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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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먹구름 사이로 용암이 흐르듯 검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대기가 거칠게 떨렸고 다가오는 폭풍을 예고하듯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음을 뒤흔드는 혼란과 마주하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속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리고 기다렸다. 귓가에 들려올 몰락의 신호탄을.
요란한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소음들이 세상을 뒤덮었다.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미사일들이 지상으로 쏟아지고, 그보다 많을 미사일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리라. 그러한 광경이 어둠 건너편에서 펼쳐지고 있으리라.
모든 것이 찰나였다.
소음이 하나가 되어 청각을 앗아갔다. 거대한 섬광이 눈앞의 어둠을 밀어냈다. 호흡조차 틀어막는 뜨거운 열기가 온 몸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고 선 내 눈에,
이제는 깜빡일 눈꺼풀조차 없어 모든 광경을 지켜봐야할 시선에,
오직 홀로 남겨진 모습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 * * * *
잠에서 깬 두 눈이 자연스레 천장을 올려봤다. 회색빛 콘크리트 천장을 마주하는 메마른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상체를 일으킨 멜버튼의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맞춰놓은 알람보다 40분이나 이른 시간임을 확인하자 상체가 다시금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나 눈꺼풀은 감길 기미가 안보였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느릿한 발걸음이 그의 엉덩이를 식탁의자에 앉혔다. 전투식량의 포장지가 제거되고 두툼한 갈색 고체덩어리가 그릇에 담기자 공기와 맞닿은 표면이 점차 끓어오르며 녹기 시작했다. 동봉된 크래커, 초콜릿과 같은 부식을 꺼내 맛보던 그는 그릇에 담긴 덩어리가 뜨듯한 치킨스튜로 완성되자 그것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짤막한 식사를 끝마쳤다.
이어진 것은 격한 운동이었다. 탄탄한 근육 위로 땀이 흐르며 그의 몸을 적셨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샤워와 면도를, 그 뒤에는 장갑판이 부착된 특수 전투복을 갖춰 입었다. 마지막으로 전투화를 신자 그곳엔 멜버튼이라는 이름의 군인이 딱딱한 분위기로 변모한 채 서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딛는 군홧발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장비거치대로 향했다. 거치된 무채색 장비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용 풀페이스 헬멧, 백팩형 대전자전 장비, 그리고 200,000km 너머의 적을 죽이기 위한 무기까지.
완전무장한 멜버튼의 모습이 거울을 마주했다. 무표정한 40대 초반의 외모가 거울 저편에 있었다. 헬멧 바이저에 가려져 보일 리 없는 메마른 눈빛이 그를 주시했다.
거울 너머의 자신을 일별한 그는 복도로 나왔다. 거주구역을 연결해주는 중앙통로를 지나 출입문을 열자 어둠 너머로 이어진 끝 모를 터널과 함께 8인승 무인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승객은 한 명뿐이었다. 출발한 열차는 두 군데의 경유지를 지나 십여 분을 내달리고서야 멈췄다.
인기척 없는 종착역은 열차가 도착하자 전등을 켰다. 세월의 흔적을 내보이듯 점차 떨어져나가기 시작한 외장재와 힘없이 깜빡이는 몇몇 전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벽면에 부착된 종착역의 이름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
- Unknown Shelter : West Gate
습기 한 방울 안 섞인 건조한 공기가 폐부를 당겼다. 발걸음 소리가 역 내부를 부유하며 적막감을 흩어놓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홀로 남겨진 자의 고독감뿐이었다.
지상으로 향하는 1호 승강기가 낡은 부품들을 삐걱이며 움직였다. 수평으로 나아가던 승강기는 어느 순간 수직으로 상승해 지상에 위치한 동굴에 닿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동굴이 입구너머의 풍경과 함께 멜버튼을 맞이했다.
상반된 풍경이 세상을 양분했다.
하늘의 사분지 일을 차지한 채 거대한 위압감을 내보이는 모행성(母行星), '에스란테'.
그러한 하늘 아래서 모래와 바위, 전쟁의 흔적만이 남겨진 황무지는 멜버튼이 짊어진 고독감만큼이나 황량했다. 그럼에도 자식을 굽어보는 에스란테의 초점 없는 눈길은 무미건조했고, 시선을 마주하는 첫 번째 위성(衛星) '디포드'도 어머니의 주위를 돌며 메마른 눈길만을 보낼 뿐이었다.
그것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또한,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에스란테와 디포드가 서로 시선을 마주하듯, 그와 시선을 마주할 다른 누군가가 저곳에 있었기에. 곱씹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지만 아직은 내려놓을 수 없는, 그러한 고독감이 만들어낸 한 남자의 삶이 죽어버린 대지에 남아있었으니까.
군용 바이크가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동굴에서 출발하여 40km의 거리를 달린 바이크는 이름없는 협곡에 도착하여 멜버튼을 내려주었다.
헐벗은 마냥 황토빛 암반을 드러낸 협곡. 과거에 물이 흐르고 초목이 우거졌을 장소는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풍화되어 사라지는 흔적들 위에 덧씌워진 다양한 상흔들은 최근까지도 전투가 이어졌음을 알려주었다.
장비를 챙긴 그는 협곡을 타고 움직였다. 익숙한 발걸음이 지난 수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지형 곳곳을 누볐다.
지형정찰이 끝나고 이동경로가 확보되자 은폐하기 적당한 암벽을 등지고 섰다. 오른팔을 보호하듯 장갑이 부착된 토시 형태의 X-1 디바이스가 미약한 진동과 함께 기동했다. 헬멧 바이저에 부팅 메시지가 출력됐다.
[Operation BMP - Tactical weapon system]
X-1 Device : Kernel Ver 1.54
Serial Number : OND 51e5644f
- Checking FSN generator
- Starting AAR.K encrypt module
- Starting Virtual retinal display module
.
.
.
- Connecting Willamette DARPA - K7 ECCM module
- Initializing T810 MX - Satellite Tracking System
* 사용자 인증 : <성공>
…… 심정지 칩 정상작동 확인
…… 유효한 사용자 코드 확인
…… 유효한 안전지대 확인
* 시스템 인증 : <실패>
…… 국방성 페녹 시스템 비활성화 (상태 : 응답 없음)
…… 코드 입실론 발령 확인 / 전시상황에 의거하여 시스템 인증과정 생략
* 트리거 인증 : <성공>
…… 픽시스 공격위성 휴면모드 해제
…… 2단계 사용자 권한에 의한 제어권 획득
…… 제2종 전술병기 BM-TT 발사권한을 제외한 모든 무장 잠금 해제
부팅이 완료되자 바이저에 표시된 메시지들이 사라졌다. X-1 디바이스와 연동된 헬멧의 디스플레이 모듈이 망막에 직접 화면을 투사했다.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각종 감시화면과 메시지, 위성조작용 제어판이 시야를 채워나갔다.
멜버튼은 하늘을 올려봤다.
하늘 저편. 티끌하나 없는 맑은 하늘이어야 어렴풋하게 보이는 그것. 세상이 멸망했음에도 최후까지 남아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을 일깨워주는 웰즈 게이트가 그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디포드의 궤도에서 명령을 대기 중인 공격위성 픽시스.
픽시스와 연동되어 에스란테의 모든 지역을 비추는 6대의 감시위성.
에스란테와 디포드를 연결하는 초대형 터널이자 공격루트인 웰즈 게이트.
전투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웰즈 게이트가 9시 정각을 알리며 기동했다. 에스란테의 게이트와 디포드의 게이트가 연결되며 약 200,000km의 거리를 초 단위로 압축시키는 통로를 만들어냈다.
통로가 열리길 기다렸다는 듯 에스란테의 지상에서 암호화된 전파가 발신됐다. 감시위성이 바로 역추적에 들어갔다. 새로울 것은 없었다. 이 시각, 에스란테의 지상에서 쏘아진 전파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으니까.
디포드의 궤도 어딘가에서 지상을 감시중인 상대방의 위성 또한 픽시스와 접속된 X-1 디바이스의 전파를 포착했을 것이다. 남은 것은 누가 먼저 발신지의 좌표를 특정하고 상대방을 포착하느냐의 싸움이었고, 대부분은 멜버튼의 패배였다. 기술력의 차이는 매번 상대방을 한 발짝 앞서게 하였다.
그리고 우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전투에서 첩보전의 패배가 불러오는 결과는 언제나 하나였다.
삐빅-
무언가가 디포드 방면 게이트를 통과했음이 표시됐다.
선제공격이었다.
디포드의 현재 궤도, X-1 디바이스 기동시각, 평균 포착시각, 예측되는 초탄의 발사시각, +-30초의 오차……. 포착된 초탄(初彈)을 두고 멜버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난 8년간의 데이터가 그의 경험과 맞물렸다.
'공갈탄이다.'
내놓은 답은 간결했다. 지역은 특정했을지언정 은폐한 장소까지는 모를 것이라는 확신이 땅을 박차려던 다리를 붙들었다.
멜버튼의 시선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 1km의 지형을 비추는 감시위성의 화면으로 향했다. 그것을 5km로 축소하여 협곡 전체를 비추게끔 조정하고 주시했다.
웰즈 게이트를 통과한 포탄이 자세제어를 끝내고 지표면에 착탄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약 20초.
3초, 2초, 1초……, 폭발이 포착됐다.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며 반경 30m를 연소시키는 파괴력. 뒤늦게 들려오는 폭발음과 동시에 연달아 게이트를 통과하는 3개의 공격이 포착됐다. 메어둔 긴장감과 함께 멜버튼의 육체가 스프링처럼 튕겨나갔다.
여러 이동경로 중 하나를 빠르게 내달리는 모습은 20여초 만에 수백 미터를 주파하고 있었다. 그런 멜버튼의 뒤를 쫓듯 폭발이 연이어 일었다. 1km 너머에 꽂힌 초탄과는 달리 200m 안팎으로 명중한 공격들은 그가 이동할법한 경로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불길로 물들였다.
바위 뒤에 엄폐한 멜버튼은 숨을 고르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곧이어 감시위성이 역추적 성공과 함께 반격의 시간을 알려왔다.
에스란테의 대륙 한 귀퉁이. 검은색 특수복을 입은 상대방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식별코드 블랙야크.
홀로 남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존재. 지난 8년간 끊임없는 전투를 이어온 라이벌. 그리고 언젠가는 끝을 맺어야 할 디포드 연방의 마지막 남은 적.
그 끝이 오늘이길 바라며, 또한 오늘이 아니길 바라며.
멜버튼은 반격의 방아쇠를 당겼다.
* * * * *
짙은 먹구름 사이로 용암이 흐르듯 검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대기가 거칠게 떨렸고 다가오는 폭풍을 예고하듯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음을 뒤흔드는 혼란과 마주하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두 눈을 감지 않았다. 시선을 바로하고 하늘을, 그 저편에서 다가오고 있을 종말을 바라봤다.
그래. 모든 것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저 모두가 외면했을 뿐이다.
촉발된 군비경쟁과 악화일로를 치닫는 관계. 웰즈 게이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는 냉전시대. 그 틈바구니에서 가시를 품은 채 피어난 디포드 연방의 BMP(Broken Mirror Pieces) 프로젝트.
행성 밖에서의 저격을 가능케 한 BMP 프로젝트는 전쟁사에 한 획을 그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한들 우주에서 내리꽂히는 초속 수십km의 탄두를 사전에 포착하고 막을 수는 없었다.
타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암살사건을 마주한 에스란테 연합의 대응은 맞불이었다. BMP 프로젝트와 비슷한 개념의 프로젝트가 추진됐고, 그 결과는 서로간의 행성간 저격전이라는 생소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기름을 두른 건물 안에서 라이터를 켠 채 서로를 위협하는 두 집단의 모습은 분명 경각심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만류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단절된 대화가 예견된 참극을 불러왔다.
총력전.
두 세력을 둘러싼 협잡과 음모가 전쟁이라는 이름을 내건 순간, 인류의 운명은 끝을 고했다. 지령을 내린 누군가는 고해성사를 했겠지만, 장담컨대 그 목소리는 신에게 닿지 못한 채 수 세기에 걸친 인류문명과 함께 헛되이 사라졌으리라.
수많은 행성간탄도미사일이 하늘에 붉은 꼬리를 남기며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인류사를 통틀어 단 한차례만 볼 수 있을 최후의 절경이다.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다. 황혼이 내리는 지상은 모두의 목숨을 머금고 환하게 불타올랐다. 망막조차 태워버릴 폭발의 섬광이 온몸을 휩쓸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꿈이다. 방공호에 처박혀 무엇 하나 제대로 지켜보지 못한 이가 그려내는 비현실적인 꿈. 인류의 멸망을 촉발시킨 장본인 중 하나임에도 모든 책임을 내던진 비겁자.
그럼에도 단 하나,
꿈과 현실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홀로 남겨진 고독감뿐이리라.
* * * * *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이 상념에 빠진 멜버튼을 깨웠다.
전쟁의 여파가 불러온 기상이변은 잡초 한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에 비대신 모래바람을 흩뿌렸다. 흘릴 눈물조차 없어 메말라가는 눈동자처럼, 디포드는 황량함을 빚어내어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한 무덤 한복판에서, 숨소리를 초침삼아 묵묵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의 모습은 지나간 세월만큼 빠르게, 그리고 다가오는 세월만큼 느리게 풍화되고 있었다.
시간이 9시 정각을 가리켰다. 모래바람으로 가려진 하늘 너머에서 웰즈 게이트가 연결되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평소라면 은폐하여 선제공격을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만큼은 멜버튼의 모습을 잡아낼 감시위성의 렌즈가 무용지물이었다.
매달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감시위성의 시야조차 가리는 모래바람은 전투의 양상을 바꿔놓는 가장 큰 요소였다. 이용하기에 따라서 득과 실이 뚜렷하게 갈리기에 이 시기의 그는 신중함을 중점으로 하여 전투에 임했다.
바이저 너머로 보이는 시야는 넓어봐야 50m 남짓. 모래바람으로 인해 지상을 관측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에스란테에서 총구를 겨눈 블랙야크 또한 해당되는 사항이다. 눈 뜬 장님이 되어 감시위성이 가져다주는 역추적된 위치정보와 사전에 입력된 지형정보만으로 저격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기회였다. 제한된 시야에 묶인 블랙야크와 달리 에스란테의 맑은 기상상태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니까.
결국 전투의 향방은 누가 더 지형을 숙지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이다.
모래바람을 가르며 선제공격이 떨어졌다. 3개의 탄환 중 2개가 이동범위 내에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디포드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모래바람은 폭발의 불길을 집어삼켜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구덩이 안에 엄폐한 멜버튼의 신경이 남은 1개의 탄환에 집중됐다. 어딘가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활공탄이 허점을 노리고 날아들 것이 분명했다.
- 식별코드 블랙야크 포착
제어판을 조작하는 손길이 허공을 오가며 분주해졌다. 블랙야크의 위치와 지형파악, 그에 따른 이동경로, 엄폐물, 행동패턴 등 각종 고려사항을 취합하고 공격지점을 산출했다. X-1 디바이스가 그의 조작에 따라 궤도에서 대기 중인 픽시스 공격위성을 제어하며 오차를 수정했다.
그 와중에도 멜버튼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조작에 정신이 집중됐음에도 끊임없이 움직여 엄폐를 이어가는 모습에선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발사."
장전된 4발의 BMP-K3탄이 소리조차 없는 우주공간을 가르며 발사됐다. 디포드 방면 게이트로 들어선 탄환들은 3초 만에 200,000km를 가로질러 에스란테 방면 게이트를 통과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속도와 수치. 0.7초라는 딜레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계산한 픽시스는 막대한 가속도가 붙은 4발의 탄환을 제어하여 각각의 착탄지점으로 유도했다. 오차범위는 고작 3m.
자세제어를 끝마친 발사체가 분리됐다. 내열처리된 탄두가 대기권을 가르며 남긴 붉은 빛줄기가 마치 저격수의 레이저 포인터처럼 목표지점을 향했다.
짧은 텀을 두고 4번의 폭발이 지표면을 들썩였다. 감시위성이 그 광경을 전달했지만 멜버튼의 관심은 이미 다음 공격에 쏠려있었다. 착탄지점을 볼 필요도 없었다. 탄환이 웰즈 게이트를 통과함과 동시에 블랙야크가 보인 회피경로만으로도 공격의 성공여부를 알 수 있었으니까.
공격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멜버튼의 공격이 게이트를 넘었고, 블랙야크의 반격 또한 게이트를 넘었다.
빛조차 오고가는데 1초 남짓한 시간이 걸릴 광활한 거리가 서로간의 심리와 행동을 더욱 몰아붙였다. 예측과 예측의 싸움.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해 공격을 명중시켜야했고, 그러한 공격을 예측해 피해야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수집된 자료들과 사선을 오고가는 전투경험은 적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상대방을 친우처럼 이해하는 범위까지 나아갔다. 쉽게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 여겼던 전투가 8년간 이어진 이유이기도 했다.
- 전파유도 포착
가늘어진 눈매가 멜버튼의 심정을 대변했다. 정체된 전투 양상을 무너뜨리기 위한 노림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제공격 이후 에스란테의 궤도를 한 바퀴 돌아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을 활공탄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바위산의 측면이 폭발하며 산사태가 일었다. 바위와 흙더미들이 전장을 축소시키며 이동루트를 제약했다.
블랙야크의 노림수에도 악천후 속을 내달리는 멜버튼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수많은 예상 중 하나가 적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질량을 지닌 무언가가 디포드 방면 게이트를 통과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 식별결과 : 에스란테 연합군 칼리스 제조창 소속 전략물자수송선
에스란테의 두 번째 위성 '칼리스'. 그곳에서 무인으로 운영되는 제조창과 수송선이 있기에 픽시스 공격위성에 탄환과 필요물자가 보급되어 8년간이나 전투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것은 상대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결코 이곳에 있어선 안됐다. 이대로 수송선이 파괴된다면 블랙야크는 조만간 공격수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거냐?'
수송선을 지상에 떨어트리는 것은 무의미했다. 요격은커녕 포착조차 불가능한 탄환과 달리 수송선은 움직이는 표적지나 마찬가지였다.
픽시스의 발사구가 수송선을 겨냥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유추하며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발사된 탄환이 대기권에 돌입하던 수송선의 엔진에 꽂혔고, 이내 싣고 있던 물자와 탄약까지 집어삼키며 지상에서도 관측할 수 있을 대규모 폭발을 일으켰다.
파편들이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려가는 광경이 감시위성을 통해 멜버튼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쩌면 8년간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을 그 광경을 블랙야크 또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전투가 끝났다. 웰즈 게이트는 다시금 연결을 끊고 서로를 단절시켰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 순간,
- 전파유도 포착
갑작스런 기습에 육체가 먼저 반응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움직임이 멈췄다.
틈을 찌른 공격은 엉뚱하게도 2km 떨어진 장소로 향했다. 표적은 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멜버튼은 짜증 섞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바이크를 주차한 장소가 불길에 휩싸였으니까.
* * * * *
잠에서 깬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옅은 조명을 받은 콘크리트 천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회색빛을 내보이며 시선을 받아주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멜버튼의 몸이 반복되는 일과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무감각해진 미각이 매번 동일한 전투식량을 섭취하며 정신을 깨웠다.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이 근육을 자극했다. 샤워실의 물줄기가 땀을 씻어내며 기분을 환기시켰다. 전투복이 걸쳐지자 정신이 재무장됐다.
거울 저편에서 여전히 메마른 눈길을 건네는 자신을 일별하며 멜버튼은 열차를 타고 쉘터로 향했다. 그리고 3호 승강기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갔다.
예비용 바이크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산악지대였다. 시스템에 의해 지정된 전투 지역이자 심정지 칩이 비활성화 되는 안전지대 중 하나. 흙과 바위밖에 남지 않은 산맥이 양분 삼을 초목조차 없는 불모지에 뿌리내려 하늘과 닿아있는 장소.
산을 타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내쉬는 숨조차 한 자락의 고민을 담고 있었고, 메마른 눈빛 위에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기에 목표했던 산 중턱에 도착했음에도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은 블랙야크가 미쳐버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마저 열어두고 있었다.
X-1 디바이스를 기동하고 전투준비를 끝마친 그는 선제공격을 대비했다.
시간이 9시 정각을 가리켰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1분, 2분……, 무언으로 재촉하는 시간 앞에서도 웰즈 게이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지난 8년간, 그리고 대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찾아볼 수 없을 이례적인 사태였다.
웰즈 게이트가 멈췄다.
멜버튼의 눈빛이 급격히 떨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스템에 의해 독립되어 운용되는 게이트는 1초의 오차도 없이 열리고 닫히게끔 설정되어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결코 일어나선 안됐다.
수송선의 폭발로 인한 데미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게이트의 방어시스템을 생각하면 이 또한 가능성이 낮았다.
그의 시선이 답답함을 호소하듯 하늘로 향했다.
- 공용 주파수를 통한 통신채널 연결이 요청되었습니다.
둘만 남겨진 세상에서 통신을 요청할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평소라면 분명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지를 넘어선 지금의 사태가 요청을 수락하게끔 유도했다.
[연결됐군. 들리나?]
"들린다."
[그래, 그 목소리야. 직접 듣는 건 처음이지만 자네라면 그런 목소리일거라 생각했어.]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어제 보낸 깜짝 선물은 만족스러웠나?]
"무슨 의도지?"
[별로였나 보군. 뭐, 별 거 아니야. 지지부진한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고자하는 의도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블랙야크가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이 멸망한지 벌써 8년이 지났어.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총을 들었지만 그조차도 세상의 저편으로 잊혀진지 오래야. 그런데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말 한마디 대신 총탄을 주고받으니 답답할 노릇이지. 그래서 나 자신에게 물어봤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하늘 저편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고독하지 않나?]
"되살릴 풀 한 포기조차 없는 세계에서 너와 내가 마주할 수 있는 건 고독감과 서로를 향한 총구뿐이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멜버튼은 단호했고, 블랙야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은 멋들어지게 하는군. 하지만 가슴에 박힌 심정지 칩도 과연 그럴까?]
"알고 있었군."
[뻔한 거 아닌가? 개인의 손에 전술병기를 쥐여 주고 속 편할 권력자는 없어. 정해진 시간동안 특정지역 안에 머물러야 심정지 칩이 동작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수집한 정보와 행동패턴에서 그대로 드러나지.]
유사시에 부여되는 전술병기를 이용한 전략적 요충지 파괴임무. 때문에 픽시스에는 제2종 전술병기 BM-TT가 장착되어 있으며, 이를 조작하는 저격수들의 제어를 위해 심정지 칩을 심고 각종 제약을 걸어두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쪽만큼 악질적이진 않지만, 그 X-1 디바이스의 기동이 포착되면 짐 싸들고 뛰쳐나가야하지. 알겠어? 우리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이유는 시스템이 내건 제약에 의해서지, 서로를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야.]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자네와 난 서로를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지난 8년간 끝을 맺지 못하고 노려만 봤지.]
능청스런 어조가 한 꺼풀 벗겨지며 진중함을 내보였다.
[과거에 두 세력이 이루지 못했던 화해. 총탄 대신 손을 내밀어 건네는 악수. 우리가 이뤄보는 건 어떨까?]
예상치 못한 제안에 멜버튼의 표정이 굳었다.
"그 제안을 하려고 수송선을 내던진 건가?"
[과거에 에스란테가 했어야할 행동을 대신 했을 뿐이야. 먼저 다가가려면 자신이 지닌 걸 양보하는 모습도 보여야겠지.]
화해의 손길이 다가왔다. 그것은 분명 한 남자의 오랜 성찰이 낳은 진심이었고, 8년간 이어진 전쟁의 종지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난 스스로 고독한 자다.'
지난 8년간 적으로 마주했다.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죽이려는 적이었다. 200,000km의 거리가 굳건한 악수는 가로막을지언정 겨눠진 총구에는 길을 내주듯, 벼랑 아래로 떨어진 그의 마음 또한 누군가의 손길이 닿기에는 너무도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웰즈 게이트. 에스란테와 디포드를 하나로 묶기 위한 통로. 그것은 분명 흘러넘치는 인류애와 서로를 향한 소통으로 말미암아 탄생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고독감을 짊어진 한 남자의 메마른 눈길만이 게이트 건너편에 비치는 자신을 노려볼 뿐이다.
"불신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 그 순간부터, 대화와 소통은 그 의미를 잃었다."
[나와 자네라면 그 의미를 되살릴 수 있어.]
"아니. 불가능해. 제안은 거절하마."
서로를 이해했다 여겼으나 지금만큼은 엉켜버린 실타래가 되어 침묵만을 자아냈다. 과거를 바로잡으려던 손길은 헛되이 허공을 움켜쥐었고, 남겨진 것은 오직 고독뿐이었다.
[자네의 결정이 그렇다면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진 않겠어. 아쉽게도 지금의 대화가 우리들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되겠군.]
멜버튼의 시야에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그곳엔 디포드 방면 게이트의 본래 궤도와 함께 완전히 어긋나 지상으로 추락하는 궤도 또한 표시되어 있었다.
[게이트가 연결되지 않아 의아했겠지. 내가 그런 거야. 지난 8년간 우회경로를 찾아 게이트의 제어권한을 획득하려고 고생했고, 어제 아침에 성공했지.]
멜버튼은 재빨리 감시위성의 화면을 조작했다. 그곳에는 주 엔진이 점화하여 지상으로 강하하기 시작한 게이트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에스란테 방면 게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면 양쪽의 게이트 모두 지상으로 추락할 것이다.
[멀리 떨어진 장소로 맞춰놨으니 거기까지 여파가 미치진 않을 거야.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주의는 해두라고.]
"고마워해야하나?"
[글쎄. 마음대로 생각해.]
흐릿하게만 보이던 게이트가 점차 가까워지며 또렷해졌다.
[그나저나 내 이름은 끝까지 안 물어보는군. 8년간 총질을 해댄 사이인데도 그렇게 관심이 없나?]
"블랙야크로 충분해."
[블랙야크?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재미없는 코드명이네.]
"원하는 이름이 있으면 말해. 앞으로는 그걸로 불러주지."
[있긴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 더 이상 총구를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
게이트 추락으로 인한 회선의 간섭이 노이즈를 발생시켰다. 점차 심해지는 노이즈 속에서 블랙야크의 마지막 인사가 들려왔다.
[작별의 시간이군. 잘 지내라고, 친구.]
두 남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통신은 그렇게 회한만을 남긴 채 끊겼다.
* * * * *
맑은 하늘에 주황빛이 넘실거렸다. 대기가 거칠게 떨렸고 다가오는 폭풍을 예고하듯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음을 뒤흔드는 혼란과 마주하며, 여느 때와는 다른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남자는 결코 두 눈을 감지 않았다. 시선을 바로하고 하늘을, 눈앞으로 강하하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기다렸다. 인류의 황혼이 지는 모습을.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황혼이 내리는 지상은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환하게 불타올랐다. 눈부신 섬광이 세상을 휘감자 자리를 지키던 남자의 모습 또한 지워졌다.
짝을 잃고 추락한 게이트는 죽어버린 대지에 몸을 뉘였다.
그림자조차 짝을 지어주지 않는 고독감은 황혼을 등지고 쓸쓸히 퇴장했다.
그럼에도, 아스라이 남겨진 한 남자의 삶은 이름 없는 무덤을 서성이며 떠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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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주제지만 써보니 나름 재미있더군요. 소재는... 열심히 노력했으나 그 맛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게이트니 공격위성이니 전술행동이니... 쓰는 내내 머리가 아프더군요. 결국 세부적인 묘사는 얼렁뚱땅 넘겨버렸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야겠죠.
읽어주신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재미있는 글이길 바랄 따름입니다.
안녕하세요?
그저 눈팅하면서 간혹 글이나 남기는 엑셀리온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