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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역사 포럼
밀리터리, 군사 과학, 그리고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판.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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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 그림. 1층 전체를 패판으로 가려서 구멍이 없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던 판옥선은 그 이전에 비해 구조적으로 큰 진보를 한 배입니다.
기존 갑판 위에 갑판을 하나 더 얹어서, 격군 (노꾼)은 기존 갑판에서 예전처럼 노를 젓고, 전투원은 위쪽 갑판에서 전투에만 전념하게 만든 것이죠. 쉽게 말해 전투실과 기관실을 분리한, 매우 효율적인 구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격군 (노꾼)과 전투원이 한 갑판 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노꾼은 전투 중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노를 저어야 했고 사수와 포수는 자기 편 노꾼을 피해서 적들을 노리고 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 옆면에 주루륵 노꾼들이 늘어서 있으니, 노꾼은 인간 방패가 되고 사수들 입장에서는 적을 쏘거나 볼 수 없는 사각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었죠.
이렇게 전투실과 기관실(?)이 분리된 결과, 기관실에 해당하는 1층에는 별다른 구멍이 없이 민판 나무로 쫙 발라버렸습니다. 괜히 구멍 있어 봐야 날아온 화살이나 조총에 노꾼만 다치니 구멍이 있을 이유가 없죠.
하지만 판옥선을 기본으로 윗 뚜껑만 덮은 구조인 거북선은 판옥선과 달리 패판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어째서 발생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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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과 판옥선의 차이. 옆면 패판의 구멍 유무에 주목하시라.
잠시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통제영 거북선 설명을 보시겠습니다.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패판에 구멍이 잔뜩 보인다.
"거북선의 제도:저판(底版)은 10쪽을 이어붙였는데, 길이는 64척 8촌이고, 머리쪽 너비는 12척, 허리 너비는 14척 5촌, 꼬리쪽 너비는 10척 6촌이다. 좌우 현판(舷版)은 각각 7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7척 5촌이고, 맨아래 첫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며, 차츰 길어져서 맨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113척이 되고, 두께는 다같이 4촌씩이다. 노판(艫版)은 4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4척이고 2번째 판자 좌우에 현자포 구멍 1개씩을 뚫었다. 축판(舳版)은 7쪽을 이어서 붙였는데, 높이는 7척 5촌, 위쪽 너비는 14척5촌, 아래쪽 너비는 10척 6촌이다. 6번째 판자 한가운데 지름 1척 2촌의 구멍을 뚫어 키[舵]를 꽂게 하였다. 좌우 현(舷)에는 난간[舷欄:속명은 信防]을 설치하고 난간 머리에 횡량(橫梁:속명은 駕龍)을 건너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난간[牌欄]을 만들었는데, 현란에서 패란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며, 좌우 패란 위에 각각 열한 쪽의 판자(덮개:속명은 蓋版 또는 龜背版)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뱃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길이는 4척 3촌, 너비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고, 좌우 패에는 각각 2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혈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냈으며, 문 옆에는 각각 포혈 1개씩이 있다. 좌우 복판(覆版)에도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포판(鋪版) 아래 방이 각각 12칸인데, 2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3칸에는 화포·활·화살·창·칼 등을 넣어두고, 19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사용하였다. 왼쪽 포판 위의 방 1칸은 선장이, 오른쪽 포판 위의 방 1칸은 장교들이 거처하는데, 군사들은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혈에 대포를 대놓고 쉴새없이 쟁여 쏜다. ……지금의 통제영귀선이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역시 약간씩 치수의 가감이 없지 않다……"
(출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1g2050b003).
헷갈리니 일단 용어 정리를 하죠.
저판: 배 밑바닥
현판: 배 옆판. 저판에서부터 흘수선 위까지 올라오는, 배의 하부의 부풀은 옆면입니다.
노판: 배 앞판. 내용이 미묘한데, 보통 노판이라고 하면 현판과 같은 위치에서 배 앞을 막아주는 부분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에 닿는 밑부분이 아니라 그 위의 상부 구조물, 즉 앞쪽 패판 (장갑판) 부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높이도 판자 숫자도 그림과는 전혀 맞지 않을 뿐더러, '2번째 판'에 뚫었다는 현자포 구멍도 그림에는 횡량 (가룡, 가로대) 위에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4척 밖에 안 되는 배 앞면 밑바닥 판에서 2번째 판에 구멍을 뚫었다면 물이 줄줄 샐 수 밖에 없죠.
축판: 배 뒷판. 이것은 노판과 달리 저판에서부터 이어 올라온 부분입니다. 7장을 이어 붙였다고 하고, 높이나 키 구멍이 뚫린 위치 (6번째 판)나 배 구조와 부합합니다. 즉, 위 설명에서는 노판 설명 부분에 배 앞쪽 패판 설명이 잘못 올라가 있고, 노판 설명은 빠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갑판, 즉 포판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패: 난간 위로 세운 방패
현란: 현 위의 난간, 즉 1층 갑판과 같은 높이의 난간
패란: 패 위의 난간, 즉 2층 갑판과 같은 높이의 난간 (2층 갑판이 있다면)
복판: 覆은 보통 '다시 복'으로 쓰이지만 '덮을 부'로도 쓰이는 한자입니다. 즉 지붕을 덮은 11장의 판자를 말하는 것으로, '부판'이라고 읽는 것이 옳을 겁니다.
포판: '펴놓은 판'이라는 뜻으로, 묘사를 보면 흔히 말하는 갑판, 즉 1층 갑판을 의미합니다. (원래 갑판은 근현대 전함의 '방어력이 있는' deck을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용어로, 전근대에는 배의 그 부분을 설명할 때 갑판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될 수가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가장 널리 사용하는 말이 되었으므로 여기서는 포판 등을 설명할 때 갑판으로 통일합니다.)
아무튼 이 설명을 보면 패에는 22개의 포혈과 12개의 문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배 옆면에 문이 정확히 12개, 포혈도 22개가 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판옥선과 달리 거북선의 패판에는 실제로 구멍이 있었다는 거죠. 포혈이 늘어선 패판 밑에 노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노꾼과 포수가 같은 층에서 활동했음이 명확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판옥선과 달리 2층 갑판이 없거나, 있더라도 주 전투실로 이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림에서 보듯 '비늘처럼' 윗뚜껑을 덮었기 때문에 사람이 서서 활동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고요.
다시 말해 거북선은 막강한 방어력을 얻은 댓가로 판옥선의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판옥선에는 없는, 쓸데 없이 구조가 복잡해지는 돛대를 내렸다 올렸다 할 수 있는 기능도 방어력 올인 때문에 만들었을 거고요.
이것이 거북선이 흔히 오해하듯 비싸지만 강력한 주력함이 아니라 아니라 돌격선, 쉽게 말해 몸빵 역할로만 소수 사용되었던 이유이고, 판옥전도 충분한 방어력이 있다고 입증된 이후로는 임진왜란 내내 더 이상 건조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전쟁 전에는 왜군이 얼마나 셀지 모르니 방어력 몰빵한 거북선을 만들었지만, 막상 전쟁 터지고 보니 왜군의 화력이 워낙 후져서 판옥선을 능가하는 방어력은 잉여였던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북선이 2층 갑판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판'에도 12개의 포혈을 뚫었다는 것은 거기에도 포가 배치되었다는 뜻이고, 그럼 2층 갑판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비스듬하게 만들어진 부판 때문에 (경사장갑!) 사람이 활동할만한 공간은 1층 갑판의 절반 정도 = 판옥선 2층 갑판의 절반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죠.
또한 거북 머리 '위' 좌우에도 구멍이 있다고 했으니, 이 역시 2층 갑판이 없다면 나올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종합하면, '거북선은 방어력을 올리기 위해 2층 갑판의 공격력을 판옥선의 절반 정도로 줄여야 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원래는 막아놓았던 아래쪽에도 포혈을 뚫어 최대한 공격력 감소를 막으려 했다.' 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볼 것은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역할입니다.
2층은 공간 부족으로 공격력이 반토막이 되고 1층은 노꾼들 때문에 포 운용에 지장이 많았겠지만, 방어에 올인한 돌격선 특성 상 적진에 맞닿은 후에는 노꾼들은 노를 잡지 않고 그냥 둥둥 떠 다니는 벙커가 되어서 사방으로 대포만 쏘아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노꾼이 그대로 포수가 되므로 1층 갑판의 공격력은 판옥선의 2층 갑판 못지 않게 올라가게 됩니다. 즉 판옥선의 공수주 밸런스가 1:1:1이었다면, 거북선은 일반 모드일 때 0.7:2:1, 시즈 모드일 때 1.5:2:0 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방어력 2는 왜군 상대로는 완전히 잉여였겠지만서도.
덧붙여 전라 좌수영 거북선 설명 역시 2층 갑판의 존재, 그리고 그 2층 갑판의 유효 공간이 판옥선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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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거북선. 지붕에 문까지 나 있다. 2층 갑판이 없다면 나올 수가 없는 구조.
" 전라좌수영귀선의 치수·길이·너비 등은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의 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혈이 2개, 현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혈이 각각 10개씩, 복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6개씩이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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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회는 이상 인간만이 만들 수 있어. 보통 사람은 보통 사회밖에 못 만들지.
- 애플 시드: 아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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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화력도 화력이지만, 2층 갑판에서 '내려다보며' 전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접전에서도 우월했습니다. 다만 병사들 개개인의 능력은 오랜 전국 시대에 단련된 왜군 쪽이 위고 조총 같은 개인 무기도 왜군 쪽이 위니까 쌍방 피해를 입는 근접전을 벌이는 대신 최대한 멀리서 화력전을 벌인 거죠.
화력전이라고 해 봐야 당시 주력 총통이던 지자 현자 총통의 유효 사거리가 100 ~ 200보 정도였습니다. 백 미터 내외의 거리에서 싸운 거고, 이 정도면 언제든 근접전으로 돌변할 수 있는 거리죠. 기동성은 왜선 쪽이 위이므로, 근접전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맨 앞 함선들이 적선과 달라붙어 근접전에서 적을 저지하고, 그 뒤의 함선들이 화력 지원을 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거북선은 말할 것도 없고 판옥선만 해도 왜선에 비하면 방어력이 남사벽이라, 자주포로 비유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굳이 전차에 비유하자면 일본의 주력함인 세키부네가 M4셔먼이라고 했을 때 판옥선은 티거 급, 거북선은 마우스에 가깝죠. 아니면 세키부네를 치하, 판옥선을 셔먼, 거북선은 퍼싱 정도로 생각해도 될 겁니다.
다만 판옥선이 세다는 것은 동아시아 한정이고, 동 시대 유럽의 갤리온은 판옥선보다 대략 5배 정도 몸집에 화포도 성능도 훨씬 우월했습니다.
판옥선도 꽤나 높은데 거기서 한층 올려 뚜껑 씌운다는건 건현이 너무 높긴 하죠. 그대로 만들면 복원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긴 하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당대 조선의 총통류가 경량 소형이래도 포 놓고서 노꾼이 활동할만한 공간이 그리 쉽게 나올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포만 놓는게 아니라 포탄에 화약에 등등 잔뜩이었을텐데 난장판이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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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갑판이 있는데 또 그 위에 뚜껑을 씌우면 분명히 복원력 면에서 위험하긴 하죠.
하지만 2층에 있던 인원과 장비의 절반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렇게 취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판옥선 2층에 실리는 화포와 인원 무게 /2 = 뚜껑의 무게면 판옥선과 같아지는 셈이거든요.
화포와 사수, 노꾼이 얽혀 있는 1층의 난장판은 판옥선 나오기 전까지 조선 배들의 단점이었고, 판옥선의 장점을 버리고 과거로 돌아간 거북선도 마찬가지로 원거리 기동전은 효율적으로 행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본 역할이 '몸빵'이니 별 상관 없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적선과 얽혀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버티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라.
거북선이 전차라면, 판옥선은 자주포 같은 느낌이군요. 저는 가끔 거북선과 판옥선을 운용하는 조선 수군이 왜군 말고 다른 나라 해군과 싸우면 어땠을지 생각합니다. 거북선 운영 논란이 많은 것도 왜군하고만 붙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고…. (그만큼 전술이 한쪽으로 편중되니까요.)
옛날에는 영국 장궁수들이 프랑스 기사를 몰살하듯 조선 수군이 우열한 함포 사정거리로 닥돌하는 왜군을 피해 없이 침몰시켰다는 이야기도 많았죠. 이순신 장군이 피해 입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조선 수군의 함포라고 그렇게 사정거리가 긴 것도 아니며, 어느 정도 근거리에서 싸웠다는 이론이 우위더라고요. 그렇다면 적의 공격을 방어할만한 돌격선도 필수였겠죠. (따지고 보면, 영국 장궁수 이야기도 과장한 면이 많긴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