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영화 <그래비티>가 소소한 장르 시비에 휘말린 적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국내에서는 이게 SF 장르다 아니다 말이 많았죠. 희한하게도 일반 관객들은 이 영화를 SF 장르로 보는 듯한데, 정작 SF 팬들은 우주를 다룬 테크노 스릴러로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영화 개봉이 얼마 안 남은 소설 <마션>도 그렇게 바라보는 독자들이 다수인 것 같습니다. 우리 클럽에서도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테크니컬 스릴러에 가깝다는 말이 나왔고요. 이유인 즉, <그래비티>와 <마션>은 얼마든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기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요소를 다뤄야 하는데, 상기한 작품들의 기술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주에 속했습니다. 똑같이 우주를 탐사하는 내용이라도 저 작품들은 <라마와의 랑데부>나 <네메시스>, <은하를 넘어서>와 전혀 다릅니다. <그래비티>에는 외계인, 인공지능, 초광속, 항성 항해 등의 요소가 전혀 나오지 않죠. 그러니 비일상적인 요소를 주시하는 SF 독자에게는 장르로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비티>와 <마션>에 비일상적 요소가 없다고 해도 작중의 사건 자체는 다분히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반론입니다. 저 작품들은 우주인의 표류를 묘사하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우주인이 우주 정거장 궤도나 화성에서 표류한 역사가 없습니다. 우주인이 저런 환경에서 표류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저런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창작가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각종 시뮬레이션 등으로 그런 상황이 야기하는 문제를 측정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입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류는 화성에 인간을 보낸 적이 없고, 거기서 인간이 산 적도 없습니다. 실현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로 실현한 적은 없습니다.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대체 역사처럼요. <비잔티움의 첩자>나 <비명을 찾아서>처럼 현실적으로 가능해도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그건 충분히 비일상적인 요소 아니겠습니까. <높은 성의 사나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SF 소설이죠. 우주인의 행성 궤도 조난과 외계 행성 생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등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설정입니다. 강대국들이 핵탄두를 쏴서 세상이 망하면, 그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핵전쟁 이후의 세계는 SF 설정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강대국들은 미사일 사일로에 전략 병기들이 가득함에도 여지껏 핵탄두를 상대 국가에 대량 발사한 적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미국과 러시아와 중국 등의 강대국들이 사이좋게 망한 적도 없고, 강대국이 망해서 혼란이 생긴 적도 없고, 그런 혼란을 틈타서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거나 약탈자들이 활개치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상이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바빌론의 물가에서>와 <해변에서> 등은 비일상적 요소(외계인, 인공지능, 괴수 등)가 없음에도 SF 소설의 걸작으로 찬사를 받습니다. 현실적인 기술 여부는 장르 속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실제 역사에서 벌어졌는가, 그 사건이 과연 일반적인 생활상에서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게다가 행성 궤도 표류와 외계 행성 생존은 그 자체로도 범상치 않은 사건입니다. 항공기 추락이나 선박 전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차대하고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우주 사업이라는 건 일반인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인에게 우주 탐사선이 태양계를 벗어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식일 겁니다. 우주 사업이라는 건 너무나 전문적인 나머지 일반인이 쉽사리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관심조차 기울이기 어렵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20세기의 인간이라면 마땅히 태양계 지식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 세상에는 태양계가 뭔지 알지 못하는 현대적 원시인도 수두룩할 겁니다. (가니메데가 뭔지 금방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비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주 사업을 일부 강대국만 추진하는 이유도 그만큼 돈이 엄청나게 깨지는 일이기 때문이죠. 심지어 예산 많기로 유명한 미국마저 달에 인류를 보낸 지 한참 지났습니다. 그렇게 우주 사업이 현대 사회와 동떨어졌으니, 우주인의 표류를 일반적인 항공기 추락이나 선박 전복과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저런 기술적인 문제보다… <그래비티>와 <마션>이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부족한 점은 전복 혹은 변화입니다. SF 팬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인식의 확장' 내지는 '세상 뒤집기' 말입니다. 대개 사이언스 픽션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플롯을 선호합니다. 외계인이 쳐들어왔건, 핵전쟁이 터졌건, 괴수가 준동하건, 정신력이 지구를 격리하건 간에 세상이 뒤집어져야 진짜배기 SF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단 세상만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 인식까지 바뀌어야 합니다. 물리적인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그 환경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인식까지 확장해야 비로소 SF의 진수라고 할만합니다. 그러나 상기 두 작품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에만 연연하지, 행성이 꼴까닥하거나 문명이 밥상처럼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조난 우주인의 인식이 확장되었다고 보기에도 좀 애매하죠. 인생의 각오를 다지고 각성했을 따름입니다. 심지어 실존주의와 허무주의 순문학만큼의 전복 성향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 두 작품을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의견은 일리 있어 보입니다. 사실 저 두 작품의 진짜 문제는 기술 여부가 아니라 세계 전복과 인식 확장일 수 있습니다. 그게 꼭 SF 장르의 필수 조건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보자면, 저 두 작품을 SF 장르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우주인 표류가 범상치 않은 사건인 만큼 SF 설정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거야 제 생각일 뿐이죠. 뭐, <마션>이 정말 SF 소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장르 속성을 따지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특징을 한 번쯤 생각해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래비티>와 <마션>은 기술적인 정교함, 전대미문의 거대한 사건, 우주로 진출하려는 로망, 지구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을 담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장르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재미를 만끽하면 그만이지, 장르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