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게시판에서 <솔라리스>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

 

저는 SF/판타지에서 제일 재미있는 장면 중 하나가 인간적인 관점을 벗어날 때입니다. 현실에서 인간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다른 생명체와 교감하지 않습니다. 인간 외에 교감 상대라고 해 봤자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 정도. 허나 창작물의 인간은 수많은 종족들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SF라면 외계인, 초인, 돌연변인, 인조인간 등이 있겠죠. 판타지라면 엘프, 드워프, 하플링 등과 파티를 이룰 것이고요. 그런데 이들 외계인이나 드워프 등은 태생적 특성과 사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과 사고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당연히 인간은 자기 관점을 유지하다가 다른 종족과 마찰을 빚기 마련이고, 이 와중에 ‘좀 더 다르게 생각해보는 시각이 생겨납니다. SF/판타지의 묘미가 이 순간 드러납니다. 인식의 한계가 좀 더 확장되고, 이른바 선입견을 깰 수 있는 발상 전환의 기회입니다.

 

진지한 <솔라리스>부터 해학 넘치는 <드래곤 라자>까지, 다양한 창작물이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 나갑니다. 대개 작품에서 주인공은 인간인데, 그래야 독자들의 감정 이입이 쉽기 때문이겠죠. 독자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인간이고, 작품을 읽어 나가며 줄곧 인간적인 관점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외계인이나 드워프와 충돌합니다. 이는 문명의 충돌의 마이너 버전이라 할 만합니다. ‘종족의 충돌’이라고 해야 하나. 그 후, 독자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한 번쯤 생각에 잠기겠죠. 자신이 소설 속 인간처럼 잘못된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는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는지 자문할 겁니다. 사실 작가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이런 것입니다. <솔라리스>의 주인공 켈빈은 플라즈마 생명체를 바라보며, 세상에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점을 깨우칩니다. <드래곤 라자>의 후치는 시종일관 이루릴, 엑셀핸드 등과 이야기하며 인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죠.

 

저는 그래서 저 자신을 선입견이 적고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으면 사람이 바뀌는 법. 책 속에서 느꼈던 것처럼 실생활에서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시야를 좀 더 넓게 보려고 했죠. 하지만 ‘나와 다름을 이해’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더군요.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할까요. SF/판타지를 자주 읽는다고 해서 항상 인간적인(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는 없나 봅니다. 책을 읽는 것과 실제 행동은 다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