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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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남자가 거인의 검을 옆으로 비껴내자, 검은 애먼 바닥을 부수며 그 자리에 처박혔다. 무방비상태가 된 거인은 황급히 검을 회수했지만, 남자가 한발 먼저 그의 손을 박차고 머리를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힘껏 들어올린 검이 등 뒤에서 전방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남자의 시선 끝에는 거인의 커다란 머리가 위치해 있었다.
거인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자신만만한 남자의 얼굴과,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는, 자신이 잘 아는 그 검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별안간 높아지면서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카각!
공중에서 불똥이 튀면서, 날아오던 커다란 강철 볼트는 두 동강이 났다. 자신의 시야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볼트를 바라보던 남자는 그 시선 끝에서 쇠뇌가 달린 손을 회수하고 있는 기어아머를 볼 수 있었다.
“칫...!”
단번에 거인을 제압할 기회를 잃은 남자는 원래 목표였던 그의 머리를 쪼개는 대신, 발로 박차면서 뒤로 물러나기를 택했다.
투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호선을 그리며 본래 서있던 자리보다도 더 뒤로 물러났고, 이마를 채인 거인은 뒷걸음질 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그런 거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노려보며 검을 치켜드는 거인. 그리고 거인의 뒤로 2대의 기어아머가 자리를 잡았다. 보기에는 전혀 싸움이 될 것 같지가 않은 1대 3의 대결구도였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정 반대였다. 마주보는 시선 끝에 불안한 침묵이 이어지고,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만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굳건해 보이는 거인의 모습에는 어딘가 모르게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공격을 결심한 거인은 추켜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전에 본적 없는 독특한 자세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거인의 발이 앞으로 나서며 강하게 발을 굴렀다.
쿠웅!
바닥의 대리석이 깨져나가면서 무수한 파편들이 거인의 발 끝에 뭉쳐졌고, 거인은 발을 회수하는 동시에 늘어뜨렸던 검을 바닥을 쓸 듯 낮게 휘둘렀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넓직한 검 날에 맞은 파편들은 전방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고, 예상 밖의 공격에 당황한 남자는 파편을 피해서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끄아악!”
“으악!”
파편들이 남자의 뒤에 있던 애꿎은 병사들을 덮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를 향해 날려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중에 떠있는 그를 향해 기어 아머의 볼트 2개가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시간차 공격이었다. 남자는 다급하게 검을 휘둘러 하나를 쳐내면서 나머지 하나는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수 있었지만, 공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공격을 직감한 남자는 검으로 방어하면서 몸을 웅크렸고, 거의 즉시에 거인의 검이 남자를 강타했다.
타앙!
강철이 부딪치는 강렬한 쇳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자, 민준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려 뜨렸다. 칼에 맞은 남자는 기둥 하나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처박혔고, 거인은 재차 공격을 위해 칼을 회수했다. 그 과정에서 거인의 망토가 펄럭이자, 민준은 거인의 등 부분에 위치한 젤 같은 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뭐지...?’
민준이 그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사이, 자세를 잡은 거인은 남성을 향해 돌진했다.
쿵쿵쿵 콰앙!
지축을 울리는 발 소리 끝에 거인의 검이 남자가 있던 자리를 강타하자,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면서 거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민준은 그 먼지들 사이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남자는 거인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기어아머를 향해 달려갔다.
“안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거인이 뒤를 보며 외쳤지만, 이미 남자는 펄쩍 뛰어올라 기어아머의 조종사를 향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조종사가 무방비상태로 검에 노출되어있던 그때, 무언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기어아머의 팔이었다.
카가각!
검은 다행히 동료의 방패에 막혀 원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조종사는 검이 방패를 뚫어버리고 자신의 미간 바로 앞까지 도달하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상대적으로 얇고 수수한 장식이 붙은 검의 끝자락이 원래 누구를 찌를 생각이었는지를 각인시키듯 똑바로 그를 향해 있었고, 조종사는 서늘한 소름과 함께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람의 키보다 높은 기어아머의 팔에 박힌 검 때문에 남자는 대롱대롱 메달려있는 모양새였다. 그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박힌 검을 붙잡고 온몸의 반동을 이용해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남자의 반동에 기어아머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렇게 어렵지않게 땅에 발을 붙인 남자의 검은, 순식간에 방패에서 빠져나와 기어아머의 팔 관절을 끊어냈다.
터엉!
떨어져 나간 팔이 바닥을 뒹굴자, 조종사는 중심을 잃은 기어아머가 넘어지지 않도록 남은 한쪽팔로 바닥을 짚으며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그 탓에 조종석은 남자의 검 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고, 남자는 그 기회를 사양하지 않았다.
무심한 듯 어께 위로 크게 휘두른 검 끝에 붉은 액체가 맺히고, 조종사를 잃은 기어아머가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자, 자신을 지켜준 동료가 허무하게 쓰러지는 걸 목격한 다른 조종사는
노성을 내지르며 기어아머의 도끼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내 남자가 쳐들었던 검을 수평으로 눕혀 바닥을 쓸 듯 휘두르자, 검에 맞은 주먹만 한 돌 하나가 기어아머의 조종석을 향해 날아갔다.
“헉...!”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날려진 돌은 곧바로 조종사의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눈앞으로 날아오는 돌덩이에 놀란 조종사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돌을 피하려 몸을 움찔거렸지만, 조종사의 인지 범위를 넘어선 돌덩이는 이미 그의 눈앞에서 멈춰서있었다.
조종석 양 옆의 철골 프레임 같은 기둥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돌의 진행을 막아낸 것이다. 찌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벽에 박혀버린 것처럼 멈춰있던 돌이, 이내 힘을 잃으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려 할 때 거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피해!”
조종사는 무의식적으로 외침의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탓에 그는 자신을 향해 또 다시 날아오는 검을 확인하지 못했다.
푸욱!
...결국 마지막 기어아머 마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리석 바닥에 몸을 맡겼다. 눈앞에서 부하가 쓰려졌지만 거인은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아직 조종사의 머리에 박힌 검을 회수하지 못한 남자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높게 치켜세운 검은 아직 부하의 시신에 신경이 쏠려있는 남자를 산산조각 낼 뜻이 위협적으로 번뜩였고, 금색 실로 수놓아진 문양이 그려진 푸른 망토가 격한 움직임에 펄럭였다. 눈앞에 있는 미처 검을 챙기지 못한 남자를 향해 거인이 검을 내려치려던 순간,
퍽!
한껏 휘날린 망토 아래로 날아든 화살이 거인의 등을 파고들었다.
“허억... 억...!”
숨 한번 내쉴만큼 짧은 시간 만에 승패가 나뉘었다. 거인이 주춤하는 사이, 남자는 검을 회수해 엉거주춤하게 내밀어진 거인의 무릎을 박차고 뛰어올라 아래부터 위로 검을 휘둘렀다.
터엉!
거인의 투구가 벗겨지면서 갈색의 액체와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이내 투구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 때 까지, 거인은 반동으로 턱을 치켜든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싸움을 끝낸 남자는 그때까지 거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전과는 달리 여유넘치던 웃음 대신 씁쓸한 표정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있는 거인의 어께 너머로 득의양양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머저리들아! 내가 말했잖아! 이렇게 등을 노리면 리밍아머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어수선하게 한데 모여있던 병사들의 시선은 그가 쏜 화살이 아닌, 병사에게 몸을 돌려 떠벌리듯 나불거리는 지휘관의 가랑이를 향해 있었다.
“지휘관님... 바지...”
“바, 바지?”
지휘관이 더듬더듬 바짓가랑이를 만지자, 그의 손에 차갑고 축축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 꼴을 보고있던 병사들 사이에서도 킥킥거리는 웃음이 세어나오자, 지휘관은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를 쳤다.
“이 병신들! 이, 이건 적들의 피야! 그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진형이나 유지해! 어서!”
그렇게 병사들이 마지못해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을 본 남자는 픽 웃으며 거인의 등 뒤로 향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그의 발 아래에서는 거인으로부터 흘러내린 알 수 없는 액체가 찰박거리는 발소리를 냈다. 그가 검을 뻗어 거인의 망토를 들추자, 거인의 등에는 젤이 녹아내려 횡 하니 뚫린 자리에 한 기사가 몸을 걸친 채 쓰러져 있었다. 남자는 기사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박혀있는 화살을 뽑아들었다. 싸움의 승패를 결정지은 바로 그 화살이었다. 화살 촉 끝에 맺힌 피는 홀의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볕이 반사되면서 붉은 호박(琥珀)처럼 빛을 발했다. 자신의 옛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얻은 부상처럼, 반짝거리는 화살을 바라보던 남자는 쓰러져있는 기사의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화살을 내려놓았다. 기사는 이미 죽어있었다.
“가시죠.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의 곁으로 다가온 지휘관이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홀 한쪽 끝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노인을 마주봤다. 얼굴이 벌개진 채로 예의 그 특이한 검을 들고 서있는 왕은 몇몇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었다.
이내 걸음을 옮긴 병사들이 도열하고, 남자는 자신의 옛 주군과 마주섰다. 그를 호휘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도 익숙한 얼굴이 몇몇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좀 전에 내려놓고 온 화살을 떠올렸다. ...어차피 모두 죽을 사람들이었다.
왕은 검을 뻗으며 마지막 명령을 외치듯 일갈했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양측의 병력이 서로에게 돌격해 뒤엉키자 장내는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마지막이라는 각오 때문인지, 아니면 왕을 지키던 병사들이라 대단한 정예였던 건지, 수 백 대 수 십의 싸움이었지만 전투는 생각보다 팽팽하게 이어졌다. 처음의 격돌로 반란군의 병사들이 수 십 명이 쓰러져가는 동안 왕의 호위병은 한 두 명만이 쓰러져갔다. 하지만 그 균형은 이내 남자가 전투에 참여하면서 금세 기울어졌고, 그가 최전방에서 검을 휘두르자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한 번에 두셋씩 베어 넘어가면서 왕의 병사들은 기세를 잃고 조금씩 후퇴하고 있었다.
민준은 싸움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병력에도, 기세에도 눌린 병사들에게 더 이상 남은 카드는 없었다. 하지만 투구 아래로 살짝 보인 그들의 얼굴이 절망에 빠진 눈빛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절망스럽지만, 결연하면서도 살의 가득히 무언가를 노리는 눈빛에 민준은 그들이 숨겨둔 한방이 있음을 직감했다. 여전히 기세에 눌려 조금씩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지만,그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제일 뒤에 있던 왕이 홀 반대쪽 끝에 위치한 왕좌에까지 밀려나자, 그는 재빨리 왕좌가 있는 연단에 올라서서 반란군을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자 구슬이 박혀있던 검에 푸른빛이 일렁이면서 남자의 이마 위로 작은 빛 한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이내 작은 빛줄기는 영역을 넓히면서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남자가 서있던 자리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붕이 무너지면서 그를 덮쳤고, 왕을 지키던 병사들은 환호하면서 반격을 위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편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여전히 부른 빛이 일렁거리는 검을 앞세운 왕이 노성을 지르자 왕좌 뒤에 있던 벽이 터져나가듯 무너지면서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반란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골렘 이다!”
흑철로 만든 중무장한 갑옷에, 리빙아머 보다도 커다란 몸집을 지닌 골렘의 등장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휘관마저도 패닉에 빠진 듯 어버버 거리면서 적절한 대처를 취하지 못했다. 왕을 지키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반전된 기세를 타고 소리를 지르며 반란군을 몰아붙였고, 지휘 체계가 실종된 반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전된 분위기는 잔해더미 속에서 날아든 검 하나에 착 가라앉았다. 꽈광!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먼지더미 속에서 순식간에 섬광이 번뜩였고, 그 섬광은 왕의 이마에 가서 박혀 있었다. 어색한 침묵과 정적이 이어지고, 죽은 줄 알았던 남자의 등장에 병사들은 조금씩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애써 지키던 왕이 허망하게 죽고, 그 왕이 조종하던 골렘도 순식간에 무너져버리며, 제압했다고 믿었던 남자까지 잔해더미 속에서 기어나오자, 병사들은 검을 내던지며 제각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반란군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반란군은 환호성을 질렀다. 남자 또한 그들을 보며 웃음을 짓고있던 어느 순간, 그를 향해 단검 몇 개가 날아 들었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크게 검을 휘두르자, 검에 휩쓸린 단검들이 이곳저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남자는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연단 위에서 검은 포탈이 열리면서 가죽 갑옷을 입은 장발의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장발의 사내는 옆에 쓰러진 왕의 시체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경계했다.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의 긴 머리를 지닌 사내는 왕에게 머물러있던 시선을 천천히 남자에게로 옮겼다. 그의 눈동자는 흰자위가 가득한 눈에 정 가운데 부분만 작은 검은자위가 노려보듯 박혀있었다. 남자가 예의 그 기묘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상대방을 경계하던 그때, 남자가 쳐내어 주변으로 날아가 박혀있던 단검들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터져나가면서 수류탄처럼 사방에 파편을 뿌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가 황급히 두 팔로 얼굴을 가리자, 그 사이 그의 정면으로 커다란 불덩어리가 날아들었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마법이다! 마법사인가?’
민준은 단검을 던지며 등장한 사내가 마법을 구사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모로 봐도 마법사다운 구석을 찾기 어려운 사내의 손에서 커다란 불덩어리가 만들어져 날아가는 것은 예상밖의 전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사내와 대치하고 있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순간에 병사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강적의 등장에 불안감이 먹구름처럼 번져갔다. 제각기 무기를 쥐어 잡으며 어께를 맞대고는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서 퍼지던 불안감은 이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술렁거림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병사들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남자가 불길에 허우적거리는 사이 곁에 있던 왕의 시체와 검을 챙겨서 포탈 속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불이 붙은 채로 노성을 지르며 포탈을 향해 검을 던졌지만, 검이 닿기 직전 포탈이 닫히면서 목표를 잃은 검은 왕좌의 중앙에 깊숙이 박힐 따름이었다. 남자는 한쪽 눈에 파편이 박혀 피를 흘리면서도 한참동안이나 장발의 사내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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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입은 남자의 지친 얼굴을 끝으로 홀 안에서 벌어지던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렇게 모든 인물들이 안개처럼 흐려지다가 이내 사라지면서, 하얗고 깔끔하게 빛나던 홀의 모습도 세월을 덮어쓴 폐허로 변해갔다. 대리석 타일과 기둥들, 그리고 홀의 한쪽 끝에 있던 입구와, 정 반대쪽에 위치한 연단과 왕좌, 남자가 깔렸다가 튀어나온 지붕 잔해까지. 깨지고, 무너지고, 새카만 떼가 낀 홀 안에는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잔해들 속에 남겨진 민준은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때 민준의 뒤에서 L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영웅과 악당의 차이가 불분명해지죠. 본인이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간성을 버리고, 부하도, 군주도 베어가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과연 영웅이었을까요?”
그는 남자가 깔려있던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해 근처에는 산산히 조각나고 남은 낡은 단검 자루가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영웅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내란으로 인해 약해진 이곳은 이어지는 망령들의 침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지요.”
민준은 미처 다 정리되지 못한 잔해들을 보며 그의 말을 이해했다. 왕좌 뒤편의 골렘이 튀어나왔던 커다란 구멍 위에는 그 크기에 맞는 커다란 테피스트리가 걸려있었지만, 그것은 짐승의 발로 긁은 듯 거칠게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가리워진 커다란 공간 안에서는, 작은 틈새를 통해 바람이 드나들면서 나는 소리가 공간 안에서 울리면서 마치 건물이 내쉬는 커다란 숨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사라졌습니다. 홀로 살아남아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을 등지고 떠나갔죠. 모든 실패한 영웅들이 그렇듯이요. 그렇게 남겨진 고향은 두 번째 재앙으로 인해 완전히 산 속에 같혀버리고 말았죠.”
민준은 홀의 높은 천정 위로 뚫려있는 창문들을 바라봤다. 빛이 드나들어야 할 그 자리에는 시커먼 흙과 바윗덩어리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나마 몇몇 창문은 지표면으로 드러나있는 지, 얇은 창살처럼 가는 빛이 새어들어와 적막한 공터를 맴돌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떠나간 사람들의 등 뒤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동족을 배신한 배신자들도 그러했고, 실패한 영웅들도 그러했죠. 후대에는 결국 ‘감염자’로 호칭이 통일되었지만, ‘거짓말쟁이’라는 호칭은 전쟁이 끝난 후 70여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잠시 말을 멈춘 LD는 민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마 안 되는 빛은 그의 가면을 사선으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거짓말쟁이라...’
민준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배척했다. 그렇게 따진다면 LD또한 이 세계와는 다른 존재이리라. 그렇게 말이다.
“70년 뒤, 그들은 전쟁 동안 사라졌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들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인해 ‘거짓말쟁이’라는 호칭은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죠.”
“라이어... 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돌아왔을 때 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사라지고는 했습니다. 그 전까지 그들이 겪었던 감염자들과는 전혀 다른 증상이었죠. 강력한 힘과, 공유할 수 없는 삶,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로 인해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죠.”
LD는 고개를 돌려 폐허가 된 홀에 시선을 던졌다. 사선으로 떨어지던 햇빛을 등진 그의 가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참 우스운 일이었지만,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죠. 생존자들은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던 악당도, 그들을 구한 영웅들도 거부했지만, 그런 사실보다야 눈앞의 척박해진 땅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진 대지, 그리고 차츰 부족해져가는 일손과 재건해야할 고향이 그들의 눈을 가렸지요.”
LD는 그렇게 말하며, 민준을 향해 투박한 청동 패 하나를 내밀었다.
“그들은 영웅도, 악당도 아닌, 익숙한 얼굴을 뒤집어 쓴 거짓말쟁이 괴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산 너머의 마을에 대한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그들은 새로운 사회망을 연결하고, 생존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들에겐 위협적인 땅으로 거짓말쟁이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렇게 파견된 이들을 ‘라이어’라고 부르며, 때로는 배척하고, 때로는 환영하면서,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청동 패는 바로 그런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일종의 ‘신분 증명서’이지요.”
민준은 청동 패를 받아들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소 조악하게 주조된 청동 패는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 ‘제 1급. 이나레 마을 발행’이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자, 설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종종 새로운 사실을 알려드릴 때 다시 뵙도록 하죠. 아, 그 전에...”
LD는 품속에서 낡은 가죽커버를 씌운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거진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운 책의 모습에, 민준은 황당해 하며 물었다.
“아, 아니... 이게 뭐에요?”
“일종의 기본 지식이라고 해두죠. 책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 플레이어가 처한 상황에 맞는 알림창이 뜰겁니다.”
LD로부터 책을 받아든 민준은 그것이 책이 아니라 책처럼 깎아놓은 커다란 돌덩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무지막지한 무게와 두께에 얼굴이 퍼렇게 질린 그는 그것이 세상 모든 걱정거리인 양 물었다.
“이걸... 언제 다 읽어요?”
물론 내용이 재미있다면야 얼마가 걸리든 민준은 그걸 다 읽을 자신이 있었다. 웬만큼 잡다한 지식에는 별로 거부감이 없는 그였고, 그 전달 매체가 책이든, VR 화면이든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VRD기기 속에서 보는 책이라 해도 그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한가하게 책이나 읽으려고 이 게임을 시작한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럴줄 알고, 제가 선물을 준비했죠.”
LD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하며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익숙한 동작으로 품속에서 알록달록한 티켓 하나를 꺼내들었다. 무거운 책 때문에 손이 비어있지 않아 그걸 받아들 수 없는 민준을 위해, 그는 민준이 볼 수 있게 책 위에 티켓을 올려두었다. 그러자 민준의 눈 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프리미엄 학습 티켓. (1권) 플레이어가 로그아웃 상태일 때, 책을 읽어서 지식을 습득 시킬 수 있다. 내용과 용량에 따라 완료 시간이 달라지며, 로그아웃 하기 전 책 위에 올려두면 사용할 수 있다. 이때, 소요 시간도 함께 표시된다. 이 티켓은 분량에 관계없이 1권의 책을 학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알림창을 본 민준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묘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LD를 바라봤다. 민준은 그날따라 왠지 그의 가면이 빙긋 웃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캐쉬 아이템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LD의 말에, 민준은 순간 현실감각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진짜 같고 사실적이더라도, 그는 지금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이라...’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테지만, 민준에게 게임이란 단어는 참 묘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난 지금 게임을 하고 있다.’라는 명제 위에서 민준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바다위에 떠있는 인형과도 같았다. 흐름에 저항하지 못한 채 천천히 망망대해를 떠도는, 그의 현실은 무채색의 바다였다.
민준이 묘한 기분을 느끼며 현실을 곱씹고 있던 그때, 그의 눈앞으로 LD의 손이 내밀어졌다. 그의 손 안에는 달그락거리는 거칠지만 비교적 맨질맨질한 돌이 담겨져 있었다.
“이곳에선 ‘루나틱’이라고 부릅니다. 필요하시면 어느 마을에든 있는 '루나틱 샵'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민준은 내밀어진 손을 보며, 잠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초도 안되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인지 안에서는 대략 2,3분 정도 멍 때리고 있던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어... 저 근데 손이 안남는데요.”
다소 멍청해진 목소리로 그가 어려움을 표하자, LD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책을 따로 보관할 자리가 필요하겠군요. ‘스킬’이라고 말해보시겠어요?”
“...스킬.”
민준이 머뭇거리며 LD를 따라하자, 그의 눈앞에는 전과 다른 큼직한 창이 떠올랐다. 텅 비어있는 그 창에는 그가 들고 있는 책이 들어갈법한 크기의 작은 틀이 위치해있었다.
“...여기에 넣으면 되나요?”
딱히 LD의 허락을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민준은 질문한 뒤에 바로 들고있던 책을 틀 위에 올려놓았다. 책이 올려진 틀에서 작은 빛이 새어나오면서 책은 알림창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창에서 책에 대한 정보가 표시되었다.
[기초지식(1) 독서율 0%]
딱히 별 다른 정보는 없었다. 그저 기초지식이라는 이름과 얼마만큼 읽었는지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민준은 스킬창에 대해서는 금방 신경을 끈 채 LD가 내미는 루나틱을 받아들었다.
“자, 이제 얼른 가보셔야죠. 누군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있거든요.”
“예? 누가 절...”
타악!
알 수 없는 LD의 말에 민준은 설명을 듣고싶었지만, 그가 되묻기도 전에 LD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엇’하는 사이 LD의 발끝에서부터 발산된 눈부신 빛에 민준은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있음을 께달았다.
“...눈?”
ep 5. 실패한 영웅들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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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헛... 매주 금요일 연재하던걸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ㅠ
저번주부터 알바를 시작해서요...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걱정이네요...ㅠ
기다리신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을, 그리고 늘 그렇듯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