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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역사 포럼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반군의 지정 사수, 무스타파. 설정과 역할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거 밀리터리 게시판에서 해도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네요. 게시판 성격에 어울리는 것 같아 일단 여기다 이야기를 남겨 봅니다.
대개 창작물에서 주인공은 약자로, 악당은 강자로 나옵니다. 주인공이 악당을 너무 손쉽게 이기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주인공이 고난을 겪을수록, 적에게 얻어 맞을수록 훨씬 재미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밀리터리 스릴러에서는 이런 관계가 역전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군이 주인공인 창작물은 더욱 그렇습니다. 미군은 워낙 군사력이 독보적인 까닭에 강자로 내세울만한 악당이 없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막강한 미군이 주인공으로, 허약한 반군이 악당으로 나오기 십상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도 그렇습니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은 제목대로 미군의 저격수입니다. 주인공에게는 당연히 강력한 라이벌이 존재해야 하는 법. 시리아 출신의 반군 지정 사수 무스타파가 라이벌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무스타파는 강력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여기저기 많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일단 겉모습만 봐도 그렇습니다. 크리스는 우락부락한 체격을 자랑하지만, 무스타파는 다소 늘씬하고 마른 근육질입니다.
군장으로 따지면, 차이가 훨씬 심하게 벌어집니다. 크리스는 네이비 실 소속답게 장비가 빵빵합니다. 7.62mm 탄두를 맞아도 멀쩡한 방탄 헬멧부터 시작해서 든든한 방탄 조끼와 효율적인 주머니와 각종 보호대, 패드도 믿음직할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전투화 역시 꽤나 그럴 듯한 물건이겠죠. 이에 비해 무스타파는 그냥 평상복을 입었습니다. 반팔 티셔츠와 긴 바지와 운동화가 전부입니다. 지령을 받고 출동할 때마다 머리에 천을 감싸지만, 그건 방어용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뜨거운 햇빛에게서 머리를 보호하는 게 고작이겠죠. 방탄 조끼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파우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덜렁거리는 가방을 어깨에 걸고 다녀요. 방어력 차이가 어찌나 심한지 실제로 무스타파는 먼저 크리스를 맞췄음에도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뭐, 살인 로봇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맞아도 안 죽는 상대로 어쩌자는 건지 본인도 답답했을 듯. 게다가 크리스는 항상 호위병을 대동하거나 호위 분대와 동행합니다. 무스타파요? 혼자 외롭게 돌아다니고,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가 많아요.
크리스는 차량이나 헬기를 타고 이동합니다. 반면, 무스타파는 그저 목표 지점까지 열심히 뛰어갑니다. 퇴각할 때도 개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닙니다. 작중에서 무스타파가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장면은 안 나옵니다. 설사 이용한다고 해도 그게 장갑 차량이나 공중 지원용은 절대 아니겠죠. 그냥 허름한 승용차로 이동할 겁니다. 게다가 사수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총기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크리스의 주무장은 맥밀란 TAC-338A입니다. 맥밀란 TAC 시리즈는 구경도 크고, 화력도 출중하고, 사거리도 긴 걸로 유명하죠. 이쪽 계열 총기가 최장거리 사격 기록을 갱신한 바 있습니다. 장갑 약한 차량도 뚫어버리고, 상대편 저격수도 잡고, 어쨌거나 잘 나가는 총기입니다. 물론 무조건 구경이 크고 화력이 좋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상황과 지형에 따라 어울리는 총기를 써야 마땅하죠. 중요한 건 맥밀란 소총이 크리스의 빵빵한 무장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이에 맞서는 무스타파의 주무장은 FPK/PSL입니다. 루마니아가 AK 시리즈를 토대로 만든 물건이죠.
FPK/PSL의 명성은 별 거 없습니다. 뛰어난 총기인 건 분명하지만, 맥밀란처럼 무슨 공돌이를 갈아 만든 수준의 명품까지는 아니죠. 작중에서 크리스는 맥밀란으로 거의 2km짜리 사격도 시도하지만, 무스타파가 FPK로 초장거리 사격을 노릴 수 있겠어요. 그런 시도를 엄두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엄연히 두 총기는 용도가 다르니까 FPK를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그만큼 무스타파는 정식 저격수가 아니라 견제용 지정 사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전술 및 사격 훈련도 크리스가 우세하죠. 사실 크리스는 체계적인 특수 훈련을 받은 군인이고, 무스타파는 그저 사격 솜씨가 출중한 운동 선수입니다. 물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니까 체력, 지구력, 극기, 인내, 집중 등이 일반인과 비교도 안 되겠죠. 그러나 지구력이나 집중력이 높다고 해서 올림픽 선수가 특수부대원에 비할 바는 아닐 겁니다. 무스타파가 전술 훈련을 얼마나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요. 그저 소총을 잘 쏠 뿐이지, 정식으로 군인들과 교전하기는 불리할 겁니다.
첫 문단에서 주인공과 악당의 무력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주인공은 약자, 악당은 강자로 나오는 게 공식이죠. 그런 점에서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주인공은 오히려 무스타파처럼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크리스 카일보다 무스타파에게 훨씬 눈길이 가더라고요. 게다가 설정도 상당히 독특하잖아요. 올림픽 사격 선수 출신의 반군 지정 사수라니. 아쉬운 건 크리스와 무스타파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굉장히 편파적이라는 점입니다. 감독은 나름대로 반전을 외치지만, 크리스의 비중이 너무 일방적이라서 반전 주장마저 무색할 지경입니다. 무스타파도 대사 좀 하고, 비중도 늘어나고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이거 네오콘들이 보면, 아주 환장할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뭐, 우리나라 수구 언론들도 그토록 졸작이라는 모 해전 영화를 침이 튀도록 칭찬했잖아요. 끼리끼리 통한다는 말처럼 해외라고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이런 무스타파 같은 인물을 소재로 블록버스터 좀 안 만드나 모르겠습니다. (사실 만들어봤자 폭싹 망하겠지만.)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강한게 우리나라 양판소가 생각나네욯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