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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는 어느덧 싸움에 살고 죽는 동물이 된 것 같습니다]

 

- 초음파 탐지와 범고래

 

클럽에서 종종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고래는 그 영리함과 신비로운 능력으로 SF에도 곧잘 출현하는 동물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빨고래류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향유고래와 돌고래가 주인공으로 많이 나오죠. 아무래도 수염고래는 인간과 부딪힐 일이 크게 없었고, 괴물 취급을 받는 향유고래나 친숙한 돌고래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에 문학 쪽에서도 많이 나오나 봅니다. 특히, 고래의 특징 중 하나인 초음파는 SF 소재로서도 활용도가 무궁무진할 만큼 신기해서 향유고래나 돌고래를 다룰 때는 꼭 짚고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비단 SF 쪽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도 초음파 탐지를 초능력에 비유하곤 합니다. 향유고래가 초음파로 대왕오징어를 기절시키거나 돌고래가 눈을 가린 채 숨겨둔 물건을 찾아내거나 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에서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향유고래나 돌고래와는 달리, 범고래 생태를 설명할 때는 초음파에 관해 언급하는 걸 거의 못 봤습니다. 범고래도 엄연히 돌고래이고, 초음파를 이용해 어두운 바다를 헤쳐 나가고 먹이를 쫓습니다만. 이 동물이 다큐멘터리에 나오거나 혹은 사람들의 입에 오를 때는 언제나 '싸움 실력'만이 화제가 됩니다. 범고래가 백상어를 잡아먹는다더라, 메갈로돈을 이긴다더라, 물개 떼를 학살한다더라 등 일반적인 생태보다 사냥에만 눈길이 쏠리죠. 이들이 감각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사회 체계를 얼마나 잘 갖추었는지는 대개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특히, 초음파 이야기는 빼먹는 게 관례 같더군요. 물론 범고래가 막강한 동물이긴 합니다만, 무리 싸움에만 치중해서 생태의 다른 일면을 놓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아마 SF에 범고래가 안 나오는 이유는 초음파를 이용한 초능력자 분위기보다 패거리 싸움꾼 이미지가 강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군용 돌고래의 활용 가능성

 

바다목장이나 해저도시는 좋은 소재거리입니다. 비단, SF 작품만이 아니라 아동용 과학만화 등에도 자주 나오죠. 이런 만화에 해저도시와 함께 자주 나오는 것이 돌고래인데, 미래에는 돌고래를 개(특히 알사시안)처럼 이용한다는 겁니다. 목장에서 어군을 관리하며, 조난당한 사람을 구해주고, 심지어는 군용으로 활용해 적군의 잠수를 감시하거나 기뢰 등을 찾아내 제거한다는 거죠. 군용 돌고래는 미군에서 활용한 적이 있다고 하며, 각종 매체에서도 미래 해저에는 돌고래가 활약하는 식으로 나오긴 합니다만.

 

어군 관리나 인명 구조까지는 모를까 군용으로 활약하기엔 뭐랄까,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봅니다. 사실 미군에서 썼다고 하는 것도 기뢰 탐지/제거라는 아주 제한적인 영역이었죠.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보자면, 폭발물을 탐지해 찾아내는 군견과 위상이 비슷할 겁니다. 다만, 군견이 폭발물 탐지 외에도 기지 방어, 용의자 추격, 마약 탐지 심지어 무장 해제까지 동원되는데, 돌고래는 이만큼 범용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현대 해전은 수병 개인이 아니라 함선이 중심인데, 이걸 일개 동물인 돌고래가 추격하거나 방어하긴 사실상 불가능하죠. 잠수부가 침투한다면 분명히 무장하고 있을 텐데, 비무장인 돌고래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거고요. (흔히 묘사하듯 초음파 무기가 발달한다면 또 모를까요) 게다가 인간이 일일이 지시할 수 있는 군견과 달리 돌고래 옆에는 항상 잠수부가 같이 할 수 없으므로 상황에 따라 지시를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육지와 바다라는 환경적 차이 때문에 돌고래는 군견처럼 활용하기 힘들다는 거죠.

 

물론 기뢰가 함선에 매우 위협적이기에 이걸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활용 가치가 대폭 올라간다면, 돌고래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글쎄요, 단지 기뢰를 제거한다는 것만으로 많은 비용을 들여 동물을 군용으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뢰에 관해 지식이 별로 없어서 이 부분은 확실히 단정짓기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