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드 인베이젼>을 보고 난 소감입니다.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내용 누설이랄 것도 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만요. 이하 <배틀: LA>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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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LA 공습을 모티브로 만든 포스터. 본편 내용이랑은 전혀 관계 없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하루에서 유성우가 전지구적으로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유성이라고 생각했으나 곧이어 이것이 인공물임이 밝혀집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외계 침략자들이었고, 전세계는 제대로 반격할 틈도 없이 삽시간에 쑥대밭으로 변합니다. 세계 주요 도시가 손도 못 쓰고 폐허로 변한 거죠. 영화의 주요 배경인 로스 앤젤레스도 마찬가지. 군은 이곳을 폭격해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계획을 세웁니다만, 문제는 도시 안에 아직 민간인이 남아있다는 거죠. 그래서 신참 소대장 마르티네즈 소위, 전역할 예정이었던 낸츠 하사, 그리고 휘하의 해병대원들을 꾸려서 시민을 구해오라고 보냅니다. 해병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미지의 적과 싸우고 시민을 구하기 위해 전선으로 뛰어들고요.

 

대략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는 기존의 외계인 침략물과는 시점이 좀 다릅니다. 일단, 최고 지도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물론이거니와 국방장관이나 주지사, 시장, 경찰서장, 특수부서의 부서장, 직위가 높은 과학자 등 뭔가 거대한 재난을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법한 사람이 없어요. 영화에 나오는 가장 높은 책임자라고 해 봤자 마르티네즈 소위가 고작이고, 신임 장교답게 자기 부하들 챙기는 것만 해도 바쁩니다. 그래서 자연히 갈등의 폭이 좁아집니다. 전 인류의 생존이나 미국의 위기 극복 등 외계인 침략물이라면 당연히 내세워야 할 주제가 빠졌어요. 낸츠 하사를 비롯한 해병대는 적이 어떤 존재인지 연달아 되묻지만, 거기에 대답해줄 사람도 없고 해답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가끔 듣는 뉴스를 통해 단편적인 실마리만 추측할 뿐이죠.

 

이와 맞물려 외계의 공격을 받고 지구가 패배하는 과정 역시 어물쩍 넘어갑니다. 시도 때도 없이 뉴스를 통해서 전 세계가 위기고, 인류가 벼랑 끝에 섰다는 걸 전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재난이 일어나는 걸 전지적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과 좁다란 TV 화면으로 보는 것은 느낌이 훨씬 다르죠. 영화는 철저하게 해병대원들을 따라가기 때문에 전지적 시점을 취할 새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시종일관 뉴스 보도만 틀어줍니다. 게다가 이미 해병대가 로스 앤젤레스 시가지에 도착했을 때는 전투가 끝나 폐허가 된 뒤였습니다. 도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죄다 스킵하고 결과만 보게 된 거죠. 그래서 설정은 스케일이 큰데, 정작 볼거리는 작아졌습니다. 외계 항공기가 건물을 폭격한다거나 도시가 레이저 한 방에 날아간다거나 하는 광경도 없습니다. 그나마 적 항공기와 지상군이 도시를 순찰하는 모습을 줄곧 보여주기는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소규모 부대라서 그리 대단한 볼거리를 선사하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전쟁이 일어났다는 걸 보여주는 병풍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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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폭격 장면은 이렇게 뉴스로만 처리합니다. 사실 대규모 전투는 아예 안 나와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지와의 조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구에 난생처음 외계 세력이 나타났건만, 이를 두고 감격하거나 흥분하는 인물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저 정체 모를 상대가 공격했다는 것에 당황하는 걸로 그칩니다. 마침내 첫 교전이 이루어진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계인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음에도 그걸 인지하는 해병대는 없습니다.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사상 최초로 외계인을 봤으면 뭔가 격한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해병대의 반응은 적군을 목전에 둔 평범한 군인이랑 다를 게 없습니다. 이미 전장 한복판에 들어왔기 때문에 다른 문명과의 접촉을 따지기보다 자기 목숨 챙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미지와의 조우를 제대로 그리려면 전쟁터 바깥에서 지켜볼 수 있을만한 책임자가 나와야 하는데, 이미 말했다시피 그런 인물이 안 나옵니다. 나중에 구출하게 되는 민간인들 역시 시야가 좁은 건 똑같고요.

 

결국 이 영화는 외계 침략물이라고 하기엔 필수 요소가 많이 부족합니다. 외계의 거대 세력이 침공하는 과정은 쏙 빠졌고, 인류와 다른 문명이 만나는 순간도 없으며, 이만큼 중차대한 사태를 고심할 책임자도 안 나옵니다. 기존의 침략 장르에 비교하자면, 영화의 내면과 외면, 즉 주제와 볼거리 양면에서 엑기스가 빠졌다는 거죠. 만약 화끈하게 때려부수는 걸 기대한 관객이라면 분명히 실망할 겁니다. 해병대가 목격한 가장 큰 외계 건조물이라고 해 봤자 겨우 건물 한 채 크기도 안 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볼거리 부족을 이 영화의 단점으로 몰아세울 수도 없습니다. 이런 좁은 시야는 분명히 의도적이니까요. 그러면 이런 필수적인 요소를 버리면서까지 <배틀: LA>가 노렸던 건 뭘까요.

 

감독인 조나단 리브스만은 영화 관련 인터뷰에서 외계인이 침공하는 전쟁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외계인이 아니라 전쟁영화입니다. 즉, 출발선을 끊은 <블랙 호크 다운>부터 가장 최근의 <허트 로커>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제너레이션 킬> 같은 TV 시리즈의 스타일을 따르겠다는 뜻이죠. 이런 작품들은 전장을 지휘관의 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소대나 분대 단위로 쪼개서 세밀하게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그래서 전반적인 정치/전쟁 상황은 몰라도 현장에서 실제 전투원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는 자세하게 묘사가 가능하죠. 그 때문일까요. 낸츠 하사는 이전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지에 파견된 경력이 있고, 상영시간 내내 그 일을 회상합니다. 낸츠 하사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그 지휘를 받는 해병 부하들 입장에서도 외계 침공은 해외 파병의 연장선입니다. 로스 앤젤레스가 자국이면 뭘 하나요. 어차피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적에게 둘러싸였는데, 미군 입장에선 아프가니스탄이랑 다를 거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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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큰 영향을 받았을 <블랙 호크 다운>. 적진에 고립되어 무사 귀환한다는 플롯이 비슷합니다.]

 

감독의 말마따나 이 작품은 해병대의 등 뒤를 항상 따라다니며 소대 지상전투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관찰합니다. 카메라는 해병대의 구보에 발맞춰 정신 없이 흔들리며 현장감을 더합니다. 무너진 건물 더미 사이에서 총탄과 폭발물이 갑작스레 날아옵니다. 소대원은 쉴 새 없이 무전기를 이용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연계해 작전을 구사합니다. 좁은 공간에서 사각을 보완하는 택티컬한 연출도 빼먹지 않고요. 다들 장비도 좋아서 스코프 정도는 기본으로 달고 다닙니다. 해병대들은 적진을 살피려고 쌍안경을 꺼내는 구태의연한 행동 따위 안 합니다. 야간 투시경도 기본 장비인데요, 뭘. 특히, 연기를 피워 올리며 탄피가 슬로모션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어디서 많이 봤다 싶더군요. 넵, <블랙 호크 다운>이나 <허트 로커>에서 인상적으로 나온 그 장면이죠. 외계인 침략물에서 그거랑 똑같은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을 공중 지원(더 정확히는 미사일 공격)으로 마무리한다는 것도 똑같군요. 뭐, 지상 전투원이 공군!을 외치는 건 2차 대전과 베트남전도 다르진 않지만.

 

반면, 현재 미군의 적들이 그렇듯 영화의 적들도 특별한 기술이나 장비를 이용하기보다 몸으로 때우는 편입니다. 요즘 전쟁영화는 장비가 뛰어난 소수의 미군 vs. 장비는 허접해도 숫자가 압도적인 적군의 구도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양상을 이룹니다. 외계인들은 뛰어난 전술과 월등한 무기로 싸우기보다 그저 빵빵한 내구력과 줄지도 않는 숫자만 믿고 돌격하는 편이죠. 가끔씩 무인 전투기라든가 다연장 로켓처럼 그럴싸한 무기도 나오긴 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외계인이니까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전술과 장비 면에 있어서는 미 해병의 압승입니다. 아마 외계인이 너무 형편없이 두들겨 맞아서 불만인 관객도 있을 것 같지만, 이 영화의 외계인은 다른 침략물에 나오는 외계인들과 상징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들의 역할은 압도적인 숫자로 밀고 들어가 미군 몇 명만을 죽인 다음 반격당해 털리는 겁니다. <블랙 호크 다운>의 소말리아 민병대나 <태양의 눈물>의 나이지리아 반군이 어떻게 싸웠는가 기억해 보세요.

 

사실 이 영화의 외계인은 침략자라고 하기 어색합니다. 지구에 쳐들어왔으니 침략자가 맞긴 한데, 하는 행동은 민병대나 저항군에 더 가까워요. 소총탄 맞고 부상당한 동료를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은 오히려 외계인이 불쌍할 정도.

 

어쩌면 지상 전투원 위주의 SF 영화라는 점 때문에 <에일리언 2>나 <프레데터>를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겁니다. 이런 작품들도 구도 자체는 <배틀: LA>와 비슷하죠. 하지만 저 두 영화는 외계 괴물과 싸운다는 설정에 더 충실합니다. 에일리언 시리즈는 미지와의 조우를 주제로 다루고, 그건 전쟁물인 2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떼처럼 몰려오는 외계 괴물의 영상화는 이 영화가 원조죠. <프레데터>는 작중 내내 괴물의 시점까지 보여주면서 이 외계 사냥꾼이 지구인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강조합니다. 그리고 프레데터만 따로 보여주면서 이 외계인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알려주기도 하죠. 그러나 <배틀: LA>는 SF라는 장르가 무색할 정도로 외계인을 소홀히 대합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겁니다. 아마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 외계인도 드물 거예요. 하다못해 게임 <커맨드 앤 컨쿼>에 나온 바보 외계인 스크린도 이보다는 나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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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세세한 설정도 있습니다만. 본편에서는 그저 털리는 존재일 뿐.]

 

요즘엔 바이럴 마케팅이 활성화되어서 가짜 블로그나 웹사이트 만드는 건 흔한 일이죠. 하다못해 TV 시리즈까지 가짜 블로그를 만들어서 광고하곤 하잖아요. 이 영화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외계인에 관해 분석한 웹사이트도 있긴 해요. 하지만 열렬 팬이 아니고서야 누가 거기까지 신경 쓰겠습니까. 영화가 재미있어야 가상으로 만들어둔 웹 사이트도 효과가 있는 거죠. 외계인이 하도 김 빠지게 나오니까 따로 웹 사이트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안 듭니다.

 

대신에 이 영화는 소대 규모의 전투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좋은 눈요기가 됩니다. 저는 밀리터리 지식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고증에 정성을 들인 것 같네요. 설사 고증이 엉망이라 하더라도 저 같은 까막눈에는 꽤 멋있게 보였습니다. 하나같이 군장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 것도 그렇고, 분대별로 일사분란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액세서리 잔뜩 장착한 개인화기도 그렇고 부대전술과 군장에 관심이 있다면 즐거운 상영시간이 될 듯하네요. 만일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 이러한 스타일이 유행하게 될 거란 추측도 해봅니다. 사실 그간 외계인과 싸웠던 지상 전투원치고 이 정도로 군장이 충실한 부대도 없었잖아요. 미래병사니 뭐니 해도 헬멧에다 방탄복, 소총 하나 든 게 고작이었죠. 만에 하나, 이 영화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런 스타일만큼은 지속되기를 바랄 정도입니다. 그만큼 디테일이 괜찮아요. (그 디테일만큼이나 고증이 잘 되었는지야 모르지만.)

 

여기서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게임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솔직히 극장에서 내내 두 가지 게임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모던 워페어 2>와 <월드 인 컨플릭트>입니다. 두 게임 모두 지상 전투원이 주인공이며, 침략을 받은 자국(미국 본토)에서 싸우고, 지상 전투원이 포격이나 공습을 지원해 적을 쳐부수죠. 그리고 배경설정은 엄청나게 크지만, 알고 보면 게임 내용은 소대 규모라는 것도 똑같습니다. <월드 인 컨플릭트>는 테크노 스릴러고, <배틀: LA>는 SF라는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인 색깔은 꽤 비슷해요. <월드 인 컨플릭트>가 모드를 다양하게 지원만 했어도 로스 앤젤레스 컨플릭트 모드를 만드는 양덕후가 나왔을 걸요. 아마 이 영화가 게임으로 나온다면 저 두 게임의 분위기를 따라갈 것 같습니다. 오히려 외계인이 나오는데도 <크라이시스>나 <기어즈 오브 워> 등과는 차이가 나고요.

 

, 명작인 <월드 인 컨플릭트>와 범작인 <배틀: LA>를 비교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구조가 비슷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 영화가 저 게임만큼 대단하다거나 장르 쪽의 획을 긋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음, 설마 오해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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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게임 하셨다면 느낌이 딱 올 겁니다. 광고부터 본편 내용까지 전부 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쟁물로서 외계인 침공을 혁신적으로 그려냈는가 하면. 글쎄요, 아주 미묘합니다. 전체적인 진행이 너무 평범하거든요.

 

가장 큰 문제는 <배틀: LA>가 전쟁물치고 꽤나 얌전하다는 겁니다. 요즘 전쟁물은 고어적이거나 아니면 그에 준해야 합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피범벅이 되는 건 기본입니다. 포탄에 맞아 팔다리가 잘려나가는가 하면, 머리가 터지거나 내장이 기어 나오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에너미 앳 더 게이트> 같은 2차 대전물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병사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걸 보며 긴장하고, 전쟁터의 살벌함을 간접 체험하죠. 그런데 이 영화는 피 한 방울 안 나옵니다. 아니, 피가 나오긴 나오는데 별로 끔찍하지 않아요. 부상을 입어봤자 다리를 절거나 옷가지에 피가 스미는 게 전부일 뿐 몸이 절단되거나 터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긴장감이 별로 고조되지 않아요. 잔인한 장면이 반드시 스릴을 보장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2000년대 전쟁영화의 표준을 따라가려면, 고어한 연출 역시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방에 총탄이 날아다니면 뭘 하나요. 그거 맞고 별로 다치는 사람도 없는데요. 그래서 전쟁영화가 아니라 액션영화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액션이었던 거죠.

 

영화의 주제의식이 희미한 것도 문제입니다. <배틀: LA>는 결국 한 해병소대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역을 앞둔 분대장 그리고 그 분대장과 갈등하던 부하들이 화해하고 다시 뭉치는 눈물겨운 인간극장입니다. 여기에다 가족애도 좀 추가하고, 남녀간의 애정도 좀 섞고, 군인다운 전우애도 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입니다. 해병대원들이 화합을 다지는 그 이상의 갈등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냥 싸움이 아닙니다. 전쟁은 정치의 폭력적인 연장선입니다. 작금의 전쟁영화들은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잔혹함을 통해서 결국 전쟁이란 거지발싸개 같은 거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거지발싸개 같은 전쟁터에 병사들을 몰아넣는 부조리한 정치상황을 조명하죠. 하지만 이 영화에는 저런 고민이 하나도 없어요. 차라리 전쟁이 아니라 가족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분대장은 아버지고, 부하들은 자식인 셈이죠. 그 가족이 뭉치는 것만으로 모든 난관이 해결되고요.

 

물론 <배틀: LA>는 외계인이 적이니까 정치 이야기를 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처참함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킬링 필드에 가까운 시민 학살을 묘사하거나 가볍게 목숨이 날아가는 병사를 언급하는 식으로 전쟁이 나쁘다는 걸 말했어야 했어요. 결국 모든 전쟁물은 그런 쪽으로 결말이 나니까요. 하지만 <배틀: LA>는 해병대 가족이 화해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기에 전쟁까지 살펴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외계인에 관해 제대로 묘사하는가 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전쟁물과 외계물의 두 가지 형식을 따라가긴 했지만, 그 둘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붙잡은 게 없습니다. 전쟁물이라고 하기엔 전쟁의 부조리함을 외면했고, 외계물이라고 하기엔 외계인을 너무 푸대접했습니다. 그러니 영화가 어중간하게 보일 수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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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보자면 꽤 암울하지만, 실제 내용은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볼거리는 볼거리대로 심심하고, 주제는 주제대로 깊지가 않고. 그래서 영화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아무 탈 없이 흘러가기만 합니다. 저만 그렇게 보인 건지 몰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간신히 귀환한 낸츠 하사가 장비를 챙기는 장면 있잖아요. 그게 <블랙 호크 다운>에서 후트 상사가 간신히 귀환해 곧장 장비를 챙기는 것과 겹쳐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두 영화는 그 이후의 장면이 서로 다릅니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는 죽어간 이를 기리며 회한에 젖죠. 하지만 <배틀: LA>에서는 용감무쌍하게 적진으로 돌아갑니다. 글쎄요, 아직 외계인과의 싸움에서 이긴 게 아니니까 적진으로 돌아가긴 해야죠. 하지만 너무나도 위풍당당하게 돌아가더군요. 죽을 고생을 하며 먼 길을 헤쳐온 사람들 같지가 않았어요. 사실 전쟁이란 게 엄청나게 암울한 사건인데, 이 해병대에겐 암울의 암자도 안 보인다고 할까요.

 

, 예고편을 그대로 믿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지만, The Suns Gone Dim.처럼 정말 암울한 전개가 될 줄 알았거든요. 해병대가 절벽 끝으로 밀려서 헤어나오지 못할 줄 알았어요. 예고편에 나온 음악과 본편 분위기가 어찌 이리 정반대인지. 이 소감을 쓰는 지금도 저 음악을 듣는 중인데, 영화 내용이랑 정반대라서 그런지 음악이 더 암울하게 느껴지네요. 선곡을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정말 잘했습니다. 영화가 못 따라간 게 아쉬울 뿐.

 

그나마 다행히도 이 영화는 때깔이 아주 잘 나왔습니다. 앞서 말한 군장이나 전술적인 연출도 그렇거니와 시각효과가 꽤 볼만 해요. 어차피 대규모 전투는 죄다 뉴스 화면에서만 나오고, 해병대원들은 소규모 국지전만 치르니까 시각효과를 쓸 데도 없지만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감독이 편집을 아주 그럴 듯하게 했습니다. 버릴 때와 집중할 때를 명확하게 잡아냈어요. 그래서 언뜻 보면, 그러니까 언뜻 보면 제작비 왕창 들어간 대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외계 지상군이든 항공기든 시각효과에 어색한 부분은 거의 없었고요.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전쟁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액션이란 측면에서 보면 소대 전투도 그럭저럭 재미있고요.

 

아론 애크하트는 자기 몫을 제대로 해냈습니다. 어찌 보면 뻔한 인물이 되었을 낸츠 하사를 속 깊게 연기했습니다. 가족애를 강조하는 부분과 부하들과 갈등이 풀리는 부분은 자칫 유치하게 흘러갔을 수도 있는데, 배우의 연기가 살렸습니다. 미셀 로드리게즈는 역할이 좀 뻔해서 배우가 묻혔네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군으로서 뭔가 강렬함을 보여주길 바랐는데 아쉬워요. 조연들도 각자 할 만큼 한 것 같습니다. 인물들이 전형적이라서 특별히 연기가 필요한 캐릭터도 없긴 했지만. 참, 그리고 보니 인종구성이 참 다양하더군요. 해병대와 민간인들까지 합쳐서 흑인은 물론이고, 남미계와 아시아계까지 다 나옵니다. 사족으로 해병대 상병 중에 이름이 로켓(Lockett)인 친구가 있는데, 로켓!이라고 할 때 이 상병 이름을 부르는 건지, 아니면 로켓이 날아오니 피하라는 건지 헛갈렸네요. 제가 리스닝 실력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닌지라.

 

음악은 브라이언 타일러가 맡았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만, <칠드런 오브 듄>의 이나마 누쉬프,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 레퀴엠>의 테마곡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웅장하게 나가긴 하는데, 좀 심심해요. 귀에 딱 들어오진 않네요. 이렇게 내용이 진부한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음악이 튀기 마련인데, 음악도 귀에 들어오는 게 없습니다. 차라리 예고편 음악을 그냥 본편에 트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몇 가지 궁금증을 적자면, 해병대가 수시로 들여다보던 스코프 말인데요. 원래 그런 식으로 보이는 줄 몰랐습니다. 요즘에는 다 도트 사이트 쓰는 줄 알았어요. 요즘 밀리터리 FPS에 그런 스코프 쓰진 않잖아요. 게임만 하니까 잘못된 지식이 쌓인 건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공군 소속인 산토스 기술 하사가 해병대와 함께 출동하는 것도 의문이었습니다. 귀환 도중이야 소속 부대가 전멸했으니까 해병대/육군이랑 같이 다닐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전진 기지로 복귀했으면 자기 부대(공군)를 찾아가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속도 다른 해병대랑 얼마나 같이 지냈다고 바로 쫓아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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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물로 치자면, 그나마 눈 여겨 볼 부분은 있습니다만. 과연 누가 이걸 액션으로 생각할지?]

 

여하튼 영화를 보고 나니 참 복잡한 심경입니다. 이 별 것 아닌 영화에다가 쓸데없이 길게 소감을 적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일단 소규모 부대를 쫓아가는 시점 자체는 괜찮은 시도였습니다. 2000년대 유행한 전쟁물 구도에 외계물을 결합한 건 좋은 실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험의 의의만 놓고 본다면요. 저는 외계인 침략물이 향후 5~6년, 길게는 10년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디스트릭트 9>의 흥행을 봐도 그렇고, 당분간 광선총 뿅뿅 쏘는 외계인이 더 나타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현대 전쟁물과 외계인의 조합이 대세를 이어갈 것 같아요. 성공이건 실패건 간에 이 영화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수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내치기에도 애매한 작품입니다. 감독은 로스 앤젤레스에 이어 속편이 나올 수 있다고 했지만, 글쎄요. 바라건대 누군가 이런 흐름을 쫓아서 진짜 괜찮은 물건을 하나 만들어주길 바랄 수밖에요. 아이디어 자체는 그냥 썩히기 너무 아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