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宙易)
글 수 47
-통쾌해서 이히히히, 신나서 뭐야 간단하잖아! 이게 그 해결책이다!
제루님이 더듬이로 계기판을 후려칠 때 마다 영상기에는 담프사 궤도기지의 모습과 대략적인 작전 내용들이 올라왔다.
-안쓰러워서 함장님, 뭘 그리 고민하시오?
의기양양 지금 문제는 궤도기지가 너무 무거워 견인하지 못한다는 거 아닙니까?
잘난 척 그러면 견인 가능한 크기로 뚝 잘라버리면 되잖소?
지금 제루님이 제시한 작전과 영상은 길다란 담프사 궤도기지를 요리 자르고 저리 썰어 메디우급 폭탄이 들어있는 창고 주변만 발라낸 다음 아이사타호로 견인한다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었다.
“관령, 그건 나도 생각해봤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현재 아이사타호의 화력으론 불가능해.
함포 계열은 동력문제 때문에 사용할 수 없고, 탄두 계열병기는 아예 없지.
또 스타파이터들도 지금의 장비와 설정으론 무리일세.
만약 그에 맞게 무장한다고 하면 그 시간에 이미 궤도기지는 낙하해버리지.
설령 담프사의 방어부대가…”
-므흐흐흐! 그흐흐흐! 우헷헤헤헤!
그러나 제루님은 아랑곳 없이 계속 웃고만 있었고 그 웃음 속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모우도 살벌하게 웃었다.
“호오, 자네 방법이 있는 게로군?”
-저항해봤자 소용없다!
뜬금 없는 대답. 그러나 제루님의 이 말에 걸오와 미카는 움찔했고 모우의 미소는 더욱 살기를 띠었다.
“음, 좋네! 내 모든 것을 용서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모우의 호쾌한 대답과 함께 알 수 없는 내용의 대화가 끝났고 이어서 차단막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담프사 궤도기지를 파괴해 일부만을 견인한다.
각 목표 부분을 지정할 테니 즉시 필요 항목에 대한 세부계산을 하라.”
함장 모우의 명령에 함교 요원들은 각자 자신의 단말기에 달라붙었고 곧 메인 스크린에 상세한 작전 내용과 목표, 그리고 필요한 수치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담프사 궤도기지 사령관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둘러만 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쭈뼛거리며 물어봐도 소용없다.
“저기 모우 함장, 이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설명을 좀…”
“아까 들었지 않소. 상관없다, 견인대상은 안단티켈로 보강되어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설정하라.
에이이 바보 같은 놈! 수단과 방법은 알 필요 없느니!
작전입안자가 제루님 관령이다!”
“그렇지, 관령. 궁금한 것이…”
-대가리를 박살낼 어차피 박살낼 건데 세세하게 할 필요 없어.
답답해서 그냥 대충 근사치만 뽑아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이런 갈아마실 창고만 꺼낼 필요는 없다니까!
한탄하며 대충 현재 동력으로 견인 가능할 크기면 된다고.
존마난 프실론 새끼가 뭡니까? 아까 얘기할 때 뭐 들었습니까?
물론 기지 사령관도 듣긴 했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생뚱맞은 선문답을 해놓고 입을 싹 닫아버리면 연방 최고의 두뇌를 자랑하는 프실론인이라해도 별수 없다. 그런데도 모우와 제루님은 기지 사령관을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만 열심히 바쁘다.
“이곳이 작전을 위한 타격지점들인가?”
-예, 이곳들만 요렇게 파괴한다면 그 창고를 견인하는데 문제 없습니다.
모우와 제루님이 쑥덕거리는 영상을 옆에서 훔쳐본 기지사령관은 드디어 폭발했다.
“이것 보세요들! 이걸 도대체 무슨 수로 갈라놓는단 말입니까?
물론 지금 궤도기지는 어떠한 방어장치도 없고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라 파괴하기는 쉽겠지요.
그러나 지금 설정한 목표지점들은 크기도 크기려니와 안단티켈로 보강되어있어요.
그런 곳들을 정밀하게 파괴해서 분리하는 작업은 직접 공병대를
투입하지 않고서는 무리입니다.”
기지 사령관이 분기탱천해서 눈을 빛내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1로아도 안 되는 가분수 종족이 그래 봐야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귀여울 따름이다. 불쌍한 프실론인은 계속 무시된 채로 수수께끼의 작전회의는 계속되었다.
-단호하게 자, 이제 걸오 너는 나를 따라와라.
제루님은 걸오를 잡아채며 통신기로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대에 가득 차서 친위대들은 들어라!
지금 즉시 제 1격납고로 달려가라! 거기엔 치두남이 있다.
그리고 도착 즉시 '치우 계획'을 시작해라. 나도 곧 그리로 가겠다.
명령을 마친 제루님의 겹눈은 불길하게 번득였고 통역기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키득거림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치우란 단어를 들은 걸오의 안색이 변했다.
“관령님, 치우 계획이라뇨? 그걸 지금 하자고요? 당신 제 정신이쇼?”
치우 계획은 과거 걸오와 제루님이 음흉하게 획책했던 치두남 강화계획이자 두 사람의 막 나가는 악취미가 응집된 물건이다. 그런 것을 행성파괴폭탄이 낙하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 거론하니 막 나가는 걸오로서도 뜨악하다.
-무아하하하하!! 희희낙락 당연하지 않냐!
난 이날이때이순간까지이런상황에서이런것을 해보고 싶었어.
더듬이를 벌렁이며 걸오! 이번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으랏차차참, 뻔뻔하게 함장님. 제 치우 계획에 대한 최우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감탄하며 역시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제루님이 어항 앞에 넙죽 엎드릴 때 모우가 다시 하문했다.
“헌데, 그 치우 계획. 시간 내로 가능하겠는가?”
-저항해봤자 소용없다!
“과연 믿음직스럽도다.”
역시나 알 수 없는 문답이다. 물론 이번에도 당사자들에겐 각각의 미소가 떠오른다. 제루님의 발작적인 더듬이 미소, 모우의 살기 가득한 미소, 그리고 미카의 순진무구한 방관자적 미소.
“관령님, 지금 뭡니까? 치우 계획이라면 옛날에 둘이서 호작질한 거 아닙니까?
그걸 뜬금없이 왜 지금 꺼내냐고요?”
걸오는 제루님에게 끌려가다시피 고속복도에 올라탔고 그 뒤를 미카가 쪼르르 달라붙었다.
-신나서 음냐핫핫핫핫!!! 다~나만 믿으라구! 이번 작전엔 네 치두남이 핵심이야!
제루님이 아까부터 치우 계획, 치우 계획 노래를 불러 제끼는 게 걸오는 영 불안했다.
“혹시 저보고 치두남 타고 궤도기지 썰라는 얘깁니까?
-쪼개며 이제야 알았냐?
언제나 그렇듯 이런 종류의 예감은 멋지게 적중한다.
“아오~.”
“엥? 치두남으로 그게 되요? 걸오야, 걸오야, 치우 계획이 뭔데에? 걸오야?”
미카의 세 눈이 재미난 것을 찾은 듯 또랑또랑 빛난 반면 걸오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 내렸다.
“어, 음, 치우 계획은 대스타파이터 섬멸전용으로 치두남을 개량하는 건데 말이지.
일단 화력강화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수의 전투기 클래스를 대상으로 하는 거라
저런 떡대 좋은 거 뽀갤라면 세월아 네월아할텐데….”
-음흉하게 웃으며 화력강화라면서 한방이 빈약하면 심심하지 않은감?
그렇게 말하는 제루님의 더듬이 움직임에선 격동하는 케트쿤인의 엔지니어 혼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만나지 못했던 동안 ‘제루님만’의 치우 계획은 걸오로선 도저히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진화한 듯싶다. 그것도 볶음밥과 만년필 사이의 갭을 가지고 말이다.
“대강 짐작 갑니다. 아까 격납고에서 호들갑을 떨었죠? 그때 아주 뻬빠질하는 건데.”
-주체 못해서 므하하하, 모우가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어. 게헤헤헤
“아앙, 나 전대장이에요. 무슨 일 인지 가르쳐 주세요오!”
-기다렸다는 듯이 에잇! 닥쳐라.
나는 아직도 네 년이 지난 예산안 회의때 딴지 건 것을 기억하고 있어!
“우에에! 아니에요! 얼룩불꽃은 정말 좋은 기체에요.
치두남 같은 삼류 거지 깽깽이와는 비교가 안 되는 멋진 스타파이터입니다.”
“이런 썅년.”
세 명이 시끌거린 것도 잠시, 곧 고속복도는 1번 격납고에 도착했고 허둥지둥 입구로 뛰어나온 걸오는 한 떼의 정비공 무리가 마치 사탕 위의 개미떼 마냥 자신의 치두남에 달라붙어 열심히 해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악! 내 치두남이잇!”
이 정비공 무리들이 바로 아까 제루님이 말한 그의 친위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제루님이 도착하자 미친 듯이 날뛰며 그를 맞이했다.
“제루님! 제루님! 제루님!”
-흡족한 듯 그래, 그래. 진도는 있는고?
제루님이 정말 흡족해 하며 주변을 둘러볼 때 즉시 정비반장이 달려와 부복했다.
“불가능합니다. 각하께서 지시하신 계획을 시간 내에 하기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호쾌하게 크하하하! 입맛을 다시며 그렇다면 제법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구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제루님이 더듬이를 까닥거리며 자신의 전용장비를 챙겨 치두남의 앞으로 걸어가자 모든 대원들은 숨을 죽이며 그를 주목했다. 공학계의 거성, 정비반의 전설, 기술부의 신, 제루님. 그런 그가 직접 장비를 들고 작업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제루님이 드라이버를 내리꽂으며 외쳤다.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이여!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여!
내 앞에선 저항해도 소용없다!
제루님의 이 말에 격납고에선 난리가 났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항복해도 소용없다! 반항해도 소용없다!”
“우오오! 죽여라 죽여!”
“나의 육각 펜치에 자비심이 있을 쏘냐! 쿠케케케케!”
이게 정비사들의 대화인지 해병대의 대화인지 당최 구분이 가질 않는다. 실제로 17연대 시절 정비 중이던 모우의 기함에 템군이 기습공격을 감행, 활주로 쪽으로 해병대와 기갑부대를 침투시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종되었다.
당시 함내 보안대가 결사의 각오로 출동했지만 활주로 어디에도 전투의 흔적은 없었고 유유히 청소작업을 하는 제루님과 그의 부하들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전설을 아는 걸오에게도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단지 눈을 한번 깜빡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대공포화를 비웃는 외부장갑이 모습을 달리하고, 미사일의 공격에도 뒤틀리지 않는 내부골조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눈 한번 깜빡일 때 마다 치두남의 모습이 바뀌고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음음음음음좋아좋아동력로와연결된배선은모조리차단되었겠지아냐연료탱크는확장형으로할필요없어그대로놔둬그리고치두남의항법자료데이터포맷은끝났을테니서둘러서갱신시켜라대기권돌입임무다해병대상륙정것을끌어와조금손만보면될거야아뿔사걸오는그런거안쓰지실드는한3등급위의걸로교체해뭐시라여유공간이없어할수없군실드는2등급상위버전의것으로하고대신장갑을더늘린다기체중량이늘어날테니추진계열쪽도보강을하는거다.
이 북새통속에서도 제루님은 막힘 없이 해체와 조립명령을 동시에 내렸고 그의 부하들도 대장을 닮아 난잡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걸오는 혼돈과 질서가 멱살잡고 나뒹구는듯한 광경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호출기의 울림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령, 나다. 짧은 시간이나마 간략하게 브리핑을 하도록 하지.
현재 궤도기지는 본 함의 견인으로 낙하속도를 늦추고는 있으나
237초 후면 제 1한계선에 도달하고 그로부터 125초가 지나면
제 2한계선마저 돌파하게 된다.
“예? 한계선요?”
-아까 듣지 못했느냐? 각각 궤도기지와 폭탄의 견인 한계지점을 뜻하며
최후의 제 2한계선은 아이사타호 트랙터빔의 한계범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궤도기지가 제 2한계선을 돌파해 버리면 창고를 분리한다 해도
견인할 수 없으므로 작전은 실패, 담프사는 끝장난다는 것이다.
얼추 6분이 지나면 궤도기지는 제 2 한계선에 도달한다. 즉 6분 뒤면 행성파괴용 폭탄 30기가 담프사로 떨어지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1 한계선은 어떤 겁니까?”
-제 1 한계선 전에 폭탄을 꺼내면 궤도기지의 완전 파괴와 연소가 가능하다.
다만 제 2 한계선을 지나면 폭탄 견인 후 기지를 파괴해도 그 파편의 낙하에
담프사에 피해가 생기는 것이지.
“뭐, 어떻게든 1번 전에 끝장 보죠.”
-무리할 필요는 없노라. 궤도기지가 낙하한들 수천만 명이 죽을 뿐이다.
괜히 만용을 부리다가는 담프사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지금은 가장 중요한 목표지점의 정확한 파괴에만 최선을 다할 뿐,
그 외의 것은 생각지 말라.
“만용이고 최선이고 그런 거 없습니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겁니다.”
-…짐이 말을 더해 무엇 하랴. 앞으로의 일은 그대 손에 달린 것을.
격려 따위는 필요 없겠지.
출격하여 그대의 소임을 다하라.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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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통신코드로 뜻은 Affirmative.
반대로는 10-9 Negative.
아시는 분 계셨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