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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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누구지?’
미라는 설마 밖에서 한참 싸우고 있을 고블린들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고블린들이 구시대의 유물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지능이 없다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었다. 그 유물이 고작 ‘잠겨진 문’이라고 할지라도.
미라는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본인은 은폐를 할 수 있는 반면, 문을 열고 들어올 상대방은 탁 트인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최소한 난 상대방을 먼저 파악할 수 있겠어.’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도 그런 미라의 이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쾅! 쾅! 뻐엉!
경첩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떨어져 나간 문짝이 그대로 돌진해오는 모습에, 미라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기계 뒤로 몸을 숨겼다.
‘저런 무식한...!’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은 비밀문 옆 벽에 처박혔다. 상대방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토마호크를 바닥에 내던지면서 재빠르게 엄폐할 벽으로 몸을 숨겼다.
“여어, 여기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들었다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느릿하면서도 혀끝이 살짝 꼬부라진 여유로운 말투가 미라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최소한 이런 개판 속을 한두 번 휘저어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스르륵, 총을 빼드는 묵직한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소형화기는 아니다. 소리로 봐서는 장총인 거 같은데... 처음에 기습했어야 했나.’
노인은 두 손을 써야하는 장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엄폐를 하고 있더라도 총을 빼들기 직전, 빈 손일 때 기습한다면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방을 미리 파악하지 못해 조심했던 판단이 실책이 되었다.
‘대체 누구지... 이 근처에는 사람이 살지 않을텐데...’
근처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몇 시간 전부터 자신을 미행했다는 뜻이고, 처음부터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추적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유만만하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상대방도 처음 질문을 던진 뒤로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상대방 또한 이쪽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시간을 좀 벌 수 있겠어.’
상대방이 실력만큼이나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그렇게 판단한 미라는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소란을 들은 고블린들이 그의 시선을 끌어줄 것이 분명했다.
“넌... 누구지?”
“엑?”
하지만 그보다 먼저 노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계장치 속에 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넌 또 뭐야?”
‘탕!’하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불안감이 미라를 엄습했다. 다급해진 그녀는 앞으로 나섰다.
“잠깐! 그 자는 아무 상관이 없어! 쏘지 마!”
“으음? 으아하하하! 이거 쥐새끼가 아니라 웬 숙녀가...오잉?”
호탕한 웃음이 섞인 특유의 목소리가 요상한 의문으로 끝났다. 그리고 문 밖에서 나체로 당당히 서있는 남자의 물음이 이어졌다.
“왜 자꾸 나랑 옷을 번갈아 보는 거지?”
“으하하하하하하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호쾌한 웃음이 이어지며, 벽 뒤편에서 노인이 남자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나타났다.
덥수룩하게 자란 회갈색 수염이 웃음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파들거렸고,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가 눈을 덮어 표정을 보기 힘든 딱 노숙자 꼴의 늙은이였다.
“이거, 내가 너무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건가? 취향 한번 독특하구만! 이런 으스스한 유적지에서 그렇고 그런 짓이라니!”
말을 마친 노인은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그리고 그런 노인과 벌거벗은 남자를 본 미라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저랑 아무 상관없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미라는 노련한 상대방의 대처에 잇소리를 흘렸다.
'젠장... 분위기가 무너지자마자 천연덕스럽게 모습을 드러냈어... 거기다가 자연스럽게 나와 관련 있어 보이는 사람의 뒤에 숨어서 인질로 삼고 있다... 대체 뭐하는 노인이야!'
노인은 남자에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있지만 그의 뒤에 숨어서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총을 든 반대쪽 손은 여전히 벽 뒤에 숨겨둔 채로 천연덕스럽게 사람을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누구에게, 왜 추적을 당한건지 전혀 파악을 할 쑤 없다는 사실과, 영문도 모른 채 노인의 손에 넘어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할아버지의 유품...손자, 혹은 숨겨둔 자식일지도 모르는 남자 때문에 미라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일에 휘말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췌에이! 진짜로 옷 한오라기 벗은 게 없잖아? 아니면 급하게 주워 입었나? 어디 팬티 같은 거라도 안 떨어뜨렸어?”
“없어요!”
미라는 음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노인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변태 노인일지도...!’
“팬...티?”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남자는 어색한 발음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어잉? 이놈 상태가 왜이래? 꼬마야, 이름이 뭐니?”
딱 납치하려고 어린아이를 꾀어내는 범죄자의 모습 그 자체인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전혀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질문을 되새겼다.
“이름...?”
-아마 의식은 있을 겁니다, 박사님. 이참에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죠.-
-그럴까? 아가야, 네 이름은...-
그로부터 흐릿하게 떠오르는 어떤 기억을 되살린 남자는 기억 속 여인의 말을 따라 읆조렸다.
“이...한...”
“허, 이름이 외자야? 그래, 한아. 팬티란 건 말이다... 네 여기 달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다운 거란다. 그게 이름이 뭐라고?”
노인의 질문을 받은 이한은 그 잘 생긴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팬티!”
“아니야아아아!!”
그런 이한의 미소와, 그로부터 나오는 대치가 불가능한 불쾌한 단어의 조합에 미라는 소리쳤다.
“옳지! 그리고 여기 달린 물건이 뭐라고 했지?”
“빛나고 아름다운 거!”
“아악!! 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이 노망난 변태 늙은이야!!”
더 이상 두고 보기 어려운 꼴사나운 모습에 참지 못한 미라가 앞으로 나섰다.
철컥
“윽...!”
하지만 노인은 미라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에 비해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런 금박 장식이 박힌 더블배럴 샷건이 미라의 배를 찔렀다.
“허리가 두 동강 나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아가씨. 아니... 이미라 양.”
그 한마디에 조금 전 노인의 주변에서 느껴지던 허술한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칼날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미라를 옭아매었다.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군...!’
미라는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노인의 정체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 대체 왜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그 실없는 말들은 다 의도가 있었던 건가?’
미라와 노인 사이에서 살벌한 시선들이 뒤엉켰다. 주변의 사람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상대방의 수를 읽기 위해 고심할 때, 오직 이한만이 맑은 눈으로 자신의 물건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지?”
“정체가 뭐냐고?”
노인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시-익 웃음 지었다. 그리고는 덥수룩한 회갈색 눈썹이 서서히 치켜 올라가며, 다른 색은 하나도 없이 오직 새빨간 색으로만 이루어진 눈이 지옥처럼 펼쳐지며 미라의 시선을 압도했다.
“혹자는 야차... 누군가는 오니... 잘 모르는 이들은 도깨비라고도 부르지.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날 이렇게 불렀다.”
노인의 얼굴이 불현 듯 앞으로 튀어나오며 커다란 솥단지 같은 아가리가 쩌억 벌어졌다.
“악마라고!!! 크흐흐하하하하하하하!!”
새빨간 눈을 치켜뜬 채 웃어재끼는 노인의 모습에서는 불과 몇 분 전에 보였던 호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광기에 젖은 모습 뿐이었다.
“그럼... 당신은 나쁜 사람인가요?”
“하하...뭐?”
“나쁜 사람이에요?”
‘드르르르르륵!’
‘타다당!’
노인이 이한의 질문에 당황해 하며 눈을 맞추고 있는 사이, 사무실 바깥의 저 먼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지원군은 나만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군...’
정황상 총소리의 근원지는 노인의 지원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은 즉, 미라가 기다리던 고블린들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라는 기회를 봐서 노인의 총을 빼앗고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노인이 이한에게 시선을 빼앗긴 지금이 계획을 실행하기엔 적기였다. 아주 조금 더. 미라는 총을 쥔 노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조금만 더...’
“나쁜 사람 맞아요?”
재차 확인해오는 이한의 질문에, 한순간 노인의 긴장이 풀어지며 예의 그 여유로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지금이다...!’
“그러엄, 아저씬 아주 나쁜 사람이지이이이익!?”
쿠웅!
그렇게 노인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한의 손에 붙들려 사무실 바닥에 처박혔다.
“...에엥?”
덕분에 노인을 제압하기 위해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미라는 순식간에 노인을 내던져버린 이한을 보며 맥이 탁 풀려버렸다.
“나쁜 사람... 내 몸에 손 데지 마!”
‘뭐야... 왜 이렇게 쌔?’
심지어 나가떨어진 노인을 노려보고 있는 이한은 입으로 ‘시익! 시익!’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을 뿐,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일단... 여기서 빠져 나가야겠는데...’
노인은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상황이 일단락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미라에게는 이한을 데리고 연구실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달래지...?’
미라는 이한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덩치로만 보면 20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지만 훤칠한 키와 치렁하게 자란 머리로 인해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그 이상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의 잘생긴 얼굴은 분노로 주름진 채, 씩씩 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그의 표정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미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달래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했다.
“저기... 이...한아?”
그러나 전라의 민망한 모습에 온 몸으로 ‘난 화나있다’라고 주장하는 듯 한 덩치 큰 남성을 ‘달래’기에는 신체적으로도, 받아들이는 인식에 있어서도 미라로서는 부담이었기에, 그녀는 일단 이한을 안심시키기 위해 천천히 어께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한아?-
그렇게 이한에게 들려온 미라의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그 목소리와 미라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이한은 안정을 찾는지 조금씩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에서 무의식적인 말 한 마디가 세어 나왔다.
“엄마...”
“뭐라고...?”
미라는 그 말에 대해서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제이가 나타났다.
뽁! 뽁! 뽁! 뽁! 뽁!
“미라! 도망쳐야 돼! 지금 어떤 군인들이 고블린들을 학살하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어!”
‘타다다다다!’
‘키에엑!’
제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소리와 고블린들의 비명소리가 복도를 넘어 들려왔다.
‘생각보다 더 빨라...!’
시간이 없었다. 미라는 재빨리 복도로 나가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총구화염을 확인한 미라는 낭패감에 빠졌다.
“제엔장... 저기부터는 사실상 외길인데...!”
연구소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사실상 군인들을 물리치고 나가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은 셈이었다. 연구실 안으로 몸을 숨긴 미라는 근처에 누워있는 노인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 대체 정체가 뭐지... 너무 조직적이고 실력도 뛰어나...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어때? 빠져나갈 수 있겠어?”
지친 표정으로 탈출 가능성을 묻는 제이에게, 미라는 “기다려봐. 생각중이야.”하고 짧게 대답했다.
“으응, 그래... 알았어...”
제이는 고블린의 침과 이빨자국으로 지저분해진 몸을 이끌고 연구실 구석으로 향했다. 고블린들에게 시달리면서 한 쪽만 남은 칩에 젖은 종이 귀를 들고는 질질 끌며 구석에 도착한 제이는 무릎을 끌어안고는 바닥의 먼지를 만지작 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아... 미라가 시킨 일을 하고났더니 너무 힘들다... 수고해줬다는 한마디라도 해주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그런 제이의 중얼거림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미라는 초조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탈출구... 탈출구가 없나... 이 영감님을 인질로 쓸까, 그 방법밖에는 없나...”
그렇게 제이는 무관심 속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미라가 기절해서 흐느적거리는 노인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고심하고 있던 그때, 이한의 한 마디가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탈출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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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모전 마치고 오느라 연재가 좀 늦어졌습니다.
이번 주 부터 주 1회 연재 재개하니, 잘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