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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宙易)
글 수 47
“넌 니 멋대로 쫄아서 호들갑 떨어놓고선 왜 남한테 화풀이야?”
전신에 의료용 접착제를 덕지덕지 바른 걸오가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구급상자를 집어 던졌다.
“이이잉, 걱정해서 내려갔더니 놀고 있었으면서. 너라면 화 안나?”
궁극 지상병기로서의 위력을 한껏 뽐냈던 미카는 아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낑낑거리고 있었다. 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맞자 꺅꺅 비명을 지른다.
“그럼 나도 징징짜고 있어야 되냐? 배째고 창자로 줄넘기 하리?
기기 전부 고장 나서 일단 되는대로 연락했고 구조대 기다리는 동안 수영 좀 했다.
그게 쳐 맞을 짓이냐? 어?”
“씨이이, 나 정말 걱정했단 말야! 이이잉.
그리고 걸오 너도 나 때렸잖아.”
너도 나 때렸잖아, 너도 나 때렸잖아, 너도 나 때렸잖아. 어이를 상실한 걸오가 파들파들 떨며 옆에서 멀뚱거리는 테테루에게 물었다.
“야, 테테루! 전투태세로 전환한 무어인에게 주먹질을 한 내가 잘못한 거냐?”
“네, 미친 짓이죠.”
간결한 대답에 간결한 반응. 분기탱천한 걸오는 탁자를 뒤집어 엎었고 불쌍한 테테루는 탁자와 의자에 끼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현명한 도리볼은 혹여 불똥이 튈까 끼어들 찬스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레헤미는 바짝 얼어서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불쌍한 군의관만이 한숨을 내쉬며 엉망이 된 의무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되었다. 앞으로 사상자나 피해처리에 대한 일로 좀 바빠지겠지만 더 이상의 위험은 사라졌다. 그러나 걸오에겐 아직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한가해지니 이제까지 억눌렀던 궁금증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째, 모우 함장님은 템군에 연방의 종족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분명 걸오가 바톨의 스타파이터를 생포해서 침투부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다른 이들이 모두 경악했던 반면, 모우는 이미 아는 듯 태연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은 연방의 어디까지 알려져 있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둘째, 아이사타호 같은 대형전함 건조계획과 전후 후유증.’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아이사타호 계획에 쏟아 부을 돈은 있으면서도 전후 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이 때문에 예의 그 침투부대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또 이번에 템군의 공격도 그래, 놈들은 폭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듯 했고…’
"닥탄 걸오님!"
걸오의 생각을 끊으며 한 스퀵테르인이 말을 걸어왔다. 이 거한의 등장에 미카는 숨소리 하나 내쉬지 못하며 걸오 뒤로 숨었다. 무어인이 도망칠 정도의 위험인물은 싹싹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소관은 아이사타호 해병대를 맡고 있는 스제거라고 합니다.”
스제거 중령. 스퀵테르 최고의 칭호인 닥탄이 붙을 정도면 적어도 만명 이상의 적을 죽였다는 얘기다.
“오옷! 닥탄 스제거? 대전차 격투기의 창시자이자 달인!”
도리볼이 화색을 띠며 아는 척했다. 그러고 보니 걸오도 얼핏 본적이 있었다. 날아오는 전차 포탄을 덕킹, 스웨이 등으로 피하면서 접근해 보기륜 걷어차기로 전차의 기동력을 뺏은 다음 상부장갑에 정권을 꽂아 격파. 마지막은 수도로 꺾은 포신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리며 스퀵테르 특유의 중저음 포효를 내지른다. 아마도 해병대 모집광고였지 싶었는데 실물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함장님으로부터 닥탄 걸오님을 모시고 오란 명령을 받았습니다."
뭔가 수상하다. 걸오를 부른다면 개인 연락을 하거나 함내 방송을 해도 될 텐데 말이다.
"그게…함장님이 무슨 일로 저를 부른답니까??"
“어흠, 그 새끼 가만 놔두면 튀니까 잘 붙잡아와라. 였습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걸오는 어떻게든 도망칠 구멍을 찾아 통박을 굴려봤지만 눈앞의 스퀵테르인에게 빈틈은 없었다. 이럴 땐 그냥 얌전히 끌려가서 최후의 저항을 위해 체력을 보존하는 게 낫다.
"네, 알겠습니다. 미카?"
“꺄악! 싫어-놔! 걸오야, 놔아아아악!”
걸오는 일어서며 미카를 잡아 끌었다. 용감무쌍한 무어인 전사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악했지만 결국 걸오의 손에 대롱대롱 들렸다. 총알받이 하나 선정완료.
“야, 도리볼. 너도 가자.”
“어~어? 난 왜에?”
경험만큼 눈치도 빠른 도리볼은 노골적으로 빠지려는 분위기다.
“새캬, 짬 되는 니가 커버 좀 해줘야지.”
“솔직하구나.”
총알받이 둘 선정완료. 허나 걸오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이 간 곳은 함장실이 아니었다. 닥탄 스제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현재 담프사의 바다에 착수해 있는 아이사타호의 외부 출입구였다.
"함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걸오의 질문에 닥탄 스제거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펼쳐진 푸르디 푸른 바다. 그리고 옆에서 눈을 번쩍거린 스퀵테르인. 이 전투종족의 눈에 빛이 났다는 것은 즉.
"난 튄다!"
사태를 파악한 걸오가 재빨리 날아올랐으나 이미 늦었다.
"닥탄 걸오님. 저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부디 원망 마시길."
스제거 중령은 담프사 궤도기지에서의 해병대원들과 비교가 안 되는 베테랑. 왼팔로 날아오르는 걸오의 다리를 잡아채는 동시에 비틀어 탈골시켰고 오른손으론 걸오의 눈을 후벼 파면서 목을 부러뜨렸다. 마무리로 무릎을 차올려 척추를 꺾고는 바다에 던져 넣었다.
-첨버덩
청량한 소리와 함께 걸오는 바다로 빠졌고 다행히 이번 목표물이 아니어서 물에 빠지지 않은 미카는 벌벌 떨며 훌쩍거렸다.
“우에에~중령니이임. 걸오를~근데 난 안 그랬어요. 빠트리지 마세요. 후에에엥~.”
“음, 난 걸오 소령님만 잡아오란 명령만 받았다네.”
“어, 저기, 이거 뭡니까?”
실로 전광석화 같은 활극에 도리볼은 잔뜩 경직했다. 나름대로 육탄전에도 자신 있다고 생각한 도리볼이었지만 방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생물체가 할 행동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도대체 걸오는 왜 이런 공격을 받아야 하는가?
"히이잉~잉잉잉~.”
눈물로 범벅 된 미카가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가 걸오가 빠진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랬다. 걸오는 아직 떠오르고 있지 않았다.
"근데 여긴 아마 식인상어 출몰지역일 텐데요? 빨리 끌어내야 됩니다."
"아아, 식인상어라면 저거? 쿨쩍."
미카는 아직도 혼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수면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담프사에 서식하는 원시상어 수십 마리가 배를 뒤집은 채 둥둥 떠있었고 그 부분은 물이 아니라 숫제 피바다였다.
"그러니까…이거. 뭐냐니까요?"
사태파악이 안 되는 도리볼이 다시 미카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아무리 상어라도 라출노그인한텐 안돼. 파워도 스피드도 딸리는걸.
게다가 상대는 보통도 아닌 왕족에다가 유명한 전사로 이름난..."
“트어어!”
순간, 수면에서 뭔가가 비명과 함께 뛰쳐나왔고 그것은 아이사타호의 선체 표면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아~사람살려!"
"걸오야앙~."
"걸오구나."
이제야 도리볼도 대강 짐작이 갔다. 이유는 몰라도 저 물 밑에 있는 것은-그러니까 지금 막 걸오의 다리께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이사타호의 함장인 모우였고 이 살벌한 수중종족의 힘 앞에 걸오는 쪽도 못쓰고 깨지고 있는 것이다.
"미카야! 미카야! 으어어!"
유선형의 라출노그인이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도망치는 지구인의 허리를 채어 물고 다시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걸오는 반항 한번 못하고 잡혀 들어갔고 수면에는 물보라가 한 번 일었을 뿐 도로 잔잔해진걸 보니 아마도 꽤나 깊숙이 끌려들어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양반은 대체 왜 저런답니까, 중령님?"
이번 도리볼의 물음에야 미카가 간신히 울음을 그치며 대답했다.
“으응, 뭐긴, 벌받는 거지. 흑, 우리가 17연대 시절에 저거 무지 당했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거나 작전 때 눈밖에 난 녀석은 조용히 방으로 불려가거든.
훌쩍, 고급장교용이라 물이 가득 찬 모우 함장님 방에 두근두근 들어갔다가
뭔가 뒤에서 잡아채는걸 느꼈을 땐...잉잉잉.”
-걱정과는 달리 건강해서 다행이구나.
모우의 초음파가 간신히 맞붙은 걸오의 두개골을 울렸다.
-저 분명히 사고 친다고 미리 경고했을 건데요?
물에 빠진 뒤로는 문자 그대로 숨돌릴 틈조차 없었다. 걸오는 지금에서야 피부로 물속의 산소를 호흡하기 시작한 것이다.
-듣는 맛과 보는 맛은 또 다른 법. 알게 해주랴?
-대화로 해결합시다. 함장님
간신히 모우의 화가 식었는데 다시 돋굴 필요는 없다. 또 한번 난도질 당하면 제아무리 지구인이라도 재생하기 힘들다.
-뭐 어차피 좋게 좋게 해결되었잖습니까?
근데 저도 뭐 좀 궁금하거든요?
어차피 ‘지극히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슬슬 걸오가 물어봐도 될 차례다.
-쯧. 무엇이 알고 싶은고?
-여러 가지인데, 함장님은 침투부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영 궁금해서 말입니다.
-흥, 일년간 반폐인으로 살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려나?
반폐인이 아니라 완전폐인이었지만 걸오는 쓰게 웃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이번 정보는 템에게서 얻은 것이니라.
내용은 뻔한 황태자나 왕자들의 서열싸움 아니겠나?
담프사를 공격하려는 측과 정보를 흘리는 측의 싸움에 우리가 끼인 거지.
놈들이 이렇게 분열하지 않았더라면 연방은 진작에 함락당했을 것이야.
템 제국은 절대적 지배자인 황제와 그에 복종하는 수많은 왕국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는 것은 바로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다. 이 황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연방과의 전쟁 중에도 끊이지 않았으니 지금에야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근데 우리 쪽도 문제가 있어 보이던데요?
아이사타호는 왜 존재합니까? 전쟁은 끝나지 않았나요?
이건 전성기 이상의 군비확장이에요.
-오오, 잘 물어봐 주었네, 걸오 소령!
아이사타호의 존재 이유는 바로 새로운 전장에서 새로운 적과 싸우기 위해서지.
전쟁은 끝났다지만 정확히는 종전이 아니고 휴전일세.
그것도 오직 제국과 연방간의 휴전 조약이지.
그러니 템 제국이 아닌 템 왕국과의, 총력 전쟁이 아닌 소규모 전투가
발생할 거란 예상은 이전부터 해왔었고 실제로 들어맞았지 않나.
또한 이 외에도 전후 연방 각지에서 일어나는 불만세력들의 소규모 반란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힘이 필요하지.
그렇게 말하는 모우의 표정은 살기등등했다. 아까 걸오의 허리를 끊어놓을 때도 저 정도의 표정은 아니었다.
-라는 것은 말라죽을 놈들의 헛소리고. 결국은 놈들과 같은 이유일세.
템과 같은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
-연방 내부의 세력 싸움이란 말씀이십니까?
반문하는 걸오를 모우는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게 걸오 자네의 단점이야.
눈앞의 칼은 무서워하면서도 이겨내려 하지만 등뒤의 칼은 애써 없는 셈 치지.
언젠가 그 버릇 때문에 자네는 크게 다칠 게야.
걸오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타인을 통해 확인 받으니 더욱 처참해지는 기분이다. 자신이 목숨을 걸었고 전우들이 목숨을 바쳤던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자네도 궁금하지 않나? 존재조차 몰랐던 메디우급 폭탄에 대한 정보가
대체 누굴 통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구역질 나는 종족과 파벌간 세력싸움 외엔 무어가 있겠나.
당연히 아이사타 계획과 우리도 이미 이 싸움 속에 서있다네.
톱니를 악문 모우가 말을 이었다.
-짐의 사견으론 이번 사건의 시발점은 자칭 온건파 놈들은 강경파를 실각시키기
위해 메디우급 폭탄의 존재를 흘린 것이라고 보네.
그리고 이를 안 강경파에선 부랴부랴 무마하기 위해 가장 완성된
본함을 투입하려 했고 함장인 짐으로 하여금 이 미끼를 물도록
지금껏 격리시켜왔던 자네를 담프사 궤도기지에 옮겨놓았을 테지.
걸오가 메디우급 폭탄이 있는 담프사 궤도기지로 오고, 침투부대의 존재가 탐지되고, 이어 아이사타호가 담프사로 급파된 것. 역시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흐응, 이제껏 자네를 만나지 못하도록 갖은 수작을 부려왔기에
분명 다른 간계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었으나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수작. 그 얘기는 미카로부터 들었다. 서로간의 연락을 조작한 것. 다시 만나려는 17연대의 생존자들은 중간에서의 조작에 가로막혀 만날 수가 없었다. 하긴 그럴 것이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모우의 힘이 커지는 것은 그 어느 쪽에도 좋은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건 미카에게 들었습니다. 의외로 치졸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미끼인줄 알면서도 낚인 거에요?
-그래야 미끼를 드리운 놈을 잡을 수 있지 않나.
모우의 톱니들이 살벌하게 맞물렸다. 걸오는 잠시 모우를 낚았다고 착각했을 이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앞으로 그들에게 벌어질 환란에 비하면 방금 걸오가 겪은 사소한 사고는 봄날의 햇살보다 따스한 것이리라.
-근데 아이사타호는 왜 탄 겁니까? 그때는 제대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또 이런 추잡한 권력 싸움에 질려서 라출노그를 떠나셨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어릴 적 선왕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이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모우의 부왕이라면 전 라출노그 연합왕국의 대표국왕이며 지난 대전 때 전사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복수라고 말했지.
킬킬대는 웃음대신 꿀럭거리는 거품이 걸오의 폐에서 올라왔다.
-아이고, 그때는 몸만 아니라 대가리 속도 아이였군요.
모우도 쓰게 웃었다.
-그러자 선왕께선 웃으면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사랑이라고.
-현명한 분이셨군요.
-그렇지. 허나 아직 치기 어렸던 나는 다시 우문을 했다네.
나라와 동포가 고통을 겪어도 복수 대신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던 이가 죽어도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어마마마가 그렇게 죽어갔는데 그딴 사랑 타령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모우의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후회와 회한의 빛이다.
-선왕께서는 다시 쓸쓸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적을 죽이고, 적의 부모를 죽이고, 적의 자식을 죽이고,
나아가 적의 나라를 부순다 한들 무엇이 남느냐.
알량한 쾌감에 만족하는 너만 남는다.
나라면 사랑하는 반려를 만나 사랑하는 자식을 낳고,
사랑하는 가정을 꾸리고, 나아가 우리의 자식들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적마저도 사랑하겠다.
-선왕께선 또한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렇지. 짐은 어리석어 이제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네.
그래서.
비늘과 아가미, 지느러미가 활기 있게 움직이더니 세찬 물결과 함께 모우가 몸을 틀었다.
-이제 전쟁은 끝내야지. 살기 위해 사랑싸움할 시간은 줘야지 않겠나.
-호오, 그래서요? 박살낼 적은?
-짐의 뜻에 거슬리는 놈은 누구든지.
-누구든지?
-누구든지.
멋지게 결정됐다. 아이사타호는 싸워 나갈 것이다.
이제 시비 걸려고 눈알 벌개진 템 놈이든, 권력과 세력싸움에 상판 노래진 연방 놈이든,
피를 원하면 스스로의 피바다에서 헤엄치게 해준다.
힘을 원하면 극상의 폭력을 직접 체험시켜 준다.
어떤 거창한 대의나 같잖은 명분도 필요 없다.
정의? 지랄한다.
대의? 염병한다.
그런데 지랄을 하던 염병을 하던 좀 살만할 때 하면 안될까? 앞으로 찌르고 뒤에서 찔리는 짓은 그만 좀 하자.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겁니까? 꽤나 모순적이군요.
-생명을 살리고자 생명을 빼앗는 군인이 무슨 망언을.
다시 폭소와 함께 바닷물이 걸오의 폐와 뱃속으로 넘쳐 들었다.
-잠깐, 근데 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다시 말해 두어야 한다. 자신이 왜 싸우는 지를. 어째서 종족을 등지고 무의미한 살육을 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행동 때문에 모우와 동료들이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부탁할 필요 없네. 다 아는 것 새삼 말할 필요 무에 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어랍쇼? 진짜루? 내가 뭐라고 말할 줄 알고요?
-무엇이든 허하노라. 이 모우에게 있어 그대 걸오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그러자 걸오는 씨익 웃으며 모우의 등지느러미를 잡았다.
-좋슴다. 자! 그럼 놀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제 3회 모우 수상쑈! 쑈! 쑈우!
-…짐에게 등에 업을 자를 선택할 권리 정도는 있겠지?
비명 대신 헛물만 잔뜩 켠 걸오가 다시 심해로 끌려갔다. 이러니까 사람은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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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구버전에선 걸오가 여기서 아이사타호로 끌려갔습니다.
덕분에 대폭 고쳤습니다.
전신에 의료용 접착제를 덕지덕지 바른 걸오가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구급상자를 집어 던졌다.
“이이잉, 걱정해서 내려갔더니 놀고 있었으면서. 너라면 화 안나?”
궁극 지상병기로서의 위력을 한껏 뽐냈던 미카는 아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낑낑거리고 있었다. 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맞자 꺅꺅 비명을 지른다.
“그럼 나도 징징짜고 있어야 되냐? 배째고 창자로 줄넘기 하리?
기기 전부 고장 나서 일단 되는대로 연락했고 구조대 기다리는 동안 수영 좀 했다.
그게 쳐 맞을 짓이냐? 어?”
“씨이이, 나 정말 걱정했단 말야! 이이잉.
그리고 걸오 너도 나 때렸잖아.”
너도 나 때렸잖아, 너도 나 때렸잖아, 너도 나 때렸잖아. 어이를 상실한 걸오가 파들파들 떨며 옆에서 멀뚱거리는 테테루에게 물었다.
“야, 테테루! 전투태세로 전환한 무어인에게 주먹질을 한 내가 잘못한 거냐?”
“네, 미친 짓이죠.”
간결한 대답에 간결한 반응. 분기탱천한 걸오는 탁자를 뒤집어 엎었고 불쌍한 테테루는 탁자와 의자에 끼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현명한 도리볼은 혹여 불똥이 튈까 끼어들 찬스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레헤미는 바짝 얼어서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불쌍한 군의관만이 한숨을 내쉬며 엉망이 된 의무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되었다. 앞으로 사상자나 피해처리에 대한 일로 좀 바빠지겠지만 더 이상의 위험은 사라졌다. 그러나 걸오에겐 아직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한가해지니 이제까지 억눌렀던 궁금증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째, 모우 함장님은 템군에 연방의 종족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분명 걸오가 바톨의 스타파이터를 생포해서 침투부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다른 이들이 모두 경악했던 반면, 모우는 이미 아는 듯 태연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은 연방의 어디까지 알려져 있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둘째, 아이사타호 같은 대형전함 건조계획과 전후 후유증.’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아이사타호 계획에 쏟아 부을 돈은 있으면서도 전후 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이 때문에 예의 그 침투부대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또 이번에 템군의 공격도 그래, 놈들은 폭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듯 했고…’
"닥탄 걸오님!"
걸오의 생각을 끊으며 한 스퀵테르인이 말을 걸어왔다. 이 거한의 등장에 미카는 숨소리 하나 내쉬지 못하며 걸오 뒤로 숨었다. 무어인이 도망칠 정도의 위험인물은 싹싹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소관은 아이사타호 해병대를 맡고 있는 스제거라고 합니다.”
스제거 중령. 스퀵테르 최고의 칭호인 닥탄이 붙을 정도면 적어도 만명 이상의 적을 죽였다는 얘기다.
“오옷! 닥탄 스제거? 대전차 격투기의 창시자이자 달인!”
도리볼이 화색을 띠며 아는 척했다. 그러고 보니 걸오도 얼핏 본적이 있었다. 날아오는 전차 포탄을 덕킹, 스웨이 등으로 피하면서 접근해 보기륜 걷어차기로 전차의 기동력을 뺏은 다음 상부장갑에 정권을 꽂아 격파. 마지막은 수도로 꺾은 포신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리며 스퀵테르 특유의 중저음 포효를 내지른다. 아마도 해병대 모집광고였지 싶었는데 실물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함장님으로부터 닥탄 걸오님을 모시고 오란 명령을 받았습니다."
뭔가 수상하다. 걸오를 부른다면 개인 연락을 하거나 함내 방송을 해도 될 텐데 말이다.
"그게…함장님이 무슨 일로 저를 부른답니까??"
“어흠, 그 새끼 가만 놔두면 튀니까 잘 붙잡아와라. 였습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걸오는 어떻게든 도망칠 구멍을 찾아 통박을 굴려봤지만 눈앞의 스퀵테르인에게 빈틈은 없었다. 이럴 땐 그냥 얌전히 끌려가서 최후의 저항을 위해 체력을 보존하는 게 낫다.
"네, 알겠습니다. 미카?"
“꺄악! 싫어-놔! 걸오야, 놔아아아악!”
걸오는 일어서며 미카를 잡아 끌었다. 용감무쌍한 무어인 전사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악했지만 결국 걸오의 손에 대롱대롱 들렸다. 총알받이 하나 선정완료.
“야, 도리볼. 너도 가자.”
“어~어? 난 왜에?”
경험만큼 눈치도 빠른 도리볼은 노골적으로 빠지려는 분위기다.
“새캬, 짬 되는 니가 커버 좀 해줘야지.”
“솔직하구나.”
총알받이 둘 선정완료. 허나 걸오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이 간 곳은 함장실이 아니었다. 닥탄 스제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현재 담프사의 바다에 착수해 있는 아이사타호의 외부 출입구였다.
"함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걸오의 질문에 닥탄 스제거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펼쳐진 푸르디 푸른 바다. 그리고 옆에서 눈을 번쩍거린 스퀵테르인. 이 전투종족의 눈에 빛이 났다는 것은 즉.
"난 튄다!"
사태를 파악한 걸오가 재빨리 날아올랐으나 이미 늦었다.
"닥탄 걸오님. 저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부디 원망 마시길."
스제거 중령은 담프사 궤도기지에서의 해병대원들과 비교가 안 되는 베테랑. 왼팔로 날아오르는 걸오의 다리를 잡아채는 동시에 비틀어 탈골시켰고 오른손으론 걸오의 눈을 후벼 파면서 목을 부러뜨렸다. 마무리로 무릎을 차올려 척추를 꺾고는 바다에 던져 넣었다.
-첨버덩
청량한 소리와 함께 걸오는 바다로 빠졌고 다행히 이번 목표물이 아니어서 물에 빠지지 않은 미카는 벌벌 떨며 훌쩍거렸다.
“우에에~중령니이임. 걸오를~근데 난 안 그랬어요. 빠트리지 마세요. 후에에엥~.”
“음, 난 걸오 소령님만 잡아오란 명령만 받았다네.”
“어, 저기, 이거 뭡니까?”
실로 전광석화 같은 활극에 도리볼은 잔뜩 경직했다. 나름대로 육탄전에도 자신 있다고 생각한 도리볼이었지만 방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생물체가 할 행동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도대체 걸오는 왜 이런 공격을 받아야 하는가?
"히이잉~잉잉잉~.”
눈물로 범벅 된 미카가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가 걸오가 빠진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랬다. 걸오는 아직 떠오르고 있지 않았다.
"근데 여긴 아마 식인상어 출몰지역일 텐데요? 빨리 끌어내야 됩니다."
"아아, 식인상어라면 저거? 쿨쩍."
미카는 아직도 혼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수면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담프사에 서식하는 원시상어 수십 마리가 배를 뒤집은 채 둥둥 떠있었고 그 부분은 물이 아니라 숫제 피바다였다.
"그러니까…이거. 뭐냐니까요?"
사태파악이 안 되는 도리볼이 다시 미카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아무리 상어라도 라출노그인한텐 안돼. 파워도 스피드도 딸리는걸.
게다가 상대는 보통도 아닌 왕족에다가 유명한 전사로 이름난..."
“트어어!”
순간, 수면에서 뭔가가 비명과 함께 뛰쳐나왔고 그것은 아이사타호의 선체 표면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아~사람살려!"
"걸오야앙~."
"걸오구나."
이제야 도리볼도 대강 짐작이 갔다. 이유는 몰라도 저 물 밑에 있는 것은-그러니까 지금 막 걸오의 다리께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이사타호의 함장인 모우였고 이 살벌한 수중종족의 힘 앞에 걸오는 쪽도 못쓰고 깨지고 있는 것이다.
"미카야! 미카야! 으어어!"
유선형의 라출노그인이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도망치는 지구인의 허리를 채어 물고 다시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걸오는 반항 한번 못하고 잡혀 들어갔고 수면에는 물보라가 한 번 일었을 뿐 도로 잔잔해진걸 보니 아마도 꽤나 깊숙이 끌려들어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양반은 대체 왜 저런답니까, 중령님?"
이번 도리볼의 물음에야 미카가 간신히 울음을 그치며 대답했다.
“으응, 뭐긴, 벌받는 거지. 흑, 우리가 17연대 시절에 저거 무지 당했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거나 작전 때 눈밖에 난 녀석은 조용히 방으로 불려가거든.
훌쩍, 고급장교용이라 물이 가득 찬 모우 함장님 방에 두근두근 들어갔다가
뭔가 뒤에서 잡아채는걸 느꼈을 땐...잉잉잉.”
-걱정과는 달리 건강해서 다행이구나.
모우의 초음파가 간신히 맞붙은 걸오의 두개골을 울렸다.
-저 분명히 사고 친다고 미리 경고했을 건데요?
물에 빠진 뒤로는 문자 그대로 숨돌릴 틈조차 없었다. 걸오는 지금에서야 피부로 물속의 산소를 호흡하기 시작한 것이다.
-듣는 맛과 보는 맛은 또 다른 법. 알게 해주랴?
-대화로 해결합시다. 함장님
간신히 모우의 화가 식었는데 다시 돋굴 필요는 없다. 또 한번 난도질 당하면 제아무리 지구인이라도 재생하기 힘들다.
-뭐 어차피 좋게 좋게 해결되었잖습니까?
근데 저도 뭐 좀 궁금하거든요?
어차피 ‘지극히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슬슬 걸오가 물어봐도 될 차례다.
-쯧. 무엇이 알고 싶은고?
-여러 가지인데, 함장님은 침투부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영 궁금해서 말입니다.
-흥, 일년간 반폐인으로 살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려나?
반폐인이 아니라 완전폐인이었지만 걸오는 쓰게 웃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이번 정보는 템에게서 얻은 것이니라.
내용은 뻔한 황태자나 왕자들의 서열싸움 아니겠나?
담프사를 공격하려는 측과 정보를 흘리는 측의 싸움에 우리가 끼인 거지.
놈들이 이렇게 분열하지 않았더라면 연방은 진작에 함락당했을 것이야.
템 제국은 절대적 지배자인 황제와 그에 복종하는 수많은 왕국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는 것은 바로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다. 이 황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연방과의 전쟁 중에도 끊이지 않았으니 지금에야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근데 우리 쪽도 문제가 있어 보이던데요?
아이사타호는 왜 존재합니까? 전쟁은 끝나지 않았나요?
이건 전성기 이상의 군비확장이에요.
-오오, 잘 물어봐 주었네, 걸오 소령!
아이사타호의 존재 이유는 바로 새로운 전장에서 새로운 적과 싸우기 위해서지.
전쟁은 끝났다지만 정확히는 종전이 아니고 휴전일세.
그것도 오직 제국과 연방간의 휴전 조약이지.
그러니 템 제국이 아닌 템 왕국과의, 총력 전쟁이 아닌 소규모 전투가
발생할 거란 예상은 이전부터 해왔었고 실제로 들어맞았지 않나.
또한 이 외에도 전후 연방 각지에서 일어나는 불만세력들의 소규모 반란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힘이 필요하지.
그렇게 말하는 모우의 표정은 살기등등했다. 아까 걸오의 허리를 끊어놓을 때도 저 정도의 표정은 아니었다.
-라는 것은 말라죽을 놈들의 헛소리고. 결국은 놈들과 같은 이유일세.
템과 같은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
-연방 내부의 세력 싸움이란 말씀이십니까?
반문하는 걸오를 모우는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게 걸오 자네의 단점이야.
눈앞의 칼은 무서워하면서도 이겨내려 하지만 등뒤의 칼은 애써 없는 셈 치지.
언젠가 그 버릇 때문에 자네는 크게 다칠 게야.
걸오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타인을 통해 확인 받으니 더욱 처참해지는 기분이다. 자신이 목숨을 걸었고 전우들이 목숨을 바쳤던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자네도 궁금하지 않나? 존재조차 몰랐던 메디우급 폭탄에 대한 정보가
대체 누굴 통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구역질 나는 종족과 파벌간 세력싸움 외엔 무어가 있겠나.
당연히 아이사타 계획과 우리도 이미 이 싸움 속에 서있다네.
톱니를 악문 모우가 말을 이었다.
-짐의 사견으론 이번 사건의 시발점은 자칭 온건파 놈들은 강경파를 실각시키기
위해 메디우급 폭탄의 존재를 흘린 것이라고 보네.
그리고 이를 안 강경파에선 부랴부랴 무마하기 위해 가장 완성된
본함을 투입하려 했고 함장인 짐으로 하여금 이 미끼를 물도록
지금껏 격리시켜왔던 자네를 담프사 궤도기지에 옮겨놓았을 테지.
걸오가 메디우급 폭탄이 있는 담프사 궤도기지로 오고, 침투부대의 존재가 탐지되고, 이어 아이사타호가 담프사로 급파된 것. 역시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흐응, 이제껏 자네를 만나지 못하도록 갖은 수작을 부려왔기에
분명 다른 간계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었으나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수작. 그 얘기는 미카로부터 들었다. 서로간의 연락을 조작한 것. 다시 만나려는 17연대의 생존자들은 중간에서의 조작에 가로막혀 만날 수가 없었다. 하긴 그럴 것이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모우의 힘이 커지는 것은 그 어느 쪽에도 좋은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건 미카에게 들었습니다. 의외로 치졸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미끼인줄 알면서도 낚인 거에요?
-그래야 미끼를 드리운 놈을 잡을 수 있지 않나.
모우의 톱니들이 살벌하게 맞물렸다. 걸오는 잠시 모우를 낚았다고 착각했을 이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앞으로 그들에게 벌어질 환란에 비하면 방금 걸오가 겪은 사소한 사고는 봄날의 햇살보다 따스한 것이리라.
-근데 아이사타호는 왜 탄 겁니까? 그때는 제대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또 이런 추잡한 권력 싸움에 질려서 라출노그를 떠나셨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어릴 적 선왕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이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모우의 부왕이라면 전 라출노그 연합왕국의 대표국왕이며 지난 대전 때 전사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복수라고 말했지.
킬킬대는 웃음대신 꿀럭거리는 거품이 걸오의 폐에서 올라왔다.
-아이고, 그때는 몸만 아니라 대가리 속도 아이였군요.
모우도 쓰게 웃었다.
-그러자 선왕께선 웃으면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사랑이라고.
-현명한 분이셨군요.
-그렇지. 허나 아직 치기 어렸던 나는 다시 우문을 했다네.
나라와 동포가 고통을 겪어도 복수 대신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던 이가 죽어도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어마마마가 그렇게 죽어갔는데 그딴 사랑 타령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모우의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후회와 회한의 빛이다.
-선왕께서는 다시 쓸쓸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적을 죽이고, 적의 부모를 죽이고, 적의 자식을 죽이고,
나아가 적의 나라를 부순다 한들 무엇이 남느냐.
알량한 쾌감에 만족하는 너만 남는다.
나라면 사랑하는 반려를 만나 사랑하는 자식을 낳고,
사랑하는 가정을 꾸리고, 나아가 우리의 자식들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적마저도 사랑하겠다.
-선왕께선 또한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렇지. 짐은 어리석어 이제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네.
그래서.
비늘과 아가미, 지느러미가 활기 있게 움직이더니 세찬 물결과 함께 모우가 몸을 틀었다.
-이제 전쟁은 끝내야지. 살기 위해 사랑싸움할 시간은 줘야지 않겠나.
-호오, 그래서요? 박살낼 적은?
-짐의 뜻에 거슬리는 놈은 누구든지.
-누구든지?
-누구든지.
멋지게 결정됐다. 아이사타호는 싸워 나갈 것이다.
이제 시비 걸려고 눈알 벌개진 템 놈이든, 권력과 세력싸움에 상판 노래진 연방 놈이든,
피를 원하면 스스로의 피바다에서 헤엄치게 해준다.
힘을 원하면 극상의 폭력을 직접 체험시켜 준다.
어떤 거창한 대의나 같잖은 명분도 필요 없다.
정의? 지랄한다.
대의? 염병한다.
그런데 지랄을 하던 염병을 하던 좀 살만할 때 하면 안될까? 앞으로 찌르고 뒤에서 찔리는 짓은 그만 좀 하자.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겁니까? 꽤나 모순적이군요.
-생명을 살리고자 생명을 빼앗는 군인이 무슨 망언을.
다시 폭소와 함께 바닷물이 걸오의 폐와 뱃속으로 넘쳐 들었다.
-잠깐, 근데 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다시 말해 두어야 한다. 자신이 왜 싸우는 지를. 어째서 종족을 등지고 무의미한 살육을 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행동 때문에 모우와 동료들이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부탁할 필요 없네. 다 아는 것 새삼 말할 필요 무에 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어랍쇼? 진짜루? 내가 뭐라고 말할 줄 알고요?
-무엇이든 허하노라. 이 모우에게 있어 그대 걸오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그러자 걸오는 씨익 웃으며 모우의 등지느러미를 잡았다.
-좋슴다. 자! 그럼 놀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제 3회 모우 수상쑈! 쑈! 쑈우!
-…짐에게 등에 업을 자를 선택할 권리 정도는 있겠지?
비명 대신 헛물만 잔뜩 켠 걸오가 다시 심해로 끌려갔다. 이러니까 사람은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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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구버전에선 걸오가 여기서 아이사타호로 끌려갔습니다.
덕분에 대폭 고쳤습니다.
자 오타 지적입니다.
스제거 [[B]]중령[[/B]]이 걸오 [[B]]소령[[/B]]에게 존댓말.
무극님 연참 감사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