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많이도 바뀌었지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도 다니고(사실 그냥 땅을 다니는 자동차가 훨씬 많긴 하지만요. 정확히 말하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아니라 초소형 수직 이착륙기에 가깝죠. 면허 따기도 끔찍하게 어려운 물건인데다가 값도 장난이 아니라서 골이 텅 빈 부잣집 도련님들이나 끌고 다니는 물건이에요. 운전하기 지랄 맞게 어려운 덕분에 최근에는 부잣집 도련님의 절대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죠) 인공수들도 막 돌아 댕기는(사실 막 돌아다니는 건 아니에요. 옆에서 확실히 관리 안 하는 인공수가 얼마나 위험한데요. 도로를 뚫으라고 하면 건물이고 사람이고 방해되는 건 모조리 아작내며 일직선으로 도로를 내는 것들이라고요) 미래 세계죠. 알다시피 전쟁도 끝났고 딱히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악당도 없는 세상입니다. , 딱히 뭐라 할 말이 없는 평화로운 미래세계에요.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에요. 사람 사는 곳에는 저마다 문제가 있는 법이죠. 가령 은행강도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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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여름빛을 받아 흰색으로 멋지게 빛나는 테라시카 시 중앙은행은 햇살을 최대한 이용해 건물을 돋보이게 하도록 설계되었다. 사실 중앙은행 건물 외벽 전체가 겉에서 보기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보이는 특수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높이만 해도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보다 50층은 더 높으니 어떻게 설계하든 간에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오늘 같은 경우는 테라시카 시 중앙은행은 평소보다 더 철저하게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경찰 특수 제압팀 3개 중대가 주위를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걸 못 볼 상태라면 추천해줄 만한 좋은 안과 의사가 있다. , 눈이 멀쩡하다면 정신과 전문의도 소개해 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길.

 

너희는 포위되었다! 당장 무장을 버리고 투항해라!”

 

굉장히 상투적인 대사가 굉장히 상투적인 목소리로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 윌버 베런 강력반 형사 반장은 목이 쉬도록 메가폰에 대고 소리를 쳐대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쨍쨍히 내리쬐는 초여름 하늘은 생명력이라는 세 글자를 처절하리 만치 강렬하게 내뿜는 중이다. 이런 날에는 애들이나 데리고 소풍을 좀 다녀와야 할 텐데. 어차피 이렇게 목이 터지라고 소리쳐 봐야 은행 안에 틀어박힌 놈들이 ‘죄송합니다.’라면서 얌전히 걸어 나와줄 리도 없다.

차라리 그냥 집에 돌아가서 샌드위치를 싸는 게 자식들 인성교육이나 내 인생에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지만, 은행 건물을 둘러싸고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다른 경찰들을 바라본 베런 반장의 머릿속에는 집에 가면 진급이나 월급 인상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아까 나왔던 인성교육이나 인생사에 대한 생각을 메뚜기 뜯어 먹는 사마귀처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거의 숱이 없어서 자외선이 피부조직을 변이시키는 걸 막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머리카락들 사이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반장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사건경과는 대충 이런 식이었. 은행이 막 열기 직전인 아침 850, 대형 건설회사에 수주해 엄청난 돈을 들여 설계한 중앙은행 정문을 커다란 장갑차가 우악스럽게 뚫고 들어가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그것을 끝으로 점심때까지 은행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달리 설명할 일이 없을 만큼 단순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윌버 반장의 머릿속은 더욱더 짜증이 몰아쳐 왔다. 대체 언제까지 이놈들은 이 짓거리를 하려는 거지? 차라리 도주라도 해서 빨리 집에나 가게 하면 안 되는 걸까? 아니, 너희는 가정의 평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모르는 거냐? 윌버 형사의 상태가 위험스러운 누런 머리카락 몇 올이 파르르 떨리다가 가차없이 주인에게서 분리되었다.

 

투항해라! 제기랄, 누구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 짓 하는 줄 아나? 빨리 안 기어 나와!”

 

그리고 약 11초 후, 윌버 반장은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게 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은행 정문을 덩치 큰 기계 덩어리가 무지막지하게 부숴버리고 튀어나온 것이다. 두 발로 쿵쿵 지축을 울리며 튀어나온 그것은 이미 상태가 말이 아니던 은행 정문을 다시 한번 처참하게 박살을 내 버리고, 충혈된 눈으로 은행 정문을 바라보고 있던 은행사 간부와 보험회사 직원들을 울부짖게 했다. 두 발로 걷는 검은 인공수는 크기나 힘이나 위압감이나 모두 전속력으로 사람에게 달려드는 코뿔소의 몇 배에 달했다. 윌버 반장은 옆에서 입을 쩍 벌린 부하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

 

뭐여, 장갑차라며? 왠 인공수여? 왜 인공수냥께?”

 

, , 저기, , , 반장, , , , 장님.”

 

윌버 반장에 비하면 배짱도 없고 빽도 없는 데다가 머리숱까지 많은 부하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탈탈탈 휘둘리고 있었다.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은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몇 년째 연애만 하던 소꿉친구와 막 결혼에 골인해 깨가 쏟아지는 시절을 보내고 있고 그럭저럭 마음이 따듯한 사람인 페르베 형사는 탈수기 마냥 탈탈탈 털리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외치려 노력하고 있었다.

 

시끄럽구먼, 저거 변신인공수 아닌감? 너 여기서 구른 지 몇 년이여? 미리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녀? 어쩔라미? 이런 놈일 줄 알았으면 애초에 청소부 놈들에게 맡겨두면 간단한 거 아녀?”

 

누런색 머리카락들이 심각한 수준으로 벗겨진 이마 위에서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덧붙여 페르베 형사도 팔다리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 , 뒤에, , , .”

 

? 뒤가 뭐? 뒷간에 가고 싶다고?”

 

용서받지 못할 농담을 하며 무심코 뒤를 돌아본 윌버 반장은 그제야 검은 인공수가 경찰 바리케이드를 박살 내고 차량을 집어던지며 반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즈.jpg

 

현재 은행강도들은 테라시카 중앙도로로 도주 중입니다. 시민들은 안전을 위해 중앙도로 대신 다른 길로 우회해 주시길 바랍니다. 현재까지 인명피해 없으나 시경 강력반의 윌버 베런 반장이 범인들이 범행에 사용한 인공수에 치여 중상을 입어…”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휴대용 디지캐스터(Digicaster)의 스위치를 끄자 앵커의 영상과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장갑의 주인은 청회단발머리를 흩날리며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 층이 넘는 고층 빌딩 옥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높은 산의 바람처럼 차갑고 희박. 하지만, 장갑의 주인은 방풍고글을 한번 고쳐 썼을 뿐, 바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바람이 아니라 그 무엇도 청회색 머리 소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만, 호리호리한 실루엣의 소녀는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가방을 들어 저 먼 어딘가를 향해 겨누었을 뿐이다. 난간을 지지대 삼아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낸 소녀는 디지캐스터의 다이얼을 돌려놓고 가는 입술을 열었다. 마치 친구에게영화가 개봉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다.

 

중앙로라더군요. , 준비해요.”



초여름 구름 사이로 빛이 따갑게 내리쬔다. 소녀는 살짝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릴.jpg



알았어 비즈.”



붉은 머리 소년은 디지캐스터의 다이얼을 돌렸다. 소녀의 환영이 사라지는 것을 본 소년은 해가 쨍쨍한 초여름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년배보다 살짝 키가 큰 소년은 햇볕이 따가운 듯 눈을 찡그렸다. 높다란 빌딩 사이로 용케도 내리쬔 햇살은 빛을 피하기에는 너무 짧은 그림자를 만들 뿐이다.



소년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매무시를 고치고 부드러운 눈매로 거리를 걷는 다른 사람을 둘러보았다. 이 커다란 콘트리트 정글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소년의 눈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었다. 이제 폐건물이 되어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된 옛 무역센터다. 건물 외장에 낙서가 가득하고 벽 곳곳이 허물어진 무역센터는 깔끔한 거리에 한복판에 떨어진 오물처럼 우울하게 서있었다. 소년은 주변의 눈을 둘러보고서 폐건물로 발을 옮겼다. 초여름 바람이 단정한 갈색 머리를 흩트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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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코뿔소.jpg

 

필사적으로 갓길로 붙는 승용차들을 쌩쌩 지나치며 거리를 달려나가는 검은 인공수는 어느새 원래의 장갑차 형태로 되돌아간 상태. 튼튼한 장갑차 안에서는 두 남자가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바보스럽게 웃고 있. 기묘한 검은 색 쫄쫄이를 입고 고글을 쓴 두 남자는 아무리 봐도 변태 이상으로는 봐주기 어려운 모양새. 한 남자는 혈당치를 꼭 한번 재어보고 싶을 정도로 뚱뚱했고 다른 한 명은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말라빠졌지만 둘 다 얼굴에 여드름이 자글자글하다는 것은 똑같았다.

 

 

예전에 말했지만 지금은 미래입니다. 더 멋진 기술에 더 빠른 자동차와 더 높은 건물들이 있죠. 인공수란 것도 있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지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문제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마요.

 

 

우리가 결국 해냈다능~ 뿌우~역시 검은 인공수는 짱이라능~

 

뚱뚱한 남자가 낄낄대며 조종패널을 두드리다가 숨이 거칠어졌는지 가슴을 부여잡았다. 말라이도 함께 낄낄거렸다.

 

이렇게 돈을 털었으니 보스가 좋아할 거라능. 이렇게 한탕 했으니 우리가 간부가 된다능.”

 

 

세상에는 아직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남아 있답니다. 기술이 높아질수록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요? 세상에, 그런 낡아빠지고 멍청한 낙관론은 진작에 통하지 않게 되었어요. 기술이 높아질수록 골칫거리도 커진다. 바로 이게 요즘 세상의 진리에요. 당연한 이치죠.

 

 

변태 악당 졸개 같은 옷을 입은 두 남자는 앞으로 올 간부의 꿈에 부풀었다. 간부는 참으로 간지 나는 일이다. 일단 쫄쫄이를 입지 않아도 되고 운이 좋으면 삼시세끼를 고기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간부라면 마땅히 그 정도는 돼야지. 안 그래? 과연 간부가 되면 어떤 멋진 일이 기다릴지를 비참할 정도로 소박하게 논하고 있던 둘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세상이 발달하면서 범죄도 발달하자 경찰력만으로는 화끈하게 제압하기 어려워졌지요, 결국 정부는 쓰레기 처리 모라토리엄을 선언해버린답니다. 꽤나 무책임하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누가 저런 것들을 처리하느냐고요?

 

 

두 쫄쫄이는 갑자기 앞에서 왠 인공수가 자신들을 가로막아 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얀 인공수는 마치 예전부터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 무심히 딴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외피는 흰색, 하지만 외피 사이로 비치는 본체는 체리처럼 붉은색. 마치 예복과 같이 섬세한 외피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실루엣을 띄고 있다. 견갑이나 하부장갑 같은 곳의 끝은 수술용 메스처럼 날카롭지만 동체 대부분은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흐르고 있다. 하얀 인공수의 외피에는 어디 소속 인공수인지 나타낼 표식이 숫자 하나 없어서 누구의 물건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새부리처럼 뾰족한 얼굴없는 머리가 무심히 검은 코뿔소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나타난 하얀 인공수에 당황한 쫄쫄이들이 레버를 당기자 장갑차가 순식간에 인공수 형태로 변했다. 검은 코뿔소에 금괴를 실을 공간을 마련하느라 다른 무장을 떼 버렸어도 그 냉장고 만한 주먹이면 웬만한 인공수쯤은 맨손으로도 처부술 것처럼 강하다. 두 인공수의 키는 거의 비슷했지만, 가늘가늘하고 뾰족한 모습을 한 하얀 인공수에 비하면 쫄쫄이의 검은 코뿔소 쪽이 훨씬 덩치가 크고 튼튼해 보였다.

 

, 경찰의 개냐능?! 악당의 힘을 보라능!”

 

커다란 덩치가 하얀 인공수를 덮쳤다. 새부리를 그대로 투구로 만든 것 같은 하얀 인공수의 머리는 차갑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하얀 인공수는 아무런 무기도 꺼내지 않고 다만 한 손을 들 뿐이다.

 

 

그야 바로 우리 같은 청소부들이죠.



  

망원경 안에 하얀 인공수와 검은 인공수가 동시에 들어왔다. 덩치는 검은 인공수가 거의 두 배는 되어 보였지만 흰 인공수는 검은 인공수의 태클에 전혀 밀리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막아서. 하얀 인공수는 마치 어린 아이를 막듯 맨손으로 검은 인공수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소녀는 높은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가방에서 총을 꺼냈다. 더운 여름에도 긴 팔 셔츠를 입은 소녀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번졌다.

 

소녀가 총의 레버를 당기자 총신이 저절로 늘어났다. 살짝살짝 튀기는 전자 스파크를 보며 소녀는 가볍게 총신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총신이 충분히 길어지자 소녀는 재빨리 총을 난간에 고정했다. 거의 소녀만큼이나 기다란 총이었다. 바람이 다시 머리카락을 스쳐 지났다.

 

잘했어요. .”

 

방아쇠가 당겨졌다. 모루처럼 묵직한 반동이 작은 어깨를 덮친다. 스코프 안에는 엄청난 속도의 탄환이 공기를 태운 궤적만이 가득하다. 궤적이 담배연기처럼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탄환이 검은 코뿔소의 세라믹 막을 가볍게 관통해 내려가 탄소결정 장갑을 꿰뚫는다. 말라깽이의 가랑이 사이를 스쳐 지나가 엔진을 푸딩처럼 경쾌하게 부숴 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부드러웠던 소녀의 미소는 먹이를 잡은 맹수가 입에 피와 살점을 가득 물고 짓는 듯한 미소로 변했다. 검은 인공수는 쓰러져서 일어설 줄 모르고 있. 탄환이 지하의 수도관을 관통했는지 도로 아래에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



더운 여름 하늘 아래, 도로 한가운데서 하얀 물보라가 어린. 하얀 인공수는 초여름 무지개를 맞이했다.



삼치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