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헤어진 지상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식별 절차가 끝나고, 권총을 소지한 채 경비를 서는 아저씨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서 버튼을 누르고 등을 벽에 기댔다. BCI 인터페이스에서 지금 시간은 오후 1시라고 알려주었다. 오늘은 의외로 시간이 빨리 지나간 모양이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지상이 사는 93층에 멈춰서 열렸고, 지상은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와 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B9317 이라는 글자가 적힌 곳 앞에 서자 문이 열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지상이 나갈 때는 항상 흐트러지지만 들어와보면 항상 정리되어 있는 것들이 보였다. 디지털시대가 정보암흑기에 가장 취약한 시대라는 말이 퍼졌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포를 공유했던 지상이 한참 샀던 종이책들이 들어있는 책장, 매일 영화에 나오는 마약사범이 건드린 것처럼 정신없이 헤집어지는 서랍, 그가 매일 쓰고 던져놓는 수건이나 빨랫감들이 전부 제자리로 돌아가 정갈함을 지키고 있었다.

"아빠, 저 왔어요."

들어올 때마다 인사했지만 답을 듣는 건 가끔씩에나 있는 일이었다. 아주 가끔씩, 그의 아버지가 미처 일을 다 끝내지 못했을때... 그때에나 볼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말리고, 정리하고, 설거지하는 가사에는 훌륭했지만(사실 로봇을 몇대 더 들이면 쓸모가 없었다.) 가족을 돌보는 가사에는 신통치 않았다. 지상은 가끔씩 아버지를 가족이 아닌 가사도우미라고 믿고 싶었다. 겉옷을 벗어서 옷장에 넣고 거실을 힐끔 보니 사람이 족히 들어갈 만한 캡슐이 푸른빛을 내며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지상의 아버지는 저 안에서 가상현실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아버지 다니시던 회사에 있던 이사 할아버지 뵙고 왔어요. 그리고... BCI칩 소프트웨어도 새로 업그레이드했고요. 그러니까 아빠..."

지상은 아버지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그 아버지란 사람이 무너진 체면을 저 먼 다른 세계에서 랭커 노릇을 하면서 위로받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영락없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꼴이었다.

"아니에요."

지상은 긴 말을 입 속으로 다시 삼키고 데워진 냉동피자를 꺼냈다. 5년 전에 그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아버지는 지상의 어머니에게 심하게 구박받았고, 이것저것 사업이랍시고 돈을 빌리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자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가장의 체면은 어머니가 세대주를 자기로 바꾸고, 몰래 모아놓았던 돈으로 빚을 전부 갚아서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후로 아버지는 그저 아내를 잘 만난 무능한 주부가 되었고, 대우가 순식간에 가장에서 주부, 아니 식모까지 내려갔다. 지상은 자기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직장을 집보다 더 가정같이 느꼈으리라고 조심스레 생각하면서 옷을 벗고 몸을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

['친구' 탭의 "헤링턴 효승"님이 전화를 거셨습니다. 수락/거절]

한참을 씻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친구가 전화를 걸었다. 언덜링(Underling)이라 불리는 런던 빈민가 출신의 아버지와 한반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효승은 당장 주어진 것으로 어떻게든 뭔가 해내는 것에는 능했지만 정작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보였고, 그가 미래에 대해서 확실하게 투자해 본 것은 전술드론 공학 공부가 전부였다. 지상은 현재에 무섭게 집착하고, 지금 가진 것에 불만도 만족도 없이 뭔가 해내는 그의 성격이 몇년후의 미래는 커녕 내일, 눈 붙이면 바로 오는 한 시간 뒤마저도 보장할 수 없는 런던의 악명 높은 언더월드에서 장장 25년을 버틴 효승의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하곤 했다. 그렇게 혼자 생각하다가 "10초 후 자동 거부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뜨자 놀란 지상은 뜨거운 물에 빠져있다가 잡생각이 너무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어 효승아. 왜?"

"한지상, 지금 뭐하냐?"

"어, 오늘은 좀 일찍 씻고 있어."

지상은 효승과 몇마디 짧은 얘기를 하다가, 곧 본론으로 들어갔고, 10초 만에 2시간 후에 리퍼트 타워 97층에 있는 '가상현실 기념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는 전화를 끊었다. 원래 남자간에는 전화가 빠르다지만 효승과의 대화는 그 중에서도 이상하게 빨랐다. 지상은 좀 더 욕실에 있다가 나와서 몸을 전신건조기로 말린 다음에 나왔다. 그새 BCI칩 속에 들어있는 비서가 [리퍼트 타워- 최소 14분 이상 소요됩니다. 경로 및 교통수단을 표시합니까?]라고 물었지만 지상은 "14분밖에 안 걸리면 1시간 뒤에나 부르던가"라고 말하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근데 이제 나 뭐하냐."

지상은 거실로 나가서 TV를 켰다. TV 첫화면에는 아버지가 "길드"라고 하는 곳의 사람들과 정모하고 찍은 사진이나, "읍니다"로 끝나는 일종의 명령서들이 파일 형태로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지상은 소파에 앉아 꽤 멀찍이 떨어진 TV 쪽으로 쭉 내밀었다. BCI칩 안에 들어있는 비서가 "동작감지 상호작용-TV" 라고 무덤덤히 말하자 두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가깝게 붙여서 첫화면을 최대한으로 축소시켰고, 그 손가락질에 다른 채널과 탭들이 나타났다. 지상은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는 탭을 가리키고 4자리 비밀번호를 머릿속에서 입력한 다음 접속했다.

'한지상- 게임 란에 접속했습니다. 플레이하실 게임을 선택해주십시오.'

"그래. 이거지 이거."

지상은 가상현실 게임들 중에서 "폴른 파이터스: 용사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게임을 골랐다. 여태까지 그가 해온 게임들과는 남을 죽인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달랐다. 이 게임에서 우주를 볼 기회는 그냥 하늘을 올려봐서 은하수나 보는 것밖에 없었고, 총은 핸드"건"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대구경의 포밖에 없었다. 요즘의 게임들이 점점 게이머들을 몇백년 후나 몇년 후의 미래로 자꾸 밀어넣는 것과는 달리 이 게임은 그와는 사뭇 다른, 이미 몇십년전에 유행이 끊긴 중세 판타지를 재현한 복고적인 느낌으로 승부하고 있었다. 그 게임을 선택하자 TV 가운데에 원반이 나타나 회전하기 시작했고, 곧 "칩 제어중"이라는 고지와 함께 시야가 TV로 빨려들듯 암전하면서 게임에 접속했다. '방랑자 시몬'. 알룬트 전역을 배회하며, 몇주 이상 한곳에 머무르는 순간 '시몬은 정착했다.'는 말과 함께 게임이 끝나는 샌드박스 캠페인을 불러와 다시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 보니 작은 마을이었다.

"아, 시몬!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 어떻게, 수도는 다녀올 만했나?"

게임 속에선 시몬이라 불리는 지상은 촌장의 말에 고개를 젓고 도시의 어두운 면을 설파했다.

"엿 먹으려면 다녀올 만합디다. 촌장님은 큰 건물들 얘기 많이 들으셨죠? 개중에 태반은 우리같은 떠돌이나 촌놈들한테는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에요. 또 뒷골목에 들어가면? 남자는 괴상한 연금술사한테 오장을 전부 떼이고, 여자는 박음직한 구멍으로 전락하죠."

"에끼, 거짓말 치지 말게. 그 큰 건물들에 불한당들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다고..."

"큰 탑을 세우면, 그만큼 큰 그림자도 지는 법입니다."

시몬은 도시의 부정적인 면면을 설파했다. 시몬(한지상)에게 왕국 수도는 원래 세계로 치면 지상이 사는 번화가와 빈민들이 모인 언더시티의 구별이 전혀 없는 졸작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와중에 종이 울렸다. 시몬은 한숨을 쉬며 칼집에 손을 올렸다.

"이번엔 뭡니까."

촌장은 말없이 마을 어귀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시몬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다들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숫자는 대강 70명 정도 되어 보였다.

"마을 뒷산에 사는 페친들 있지? 생긴 거야 재수없게 못생겼고 가끔씩 밭에서 난동을 쳐도 아주 나쁜 사이는 아니었잖나. 그런데... 남작님은 페친과 1분 1초도 함께 못 있을 정도로 싫어하셔서 아예 군대까지 파견한 모양이야."

곧 병사들이 왔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무리에서 나와 촌장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촌장도 그에 응해 깍듯이 인사하면서 시몬의 등을 눌러 인사시켰다.

"노먼. 노먼 치안관님이시다. 이 영지에서 발로 뛰는 나으리로는 가장 높은 급이라고."

촌장은 그렇게 조용히 말하면서 굽혔던 허리를 간신히 폈다. 끙끙대는 촌장을 보고 치안관이 하하, 하면서 말했다.

"다음부턴 굳이 좋지도 않은 허리 굽히시지 마시고. 굽히는 건 영주님 앞에서 하시죠."

촌장은 미리 세워두었던 천막으로 병사들을 안내하고, 시몬에게도 쉴 것을 권했다.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신세 한번만 더 져야겠어. 지금 젊은이들을 어디 보낼 형편이 아냐. 알다시피 지금 가을걷이도 바쁘고, 수확제도 코앞이고..."

시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촌장의 집으로 들어가 작은 방에 들어갔다. 그는 무언가 중요한 할일을 빼면 항상 이 게임을 했기 때문에 이런 작은 방들도 집 다음으로 친숙했다. 그의 원래 집보다는 더 냄새나고 불결했지만 지금은 외려 사람 사는 냄새로 느껴졌다.

"어? 시몬 아저씨 왔어?"

촌장의 막둥이 로아가 한손에 쟁반을 든 채 문을 벌컥 열었다. 막 침대에 드러누운 시몬은 오랜만이네, 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로아는 쟁반을 탁자에 올려두고 침대에 올라가 시몬을 꽉 껴안아 반가움의 표시를 했다. 시몬은 순진하달지 골빈 년이랄지 고민하면서 간신히 떼어냈다.

"너 딴 애한테도 그러냐..."

"아ㅡ니! 걔네들은 촌스러운데 아저씨는 멋지잖아!"

시몬은 괜한 칭찬 하지 말라고 받아치고 쟁반에 놓인 과일주를 마셨다. 그리고 나서 쟁반을 들려주고는 선잠을 자기 시작했다.

"나 할일 있다. 방해하지 마."

로아는 그 말에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있다가 촌장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시몬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시몬은 잠에 깨서 비몽사몽한 채로 촌장 집 바깥으로 나갔다. 병사들이 울퉁불퉁한 돌길에서도 베일 듯이 각을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 있던 노먼 치안관이 시몬을 보고는 악수를 청했다.

"이야긴 잘 들었소. 시몬. 그동안 한 일이 꽤 많더군. 당신같은 재원이라면 페친들 정착지쯤이야 쉽게 찾으리라 믿네."

시몬은 간단히 악수를 받고, 병사들 앞에 서서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도중에 미끄러운 이끼가 깔린 외나무다리, 떨어지면 시체 수습하기도 힘들 험준한 바위들이 병사들의 발목을 잡았지만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시몬은 산 능선 바로 아래에서 캠프 터를 찾고는 휴식을 요청했고, 노먼은 응했다.

"치안관님, 페친들한테 데려다 드리긴 하겠지만 그 살육극에 끼지는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드리고 싶군요. 별 잘못도 없는 것들을 밟아죽이는 것에는... 흥미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들이 퍼뜨린 역병 때문에 시민들이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거요?"

시몬은 노먼의 반문에 코웃음을 치고 반박했다.

"아예 페친이 어린애들 간빼먹으려 온다는 말도 해보시지 그럽니까? 도시 길옆에 나있는 하수로를 보세요. 썩은내 풀풀 나는게 딱 봐도 불길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거길 퍼내거나 불태울 생각만 했어도ㅡ"

"그만! 이제보니 자네도 그 까마귀들이랑 똑같았구려."

까마귀, 위생과 전염병을 연결짓고 교조적일 만큼 위생을 추구하는 마법계의 신의학파로 알고 있었다. 검은색의 두꺼운 가죽 코트, 마법적으로 처리되어 그들이 가정한 "인펙티오 입자"를 걸러준다고 믿는 까마귀 부리. 이 괴상한 옷차림 때문에 까마귀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자르기만 하는 게 전부인 자칭 외과의, 혈액감염성 질병을 마구 옮기고 다니는 피투성이 의사양반에게 죽다 살아난 입장에서 까마귀들이 제일 나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어쨌든 간에, 페친들을 죽이는건 알아서 하십시오. 저 하나 있고 없고가 큰일을 낼것 같진 않아서 말입니다."

"흥. 알아서 하시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병사들이 다시 이동했다. 뒷산의 페친이라 했지만, 이 마을의 뒷산은 험준하고 크기로 유명해 시몬을 제외하곤 이곳에 혼자 들어갈 배짱이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병사들이 슬슬 시몬이 자기들을 제대로 인도하고 있는 건지 의심하기 시작할 때 시몬이 한 손을 들고 병사들을 멈춰세웠다. 노먼이 병사들 사이에서 나와 시몬의 옆에 섰다.

"이번엔 뭐요?"

"그 페친들... 오늘은 못 잡겠는데요."

노먼이 황당한 표정으로 시몬을 바라보자, 시몬이 앞의 흙길을 가리켰다. 노먼이 시몬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참을 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한숨을 쉬었다.

"여기 데스웜이 있을 줄은 몰랐군... 성체인가?"

"혈기 왕성한 성체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요. 어린 놈이거나 너무 늙어서 쭈그러든 걸 겁니다."

시몬은 그렇게 답하고 칼을 빼든 다음 부글부글 끓는 듯이 흔들리는 흙길을 칼로 겨누었다.

"지금은 페친이 문제가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까?"

"...동감하네."

"일단 저기 흙길에 저놈은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아, 참. 이건 별도 서비스니 돈 좀 준비해 두시고요."

시몬은 그렇게 말하고 칼에 붉은색 가루를 뿌린 다음 부글부글 끓는 흙길에 유유히 걸어들어갔다. 몇초 지나지 않아 땅이 지진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시몬의 발치에서 데스웜이 나타나 그를 꿀꺽 삼켰다. 하지만 데스웜이 고통에 몸을 마구 흔들다가 시몬을 뱉어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데스웜의 몸통이 잘게잘게 분리되었다. 병사들은 탄성을 내질렀지만, 노먼과 시몬은 아직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기뻐하긴 이른데."

그 말과 함께 분리된 몸통에서 작은 데스웜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노먼은 "크롤러!"라고 외치고 철퇴를 뽑고, 시몬은 자기에게 달려드는 크롤러를 베고 뒤로 물러났다. 병사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멀뚱히 있다가 크롤러에게 몇명이 뜯기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악!"

대부분 잘 싸웠지만 몇몇은 도망치다 크롤러 여러 마리에게 몰려 5분도 안 지나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싸움이 끝나자 크롤러에게 목숨을 잃은 병사는 7명, 부상당한 병사는 17명이나 되었다. 노먼도 크롤러의 이빨에 팔뚝을 물렸다.

"젠장... 오늘 잡화상에 티네일 껍질이 품절이 아니길 바래야겠군."

시몬은 주머니에서 티네일 껍질을 몇개 꺼내 노먼에게 내밀었다. 노먼은 받아들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발을 옮겼지만 이내 주저앉았다. 시몬은 한숨을 쉬고는 노먼의 몸을 수색했다.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다리, 팔목 부분에 물린 자국이 선했다. 

 "이렇게 물리고도 아직까지 살아있을줄은 몰랐네요. 독이 더 퍼지기 전에 빨리 껍질을 씹고... 빨리 마을로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노먼은 끙끙대면서 페친들이 있을 법한 고개를 노려보다가 시몬의 말에 응했다. 병사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마을로 내려왔다. 껍질을 씹었던 노먼과 몇몇 병사들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씹지 못했던 병사들은 앓는 소리마저도 못 내고 있었다. 시몬이 촌장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촌장이 로아를 불러서 이것저것 가져오게 했다.

 "나도 자네처럼 몸이 날쌨으면 좋겠군. 지금 물려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도 무거워..."

 "말 그만 하시죠. 크롤러 신경독은 움직이면 더 빨리 퍼집니다."

  곧 언덕에 있던 마술사가 양손에 큰 가방을 하나씩 들고 내려왔다. 시몬은 마술사의 가방에 든 것을 대충 짐작하고는 말없이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마 숲에서 잡은 애벌레를 눈 앞에서 찧어서 입 속에 억지로 집어넣고, 물린 부위를 칼로 째고, 차도가 없으면 노먼의 동의하에 숨통을 끊어서 고통을 끝내주고. 그것이 마술사의 의학이었다. 이 게임에서의 인간문명 수준을 보면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시몬은 거북한 감이 있었다.

 [헤링턴 효승과의 약속이 30분 남았습니다.]

 BCI칩이 시몬, 이제는 한지상의 여흥을 깼다. 지상은 캐릭터를 촌장의 집 안에 옮겨두고 세이브한 다음 게임을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