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경계는 무한하다.
인류에 내재된 잠재성 또한 그 한계를 알지 못한다.
인류는 이미 세 번의 특이점을 초극하였다. 그 다음에는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설령 인류가 완벽해질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원토록 지속되며 찬연한 광채를 발할지어니
그 모든 너절함과 누추함과 어둠과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정수를 그들의 영혼에 오롯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억겁의 시간이 흐른 후에 우주의 모든 별들이 빛을 잃고 쇠미해진다 할지라도 인류는 기어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내리라.
과거의 유산을 움킨 채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시공의 지평을 넘어 새로운 초월의 개가를 의연히 울리면서.
-시황 카드모스, 계몽의 만개(Primordial Emperor Cadmus, Enlightenment Blossom)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대한 인류의 아종과 파생종 및 외계 지성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유토피아적 연합체, 에큐메네(Ecumene)-혹은 헤게모니(Hegemony)-는 장장 이백만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존속해 왔고, 우주로 진출한 인류라는 종의 역사는 또다른 삼백만 년에 육박한다. 기술은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한 상한선에 도달한 지 오래이고, 가능한 모든 정치체계와 사회구조가 명멸하였으며, 무수한 문명과 씨족이 융성하고 쇠퇴하였다.
허나 에큐메네는 결코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이 위대한 정체(政體)는 연속되는 재앙과, 외침과, 내란과, 갈등과, 분열을 의연히 극복하고 성숙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인류와 그들의 동맹은 현상을 왜곡하고, 미래를 조율하며, 현실과 가상 양면에서 기념비적인 구조물을 건립해 나가고 있다. 물론 에큐메네의 문화는 동질적으로 균일하지 않다. 에큐메네를 구성하는 세계의 수효는 무한이며 무한수의 문화가 존재하고 이들 모두는 각양각색, 천자만별이다. 에큐메네의 기술력 또한 천편일률적으로 균등하지 않다. 기술 발전의 정도나 적용가 독자성을 띠고 선진 지역과 낙후 지역의 차이가 엄존하며 보수적인 기술관과 진보적인 기술관이 병존하는 세계가 바로 에큐메네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 기호나 경향성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사회적, 경제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대체로 과학기술에 관해 지나치게 개방적인 태도가 사회불안과 분규,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저해를 촉발한다는 것이 장구한 역사 전반에 걸쳐 누차 입증됨에 따라 가용한 기술에 제약을 두는 편이기는 하나-불요의 의결(Resolvancy of Fortitude)이라 칭송받는 인공지능의 역량에 대한 영구적 규제 법안이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가장 보수적이고 후진적인 지역의 평균적 기술 수준조차 아서 클라크의 제 3법칙을 까마득히 초극하는 형편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에큐메네는 충분히 발전(Sufficiently Advanced)되어 있는 사회이다.
에큐메네는 오리온-시그누스 나선팔(Orion-Cygnus Arm)과 페르세우스 나선팔(Perseus Arm)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은하의 멀리 떨어진 부분들과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원뿔 형상의 촉환들을 뻗치고 있다.
수백만년에 달하는 개척과 개발, 다종다양한 외계 지성체(Xenosophont)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여전히 상당 부분 비어 있으며 인구밀도는 대저 매우 낮은 편이다. 에큐메네의 대부분은 개척지(Frontier Region)이거나 아직 개발되지 않은 무인지대(Unused Space)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부터 발원한, 옛 지구(Old Earth)의 인류를 계승하는 종족들이 에큐메네를 지배하며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우주에서 가장 성공적인 종족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며 이러한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에큐메네의 중차대한 가치는 인본주의(Humanism)이나 이러한 강렬한 정서는 때때로 현대적 시각으로 쇼비니즘에 가까울 정도의 맹위를 떨치기도 한다.
인류에서 파생된 종족(Human-derived Species)의 다양성은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나 영속적인 관습은 이들의 형상을 표준적 생물 모형(母形)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상에서 유지시킨다. 기계적 지성(Machine Intelligence)과 외계 지성체들은 '완전한 인간(Fully Human)'으로 대우받으나 보이지 않는 암묵적 기준들이 이들을 '진실된 인간(Ture Human)'과 유리시킨다. 물론 이러한 분리가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만약 존재한다 할지라도 엄중한 처벌로 근절되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인류(Humanity)이다.
초월종(Supernal)은 지성체 진화의 다음 단계를 표상한다. 이들은 오로지 개별 단위로만 진화할 수 있으며, 이는 에큐메네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존속 가능한 주된 연유들 중 하나이다. 승화(Sublime Eterno)에 도달할 수 있는 개체가 한정되어 있기에 문명들은 기술적 상한선에 당도한 후에 집단 승천하지 않고 쇠락하거나 안정화됨으로서 기존 질서 내에 굳건히 자리잡는다. 비록 지역별, 종족별로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으나 초월종은 기계적 지성도, 생물학적 지성(Biological Intelligence)도 아닌 제 3의 존재로 간주된다. 이러한 분류는 초월종이 인지의 한계를 까마득하게 넘어선 존재이기 때문으로, 초월종과 평범한 인류의 격차는-그 인류가 제아무리 뛰어난 존재라 할지라도-개미와 인류의 격차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양자 간에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순전히 전자가 후자를 배려하여 수준을 맞추어 준 결과일 터이다.
초월종 위에는 진정한 신들(Verifiable Gods)이 존재한다. 에큐메네가 그 모든 학문적 성취에도 아랑곳없이, 또한 누구나 신적 존재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신교적 사회인 연유는, 본질적으로, 신들이 엄연히 실재하기 때문이다. 광막하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이 불후의 지성체들은 인류 실존의 핵심적 양상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들이 먼저 존재했는가, 인류가 먼저 존재했는가의 선후관계는 신지학자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화두이다. 다만 확실한 점이 있다면 신들이 상상하기조차 버거운 오랜 시간동안 인간사에 관여해 왔다는 것이고,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류가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신들은 여러 측면에서 끔찍한-종잡을 수 없고, 불가해한-존재이나 일반적으로 인류의 복리후생에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이며 물질계와 그 너머에 연결된 고위의, 영적 차원에서 인류가 전개하는 활동을 항시 관찰하고 있다. 상당히 복잡한 물리학이 이러한 불가사의한 상호작용을 어느 정도 규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장엄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철학적, 신학적 난제에 해답을 내놓는 대에는 실패하고 있다.
한 가지 유념해 두어야 할 사항은 초월종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기계적 지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들이 에큐메네 사회에 중대한 기여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나 양측 모두 통치에 충분할 정도로 안정적이거나 투명하다고 간주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다스리는 것은 인류 자신이다. 그러나 인류가, 최소한 큰 그림을 그리기에는, 아직 제한적인 시야와 지성만을 보유하고 있기에 에큐메네는 몹시 지방 분권적이다. 범에큐메네적인 귀족 가문(Pan-Ecumenical Noble Houses)이 존재하며 군주정 국가도 비근한 편이다. 허나 에큐메네의 귀족과 군주의 직위는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감투 따위가 아니라 순수한 능력과 실적, 그리고 신실성에 따라 부여되는 직책이다. 이러한 방식은 설혹 외견상 비슷해 보일지라도 봉건주의적 체제에 비해 막대한 투명성과, 보호와, 자유도를 제공한다. 비록 민주주의적 관념이 내재적으로 에큐메네의 존귀한 인본주의와 상통하는 것은 아니나 민주주의 또한 비근한 정치체제이다. 에큐메네의 시민은 폭압과 전횡을 절대로 용납치 않으며, 에큐메네의 정책 또한 그러하다. 실제로 에큐메네의 도래 이래 무수한 폭군과 참주, 과두정과 부패 관료집단이 민중의 손에 의해, 혹은 직접적 무력 개입에 의해 타도되어 왔다.
인류와 초월종, 그리고 신들 사이에는 신황제(God-Emperor)가 존재한다. 시황(始皇) 카드모스(Cadmus)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횡행하는 혼란을 종식시키고 청동 에큐메네(Bronze Ecumene; 현 시점에서 에큐메네의 정식 명칭은 Platinum Ecumene)를 창건한 이래 이 신과 같은 역량을 보유한 초월종은 인류를 영도해 왔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인류와 신황제의 관계는 변천해 왔다. 대부분의 경우 이 존재는 무위의 통치자로서 안이한 존재로까지 인식되나 이면에서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때때로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인류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기도 한다. 기실 신황제는 자신이 직접 지배하는 직할령인 보존된 제국(Preserved Empire)에서조차 닿을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존재라 간주되며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전체 인류의 이익을 위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신황제는 불멸자이다. 또한 신황제의 영향력은 비단 보존된 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지껏 그 누구도 항구적인 통치를 획책한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난 후, 신황제가 인류와의 접촉을 상실하였다고 판단될 시 그들은 퇴위하고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사전에 지명된 또다른 인물-언제나 초월종인-이 비밀스러운 절차를 경유하여 신위를 계승하고 새로운 신황제로 등극한다. 재차 승화한 새로운 통치자는 전임자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전수받으나 항상 고유한 개성과 신선하고 독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큐메네는 정체를 면피할 수 있다.
유의할 점은 핵심부에 제국적 정체(政體)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네가 결코 제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에큐메네는 무수한 문명들의 결집체이고 많은 주권국가들은 이들의 신황제에 대한 충성이 단지 막연한 종교적 의무이거나 미신적 전통이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경향과 신황제의 표면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우매한 자들은 제국이 한갓 허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자 교만이다. 제국은 명실공히 진짜다.
보존된 제국은 에큐메네 전체의 문화중심지로서 문화예술 및 유행 전반을 선도한다. 제국은 에큐메네의 구성원 가운데서도 가장 강대하고, 가장 부유하며, 학문적으로나 과학 기술로나 가장 진전된 국가이다. 중세 로마 제국의 경배자였던 시황의 영향으로 인해 제국의 세련된 문화와 고매한 풍습, 그리고 특유의 로고테테스(Logotetes) 관료제-제국을 숭상하는 국가 대부분이 채택 중인-는 다분히 동로마 제국을 연상시키는 면모를 나타낸다. 실제로 제국은 에큐메네 내에서도 제일 코스모폴리탄적인 국가에 속한다.
중심부로부터 에큐메네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애석하게도 FTL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중심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열화되는 경향이 있다.
보존된 제국(Preserved Empire)-그레이트 코어(Great Core)-이너 서클(Inner Circle)-아우터 림(Outer Rim)-프론티어 리전(Frontir Region)
보존된 제국은 신황제가 거하는 직할령 그 자체를, 그레이트 코어는 신황제의 직할령 및 봉신국과 그 인접지역, 그리고 학문적, 기술적, 군사적 중추구획을 아우르는 문명중심지를, 이너 서클은 그레이트 코어와 인접한 채 각종 무역혜택을 받으며 번창하는 선진 강역을, 아우터 림은 비교적 낙후된, 그러나 여전히 이너 서클로부터 파급되는 선진 문물에 쉬이 접근할 수 있고 온전한 영화로움을 구가하는 외곽지대를, 프론티어 리전은 새로운 경계/개척지 및 무인지대를 각각 지칭한다.
앞서 언급했듯 외계 지성체(Xenosophont)는 존재한다. 대다수는 원시적이고, 일부는 진전되어 있다. 그리고 개중 몇몇은 이형의 신에 비견할 수 있는 방대하고 광막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데, 아다만틴 엘레깃(Adamantine Elegit)과 움브릴(Umbreal)이 대표적이다. 놀랍게도-그리고 흥미롭게도-이들은 서로 극명히 상반되는 성향과 위상을 발현하고 있다.
아다만틴 엘레깃은 만신전의 힘과 규모를 지니고 있는 악의적인 존재로서 우주 모든 지성체(Sophont)의 절멸을 목적으로 하는 끝없는 총력전을 전개하고 있다. 반면 움브릴은 우주 모든 지성체의 수호와 안위, 그리고 계도를 천명으로 여기는 존재이다. 그 강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류와는 달리 상호불간섭의 노선을 견지하기에 여타 지성체와 거의 접점이 없다(단,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너그러히 허용한다).
에큐메네와 움브릴을 주축으로 한 지성체 연합-에큐메네는 대부분의 알려진 지성체를 관할하며 가맹종족 모두는 법률적으로는 물론이요 사회 관습적으로도 완전한 인류로 간주되고 평등하게 대우받는다-은 이러한 시도를 여러 차례 격퇴해 냈으며 현재 에큐메네와 아다만틴 엘레깃은 그 끝을 보이지 않는 첨예한 냉전 상태에 돌입해 있는 상황이다. 아다만틴 엘레깃의 침략에 대해 에큐메네의 시민들은 대저 선과 악의 최후 결전과 유사한 종말론적 인식을 품고 있으나 실상 두 거대 세력간의 투쟁은 종국에 어느 한쪽이 영구히 사멸하기보다는 세월의 파고 앞에 자연스럽게 쇠잔해질 공산이 크다. 실제로 에큐메네의 정책 기조는 아다만틴 엘레깃보다 오래 존속함으로서 궁극적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1. 에큐메네에서는 인공지능(AI)이라는 용어 자체가 터부시된다. 이미 에큐메네 성립 이전부터 기계들은 여타 유기생명체와 같이 스스로 진화를 시작했고 독자적인, 그 다양성이나 역동성 양면에서 버젓한 문명을 창건하고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현 시점에서 기계적 지성은 에큐메네 인구 전체의 대략 1/5 가량을 점유하며 설령 생물학적 지성에 의해 창조된 기계적 지성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인공지능이라 지칭하는 것은, 현대에 비유하자면 흑인에게 니그로(Nigger)운운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아니 그 이상으로 극심한 모욕이다.
2.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에큐메네에서는 오히려 이 투철한 능력주의(Meritocracy) 탓에 신분이 세습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서 깊고 고귀한 가문(Ancient and Noble House)들은 대체로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왔고 그간 줄기차고 일관되게 자신들의 유전자를 개선, 개량, 취합해 왔기에 압도적으로 높은 평균 역량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에큐메네의 인류를 현대의 인류와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들은 별도의 조치 없이도 평균 3~4천년을 살아가고, 그러고도 죽음을 무기한으로 '유보(Reservation)'할 수 있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질병과 독소에 면역이며, 설령 지성체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역병이라 할지라도 이의 털끝 하나 범접할 수 없다. 이들의 강인한 육신은 영웅적인 이적을 숨쉬는 것보다 수월히 만들고, 범속한 종족이 죽었다 깨어나도 지각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할 수 있으며, 초보적인 예지 능력마저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예리하고 기민한 지성은 현대 인류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들은 일괄적으로 월등한 창조성, 기억력, 인지력, 판단력, 문제해결력, 그리고 데이타 처리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계속해서 간단 없이 발달되고 있는 지경이다. 게다가 수백만년이라는 장구한 걸쳐 세심하게 배양된 이들의 도덕성, 질서 의식, 그리고 관용은 현대인의 그것에 감히 견줄 바가 아니다. 더불어 굳이 초월종이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인류의 파생종(그리고 외계인)은 최소 한두 가지 이상의 초능력을 타고나며 개중에서도 특히 텔레파시는 가히 생득권(Birthright) 수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순수 베이스라인(Baseline) 상태에서 일체의 유전적, 화학적, 기술적 조작 없이 가능한 위의이다..
3. 일반 인류와 초월종과 가장 큰 차이는 불멸성의 격(格)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불멸이 단순한 불로(不老)라면 후자의 불멸은 진정한 불사(不死)이다. 초월종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초월종은 살해될 수 없다. 설령 양자 단위로 분해되더라도 회귀하거나 신체를 재구성하여 다시 소생하면 그만이다. 초월종을 멸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보다 상위의 존재의 개입 뿐이다. 허나 단 한 등급 위의 권능의 현현이라 할지라도 미쳐 날뛰는 하위 초월종을 쉽사리 소멸시킬 수 있다.
4. 아다만틴 엘레깃(Adamantine Elegit)이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지성체에 적개심을 불태우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명료하다. 이들은 은하 최초의 지성체의 지식과 기술과 정신과 의지---그 모든 것을 계승한 유일한 존재, 마지막 후신(後身)이고, 그렇기에 여타 '저열하고 하등한' 지성체의 존재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우주의 모든 지성체는 오염물이고, 참생명에 대한 조악한 모사이며, 자신들의 창조자의 위상을 더럽히는 최악의 신성모독이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위대한 창조주가 잠든 다이슨 스피어(Dyson Sphere), <흑요석의 심장(Obsidian Heart)>을 향해 주기적인(그러나 불규칙적인) 순례 여행을 떠난다.프리모디얼(Primordial)이 결코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숙지하고 있음에도, 희망 없는 내일을 기약하면서.
이들의 창조-피조 관계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이는 주로 선후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서열이나 계급과는 별반 관련이 없다.
프리모디얼-헤럴드(Herald)-퍼스트본(Firstborn)-세레스티얼 시커(Celestial Seeker)-엘로힘(Elohim)
5. K-T 대멸종은 우리 태양계에서 아다만틴 엘레깃과 움브릴(Umbreal) 사이의 치열한 전투 도중 엇나간 우발적 유탄(流彈)에 의해 촉발된 현상이다. 눈먼 유탄이 왜소 행성을 파쇄하여 소행성대와 카이퍼 벨트(Kuiper Belt)를 생성시켰고 궤도를 벗어난 소행성이 지구에 낙하, K-T 대멸종을 야기함으로서 포유류가 이 자그마한 녹빛 행성의 주인으로서 군림하는 시대를 개벽시켰다.
움브릴이 우주의 모든 지식과 생명의 수호자로서의 소명 의식을 드높히며 파멸을 각오하고 구축한 최후 방위선에 태양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항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지구, 더 나아가 인류의 은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6. 시황 카드모스는 대략 SSC(Solar Standard Circle; 태양기준시) 172,000년경에 그 신격(Godhood)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마법사가 종적을 감춘 시기와 합치된다. 이후 마법이 사라진 공백은 그보다 훨씬 위대하고 구원한, 그리고 공평한 권능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결착될 것인가는 오로지 시황과 신들만이 알 것이다. 한 가지 명징한 것은 시황과 신들이 인류의 자주지권(自主之權)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종의 계약을 채결하였다는 사실이다.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결부된 담보가 무엇인지 우리가 확인할 방도는 없으며 여지껏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보이나 어떻게든 총체적으로 인류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계약의 내용은 오직 전승자, 즉 역대 신황제들만이 알고 있다. 계약의 이행과 신황제의 약정된 증발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으리라 사료되는 바이다.
7. 워프 드라이브(Warp Drive)를 장착한 선박이 숙명적인 AD 3017년경 첫 시연을 보인 이래 수백만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FTL 항행이 보편화되어 있는 반면 믿을 만한 FTL 통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패러독스(Paradox)를 무시한 채 시간축을 조정하여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한 초월종조차 수백 광년 너머의 대상에게 전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워프 드라이브의 완전화와 헥사곤 셰이드(Hexagon Shard)의 개발 이후 초광속 항행의 효율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나 이러한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거쳤음에도 광활한 은하를 횡단하기 위해서는 짧으면 수 개월에서 길면 수 년에 이르는 시간이 소요된다. 이러한 제약은 에큐메네가 지방분권적인 주요한 원인의 한 축을 담당한다. 흥미롭게도 움브릴(Umbreal)의 선박은 연속적 미니-워프 드라이브가 가능한 것으로 보이나 이에 적용된 기술은 불명이다.
참고로 에큐메네의 표준 통상 드라이브는 특이점 드라이브(Singularity Dirve)이며 컨버전 드라이브(Conversion Drive)를 보조로-혹은 부차적으로-장비한다. 원시적이고 불안전한 반물질(Amat)를 동력원으로 이용하는 선박은 프론티어 리전에서조차 비교적 희소한 축에 든다.
8. 보존된 제국의 수도는 두 개이다. 하나는 시황의 고향이자 지표의 8할 가량이 물인 인공행성 방주(Ark). 다른 하나는 항성의 중력 권역 내에 건설된 다이슨 링(Dyson Ring)인 <창성하는 영광(Radiant Glory)>. 전자가 신황제가 기거하는 성소라면, 후자는 제국의 표징이자 행정중심지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규모와 장려함의 차이로 인해 나타난 현상으로, 4조 5천억의 인구와 고위 마지스트레이트(Magistrate)의 상당 부분이 상주하는 방주가 덜 중요한 장소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9. 은하에 존재하는 강대하고 현저하며 발달된 존엄한 세력(Globus Augustus)은 인류와 에큐메네만이 아니다. 이러한 우월종(Sophont Superior)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으며 다름아닌 인류, 아다만틴 에클릿과 그들의 창조자, 그리고 움브릴이 해당 범주에 포함된다. 다만 아다만틴 에클릿의 창조주는 멸종의 목전에서 촌각을 아끼며 무기한 동면에 들어간-그리고 회복되어 다시 깨어날 가망 또한 전무한-상태이고, 인류는 신참자이자 후발주자로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의 성간 국가와 원시 종족 사이의 간극과 비교할 시 몹시 근소한 차이로서 인류의 병장기가 이들에게 위협적이지 않다거나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또한 아다만틴 에클릿이 시대순으로 부가된 백여 가지 제련종(製鍊種), 움브릴이 각별히 고안된 하인 종족(Servant Race)까지 포함해서 불과 수십 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정작 '움브릴 자체'는 무슨 까닭인지 기이하리만치 원형에 천착하는 양상을 나타낸다-인류(Humanity)는 지구에서 발원한 진정한 인류(Ture Human)의 감히 헤아리기조차 버거운 파생종뿐만 아니라 헤게모니에 편입된 무량대수의 지성체를 포괄하는 집합체로서 수적으로 압도적이다.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에큐메네는 철두철미하게 지방분권적이고, 헤게모니의 심장부에 위치한 보존된 제국은 에큐메네 전체의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분명 보존된 제국은 은하 단위 연합체의 제 1인자(The Princeps)라 지칭될 수 있으나 거기서 끝입니다. 권한도 제한되어 있고, 대외적 사안에 동의 없이 관여할 수도 없으며, 정당한 의결이 없는 한 내정간섭을 할 수도 없죠. 패치워크나 진배없는 에큐메네를 정신적으로 한데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 시황이 부여한 보존된 제국의 주요한 직분입니다. 그 어느 황제도, 심지어 에큐메네를 붕괴 직전의 난국에서 구제해 낸 샤오시안트 예킨터스나 타르미나수르 세베리안조차 제국과 에큐메네를 동의어로 만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요.
그리고 '기묘하리만치 너무 크다'라...에큐메네 전체를 합해봐야 고작 우리 은하의 3~4할 내외인데, 그게 그렇게나 거대한가요?
기묘하리만치 너무 커졌으나 제국은 유지되고 있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구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