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다시 봤습니다. 어렸을 때 봤던 것과는 느낌이 또 달라서 한번 여기에 감상을 남겨봅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가지고 개인적인 호감도 순위를 매겨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마음에 드는 둘.

1. 바실리 자이체프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독일군 샤프슈터 대령.
에드 해리스 형님은 예전에 더 락에서 그러했듯 품위가 풀풀 넘치는 간지나는 고급군인을 참 잘 연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칙과 소신이 뚜렷하고 명예를 알며, 인간미도 있고, 행동거지와 표정 하나하나에 기품이 흐르는 등... 하여간 멋지군요. 경박하고 머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알 수도 없는 바실리 따위에게 당하셔서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2. 청년 정치장교 다닐로브.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일 겁니다. 야망도 있고, 인간미도 있고, 쌍커풀이 좀 느끼하기는 하지만 -_-;; 잘 생겼고(필자 본인이 쌍커풀이 무척 진하기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없잖아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뇌하고 질투하는 실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어렸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주인공 바실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그를 '저거 뭐하는 놈이야' 하는 관점에서 띠껍게 바라보았습니다만, 이제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고 보니 오히려 그의 인간적인 면에 공감이 가더군요. 배우의 연기 자체도 가장 좋았습니다.


다음으로 마음에 안 드는 둘.

1. 바실리의 연인, 타냐.
제일 먼저, 대체 이 여자는 왜 바실리를 좋아하는 건지 영 모르겠더라고요. 고학력에, 더 이지적이고, 지위도 높고, 말도 잘하고, 잘 생긴데다가 순정파인 -게다가 직업도 더 안정적인 -_-;;- 다닐로브를 두고 대체 왜 멀뚱히 있는 자이체프한테 그렇게 대쉬하는 건지. 제가 아는 대부분의 현실적인 여자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다닐로브를 택할 겁니다. 장담하죠.
그나저나 대체 이유가 뭘까요. 바실리가 별로 나빠 보이는 인간은 아니니, 여기에 나쁜 남자 이론은 안 맞겠고, 좀 보완하자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이론? 하여간 그녀의 연인관엔 동의하기가 어렵더군요.
바실리와의 서스펜스 넘치는 붕가붕가 씬에서 하얗고 섹시한 하얀 엉덩이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만, 그 정도로는 마음에 안 드는게 별로 보완이 안 되네요.

2. 바실리 자이체프.
아무래도 전형화될 수 밖에 없는 전쟁 영웅이기 때문일 걸까요. 뭐 고뇌도 갈등도 없고 생각도 없고 말도 없고 표정도 없고, 하여간 대체 뭘 하는 건지 잘 납득이 안 가는 캐릭터입니다. 개인적으로 주드 로를 좋아합니다만 결코 칭찬해 줄 만한 연기를 한 것도 아니고요. 하긴 연기할 건덕지 자체가 별거 없었죠. 
그나마 비호감 1위가 아닌건 초반의 간지작살 스나이핑 신에 점수를 줬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매력 포인트.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전반 20여분에 걸친 소련군 우라돌격 씬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포인트는 전반 이십분의 오마하 상륙 작전 씬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아무것도 모르고 허름한 군복 하나만 달랑 걸친 채 기차에서 끌어내려져서, 아무 대책 없이 -심지어 총도 없이- 적진으로 육탄돌격당하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게다가 후퇴하면 뒤에서 정치장교들이 기관총을 쏘아대죠. 여기서 죽던 저기서 죽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들. 전쟁의, 특히 이데올로기적인 전쟁의 속성에 대해 이만큼 극명하고 충격적으로 묘사한 장면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워낙에 제 뇌리에 깊이 남은 장면이기에 앞으로 제가 쓰는 소설에서 비슷한 장면이 안 나올거라고 장담하기가 힘드네요.

그리고 영화가 비교적 소련과 독일 중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양 군과 그 속의 인물들을 묘사하려 한 건 칭찬할 만 합니다. 최근에는 전쟁영화에서 이런 객관적인 시선이 워낙 보편화되어 있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그 선구자 격이라 할 수 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비슷한 시기의 이 영화에서만 해도 상당히 신선한 시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편 착한놈 너네편 나쁜놈의 이분법적 구도가 일반적이었죠. 사실 요즘 영화도 꼭 안 그렇다고 하기는 뭐하고요.

이 영화는 처음 볼 때는 무척 흥미있게 봤습니다만 다시 볼 때는 예전에 볼 때만큼의 재미는 없는 편이더군요. 아무래도 주인공과 동일시하기가 힘들어서 극중의 긴장에 몰입하기가 힘들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Everything is clearer now Life is just a dream, you know That's never ending. I'm asc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