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아닙니다.

  일전에 “슬레이어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마법 역시 하나의 과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짝 더 나아가서… 만약에 마법이 인간에 의해서 사용되는 ‘마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로서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작품 중에서 코야마 모토씨의 “건성건성 던젼(おざなりダンジョン)”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대륙이 갈라지기 전의 곤드와나를 무대로 펼쳐지는 판타지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마법이 등장하는 동시에 상당히 진보된 기술이 함께 소개되지요.

  바로, “마법 기관”이 그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매우 다채로운 동력 기계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을 바로 마법을 에너지원으로 하고 있는 엔진으로서 작동시킵니다.

  마법 자체는 그야말로 수많은 마법사들이 한참 주문을 외어야 골렘 한마리 움직일 정도지만(물론, 엄청나게 강력한 마법사들도 있지만…) 마법 기관을 이용하면 비교적 약한 마법력으로도 큼직한 전차를 움직일 수 있지요.

  때문에 이 작품은 마법이 나오고 용들이 돌아다니고, 몬스터가 날뛰는 그런 세계의 이야기임에도 SF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게 사실입니다. 인류 탄생 이전의 과거… 곤드와나라는 하나의 대륙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에도 말이지요.


  비단 이 작품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마법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작품들은 말이지요… 제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는 “란스” 시리즈에서도 역시 마법은 에너지원으로서 사용됩니다. 이를 주특기로 삼는 캐릭터는 –본래는 마법사였지만 마법을 잃고 과학을 도입하게 된-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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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사로서의 힘을 잃었지만, 과학으로 이를 대체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까요? -


  장거리 공격용의 대포 튤립 1호를 시작으로 하는 그녀의 튤립 시리즈는 마법을 에너지원으로 매우 독특하고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지요.(이를 테면, 드라마 CD에서만 등장하는 “튤립 28호”는 두 개의 스위치 만으로 다양한 조작이 가능한 거대 로봇입니다.^^)


  일전에 ‘판타지 세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라는 이야기에서 “마법이 있는 대신 과학은 발달이 늦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는데, 저는 한편으로 그 반대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법으로 인해서 일반적인 과학의 발전은 뒤쳐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법을 에너지원으로(혹은 다른 특별한 도구로) 활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과학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란스”나 “건성건성 던젼”에서 마법 기관을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석탄이나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기관, 혹은 내연 기관보다 뒤질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보다 일찍 ‘동력’이 등장함으로서 산업 혁명을 더욱 빠르게 급진전시킬 수도 있겠지요. “스팀펑크” 세계에서 내연 기관 대신 증기 기관이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 “스팀 보이”나 “사쿠라 대전”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듯이…

  마법이 하나의 법칙으로서 존재한다면, 동시에 그것은 과학의 일종으로서 우리 세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셰르부르의 저주”(마법탐정 다아시경 시리즈)에서처럼 마법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도구 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올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 세계의 발전을 더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전자의 물이 끓는 ‘자연 현상’을 바탕으로 증기기관이 만들어져 산업 혁명이라는 발전을 낳았듯이…

  판타지에서 마법은 신비한 힘이지만, SF의 세계에서 마법은 신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특정한 법칙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과학이지요.



  "건성건성 던젼"에서는 길드라는 조직 내에서 기술자와 마법사 간의 실력 대결이 펼쳐진 일이 있습니다. 한쪽은 마법을 쓰지 않고 기술 만으로, 또 한 쪽은 기술을 쓰지 않고 마법 만으로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지요. 이때 주인공(모카)의 친구가 기술자의 조수가 되어 일하고 있는데, 한 명의 마법사가 이런 말을 남기고 있지요.
"나는 양쪽이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네.(라면서 그 조수가 달라고 하는 도구를 공중에 띄워서 전해줌) 하지만, 자네처럼 기계를 수리하거나 할 수는 없지."

  그리고, 중요한 대결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기계의 동력이 되어서 일하고 있던 주인공 모카의 승리...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의 힘이라는 것."이라는 점이지요.

  마법도, 과학도 결국 인간의 힘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어느 쪽이 우수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p.s) 데스스타의 능력을 자랑해 보이는 장군에게 "포스의 힘 앞에선 그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던 다스베이더는, 그런 점에서 깨달음이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자신 과학 기술이 없으면 살아있지도 못할 존재였다는 점에서...

p.s) 일반적으로 마법사를 '마법을 사용하는 전사'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는 '세상의 신비를 연구하는 이들'. 다시 말해 '학자'라는 점 역시 한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는 말하자면, 현재의 과학자와 같은 이들이니까요.


* 건성건성 던젼(おざなりダンジョン)은 국내에서는 전사 모카라는 제목으로 대원 출판사에서 16권까지 발매되었습니다. 17권 완결의 작품을 16권만 내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_-;;
  일본에서는 후속편으로 "될대로 던젼(なりゆきダンジョン)", "적당히 던젼(なおざりダンジョン)"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만, 본편도 다 안 나온 마당에 기대는 못하겠죠.

* 란스 시리즈는 현재 7편(작품 숫자로는 10편째)의 작품이 발매되어 있는 앨리스사의 미소녀 게임입니다.(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가장 많은 시리즈가 나온 미소녀 게임이기도 하지요.)
오사카인 특유의 장인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매번 충실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는데, 특히 기획자인 Tada씨에 의해 구성된 세계관이 매력적이지요.
18금의 작품으로 –스토리에서 선정적인 요소를 뺄 수가 없는데다, 엄청나게 튀는 내용, 게다가 무시무시할 정도의 대사량으로 인해서- 국내에 소개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번쯤 소개되었으면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앨리스사 자체에서 한글화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다고 하더군요. 번역이 되면서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 조금이라도 다르게 바뀌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선지 한번 나온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일도 없고 게임기 쪽으로 컨버젼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일본 미소녀 게임의 역사와 함께 하는 회사인 만큼(앨리스 소프트의 전신인 챔피온 소프트에서 역사상 최초의 미소녀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그만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앨리스 소프트의 팬으로서는 역시 오묘한 입장이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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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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