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 - 익 

낡아빠진 문을 열어젖히자, 밖에서 들어온 햇볕이 축축한 방공호 바닥을 길게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런 햇볕 가운데로 민준의 그림자가 포개어졌다.

'분명... 여기 같은데...'

집하고도 멀찍이 떨어져 있고, 풀과 낮은 나무들이 교묘하게 뒤얽힌 곳에 입구가 있어서 하마터면 못 찾을 뻔 했지만, 민준은 여기가 ‘그’가 얘기했던 딸이 숨어있는 장소가 맞다고 확신했다. 당장에 주변에 다른 집도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중요한건 들어오기 전 문에 남아있던 먼지가 지워진 흔적이 바로 얼마 전에 누군가 여기 들어왔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에 햇볕이 닿는 곳 이외엔 어둡고 가라앉은 공기만이 가득한 이곳에 누군가 숨어들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과연 무사할지는 장담하기 힘들어 보였다.

저벅.. 저벅..

사주경계 태세로 걸음을 옮기던 민준은, 좁은 복도에서 거추장스러운 석궁을 등에 걸고 천천히 단검을 꺼내들었다. 재수가 없다면 이미 이곳에 괴물이라도 들어와 있을 수 있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게임의 알림이 민준의 눈앞을 가렸다.

[앞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민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알림을 미처 다 확인하기도 전에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지익... 지익...

'최소한 사람이 내는 소리는 아니다.'

민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최 이 지역에 사는 생물 중에 저런 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니는 괴물이 있는지에 대해선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아... 빠...?"

그런 생물이 없기 때문이었을 지도 몰랐다.

"휴우..."

잔뜩 갈라지고 메말랐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기에 민준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저, 아빠가 시키신 대로... 눈 꼭 감고 숨어있었어요..."

빛이 닿는 곳 까지 몸을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한 소녀였다. 민준을 아빠로 착각하고 있는 듯, 힘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소녀는 계속해서 아빠를 부르며 민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 그래, 햇볕이 등 뒤에서 비쳐서 내 모습이 잘 안 보이는 거구나...'

열네 살 내지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오랫동안 먹은 게 없는지 뼈만 앙상했고, 얼굴은 그간의 고통과 설움을 대변하듯 시꺼멓게 쌓인 때와 눈물 자국으로 지저분했다. 말끔했다면 누구보다 귀여웠을 소녀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자, 민준은 안타까움에 가슴이 쓰렸다. 그런 민준의 속을 알 리 없는 소녀는 아빠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민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은 한정적이었고, 그마저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상단을 습격했던 괴물들이 언제 등 뒤에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민준은 일단 소녀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

"아, 아빠... 그런데..."

하지만... 소녀의 허벅지가 햇볕으로 나오는 순간,

"저..."

민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소녀의 다리는 흡사 썩은 과일처럼 검게 메말라 있었고, 종아리 한쪽에는 종양처럼 생긴 덩어리가 피를 빨아먹는 듯 게걸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시작으로, 소녀의 얼굴에 남아있던 희망이 설움으로 바뀌며 수도 없이 흘러내렸을 눈물길을 따라 또 다시 구정물 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씹...'

민준은 그 모습을 보며 욕지기가 튀어나올뻔함과 동시에 약간의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당장에 빠져나갈 길이 더 어려워졌다는 사실 보다는 눈앞의 처절하기까지 한 소녀의 몰골에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설움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한 민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저 지경까지는 안되지 않았을까...', '그 아저씨가 여기로 숨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꼼짝 말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상단에 끼어있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하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빠?"

소녀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민준은 또 다시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저 애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널 데리러 온 사람이 네 아빠가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민준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고민들이 소용돌이치듯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와중에서 튕겨나가듯 단 하나의 단어가 민준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미안..."

의미도, 목적도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나오는 말은 단 한마디의 사과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소녀의 태도는, 눈에 띄게 돌변하기 시작했다.

"누... 누구야? 우리, 우리 아빠는? 우리 아빤 어디 간 거야? 당신 누구야!"

여전히 메마른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서린 경계심과 실망감은 벼려진 화살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미안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민준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만 했다. 

‘시간은 얼마 없다. 상단을 습격한 놈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고, 그 와중에 소녀의 다리는 움직일 수 없을 듯 보인다. 의술 비슷한 것도 배워본 적이 없는 나로선 치료는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는...’

...설득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리고 민준은 소녀를 들처업기 위해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때, 갑작스럽게 손을 뻗은 소녀가 민준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아빤... 우리 아빠 어딨어..! 날 데리러 온 사람이 아빠가 아닐 리가 없어... 만약 오지 못했다면... 어디 아픈 거지...? 그렇지...? 몸이 안 좋아서 대신 온 거지...? 응...?"

깡마른 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강한 악력이 민준을 붙잡았고, 민준은 그렇게 격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힘과, 무엇보다도 눈빛에 제압된 민준은 소녀를 뿌리칠 생각조차 하지 못 한 채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보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그 무거운 침묵은 솔직한 대답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형태로 소녀를 짓눌렀다.

"설마... 죽은... 거야...?"

"...미안해."

정확히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민준은 생각했다. 자신이 상단에 동행한 것? 그를 두고 도망친 것?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지 못한 것?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자신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단 한마디의 사과. 그뿐이었다. 그러자 민준을 구속하던 소녀의 팔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런 소녀를 민준은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소녀는 기절한 듯 했다.

"하아..."

몸의 긴장이 풀리자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소녀를 깨워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꼭 사과해야겠다...'

아직도 무엇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지만, 민준은 이다음에 꼭 사과를 하리라 다짐하며 기절한 소녀를 햇볕으로 끌고 와 바로 눕혔다. 햇볕위로 나온 소녀의 얼굴은 보기보다 훨씬 더 미인이었다. 네모난 문으로 들어온 햇볕위에 바로 누인 소녀는 마치 밝게 빛나는 관속에 잠든 공주 같았다. 하지만 그 아래로 보이는 검은 종양은 오히려 어두운 곳에 있을 때 보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입고 있던 치마는 검게 타서 살가죽에 늘러붙었고, 뼈 위에 검게 타들어간 살만 붙어있는 다리는 이미 오래전에 제 기능을 상실한 듯 했다. 그리고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 나타난 알림 창은, 이내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다.

[지금의 내 지식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알림창이 전달한 메세지는 분명했다. 그는 소녀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더더욱 가혹한 생각으로 민준을 몰아갔다.

'그냥... 도망쳐야 하나...?'

애초에 그냥 게임일 뿐, 어차피 보는 사람도, 원망할 사람도 없다. 당장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남아있는들 무얼 하겠는가? 그냥 적당히 챙길 거 챙겨서 도망치는 게 오히려 더 나은 일 아닐까? 
극단적인 환경만큼이나 민준의 생각 또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져 가던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줘요..."

소녀의 입에서 생명이 꺼져가듯 힘없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민준은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들을 추스르며 고개를 숙여 소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뭐, 뭐... 라고?"

"절... 죽여줘요..."

소녀의 힘없는 목소리에 담긴 분명한 메세지는, 겨우 추스른 민준의 머릿속을 다시금 복잡해지게 만들었다.

"제... 제가 숨어있던 오, 옷장에... 가보로 내려오는 도끼가 있어요... 그걸, 그걸 드릴 테니까... 나중에... 꼭 저랑 아빠의 복수를 해줘요..."

민준은 소녀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기절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복잡하고 혼란했던 그의 머릿속도 소녀의 말에 착 가라앉았음을 느꼈다.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민준은 죽은 자를 배웅하듯 느릿한 걸음으로 소녀가 숨어있던 옷장으로 향했다.

끼이-익...

지하실 문보다 몇 년은 더 오래되어 보이는 옷장을 열자, 썩은 살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하지만 차갑게 내려앉은 민준의 눈빛은 그런 냄새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옷장 한가운데 놓인 큼직한 도끼에 머물렀다. 고급스런 문양과 장식이 붙어있는 도끼는 민준이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물건보다도 값나가 보였다.

'겨우 복수를 약속하는데 이런걸...?'

지킬지 안 지킬지도 모르는 약속에 이렇게 귀한 물건을 내놓은 소녀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민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알 수 있었던 건, 이 물건을 보상으로 맡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손을 뻗어 도끼 자루를 잡자, 착 감기는 단단한 금속의 느낌이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그 묵직하고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민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라면... 한 번에 끝낼 수 있겠지.'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편하게 해주는 게 맞다. 민준의 생각은 그랬다.
드르륵. 도끼날이 바닥에 끌리면서 소리를 냈다. 도끼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집안에 있는 다른 물건을 챙길 여력도 없이, 이것만 들고 가도 겨우 도망이나 치려나 싶었다. 민준은 그러한 생각들은 뒤로한 채, 소녀의 앞에서 차가운 눈으로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가 누워있는 햇볕이 진짜로 그녀의 빛나는 관이 되어 줄 것이었다.

"나중에... 꼭 사과할께..."

짧은 말과 함께, 민준은 도끼를 들어올렸다.

...퍽!





                                                                                                                                                                 프롤로그.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