헐크>는 꽤 애매한 평가를 받습니다. 일단 원작이 재미있기에 이식판도 기본적인 재미는 충실합니다. 시시각각 밀려오는 진스틸러, 구석에 몰린 터미네이터 분대, 예기치 못한 통로에서의 조우, 생사를 가르는 주사위 한방까지…. 화망을 형성해 서로를 지켜주는 작전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홀로 좁은 통로를 지키며 적들을 쓸어버리는 중화기 사수는 그렇게 든든할 수 없습니다. 방패와 망치로 길을 뚫는 분대장은 카리스마가 흘러 넘치고, 각종 초능력으로 상황을 역전시키는 사서 활용도 쏠쏠하죠. 코앞까지 들이닥친 진스틸러를 남겨두고 탈출구에 이르면 기분이 아주 짜릿합니다. 인공지능이 딸려서 사람과 대전할 때만큼 전술적이지 않습니다만. 원작의 긴장감과 분위기를 그럴 듯하게 재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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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빨간색 표시가 전부 진스틸러. 그야말로 물량공세입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헐크>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원작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것 빼고, 자기만의 특징이 없어요. 보드 게임을 비디오 게임으로 이식하면 사람들은 으레 추가 요인을 기대합니다. 화려한 그래픽이나 역동적인 동영상, 더 방대해진 설정, 실시간 조작, 오리지널 캐릭터나 이야기 등등. 하지만 <스페이스 헐크>는 그런 게 없어요. 우주선을 루티드하려는 오크 분대가 카오스랑 싸운다거나, 새로운 캐릭터를 집어넣어 장대한 서사시를 그린다거나, 카니펙스나 트라이곤이 괴수물을 찍는다거나… 이런 거 일절 없습니다. 그러니 보드 게임이 있는데, 굳이 뭐 하러 비디오 게임을 하느냐는 말도 나오나 봐요. 보드 게임은 미니어쳐라도 가져다 쓸 수 있지, 비디오 게임은 그것도 안 되니, 원. 게다가 볼륨이 꽤 빈약합니다. 달랑 미션 몇 개가 전부이니…. 볼륨만 좀 풍성했어도 훨씬 만족스러웠을 텐데. 진행이 은근히 느린 데다가 자잘한 인터페이스가 불편하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컨셉부터 시스템 구현, 설정, 기타 부분까지 솔직히 대작이 되기에 한참 모자랍니다. 거창하게 기대했다가 필시 실망할 공산이 크죠.



비디오 게임도 나름대로 이점은 있습니다. 보드 게임은 대전 상대가 있어야만 플레이 가능하죠. 그러나 비디오 게임은 언제든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즐길 수 있습니다. 게임 하려고 크고 아름다운 패키지를 끙끙거리며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보드게임 패키지가 여간 무겁고 큰 게 아니라서요. 더욱이 모바일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합니다. 보드게임이 수입품인 데다가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꽤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은 스팀 세일을 노리면 단돈 몇 만 원에 구할 수 있어요. <스페이스 헐크>가 하고 싶은데, 저런 점들이 부담스럽다면 비디오 게임은 적절한 선택입니다. 물론 렐릭의 <던 오브 워>를 기대한 유저에게는 실망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헐크>는 원래부터 소규모 보드게임인 데다가 풀 컨트롤도 거대 제작사는 아니거든요. 원작 분위기 재현을 노렸다면,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입니다.



<스페이스 헐크> 비디오 게임은 나쁘지 않습니다. 좁디 좁은 우주선에서 벌어지는 혈투를 잘 그려냈어요. 애초에 원작도 대규모가 아니었고, 제작 의도도 분대 전투에 치중하려는 기색이 엿보이고요. 추가 요소 없이 너무 원작 이식에만 치중한 게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만.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워해머 40K>의 명성이 너무 대단하다는 점이죠. 워해머 게임이 새로 나오길래 잔뜩 기대했더니만, 터미네이터와 진스틸러의 소규모 대전이라니. 실망한 유저가 상당수일 겁니다. 음, 어쩌면 <스페이스 헐크>는 필요 이상으로 혹평을 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드게임을 가지고 <던 오브 워>처럼 큼지막한 실시간 전략을 만들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