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왼쪽의 작품 이름을 선택하면 해당 작품 만을 보실 수 있습니다.
10개 이상의 글이 등록되면 독립 게시판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3.
“그 놈들이 정말 무서운 점이 뭔지 알아?”
사륜구동차의 뒷자석에 누워 있는 동률이 물었다. 구동차의 덜컹거림이 현기증을 몰고 왔다. 보다 더한 것은 가려움이었다. 마취제의 효력이 어느새 떨어지고 있었다.
미칠 듯한 것이었다. 그놈들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 수십 마리의 기생충이 몸 안의 이곳저곳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있는 느낌. 가장 심한 곳은 팔이었다. 하지만 긁어선 안 된다. 긁을수록 더 많은 눈들이 생겨난다. 그놈들이 이 세상을 엿보고 싶어 한다는 요구였다. 아직은 그들에게 낯선 어둠을 익숙한 어둠으로 바꾸고 싶다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이 세상을 보여줄 때마다, 지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끔찍한 지옥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들이 세상의 빛에 적응할수록, 지안은 지옥의 어둠에 익숙해졌다. 빛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어둠이었다. 우주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악마의 성전을 그놈들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인류보다 더 길고 오래된 지옥의 제단이 그의 몸속에 들어있었다. 그 제단의 기둥위에 싸늘한 시선으로 이 행성을 내려다보는 폭풍의 눈이 보였다. 토성이 그 눈으로 이 행성의 인류를 모두 엿보려고 하고 있었다. 지안에게 토성의 사악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거대한 암흑의 눈두덩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지구를 그는 보았다. 푸르고 푸른 타원의 공을 삼켜버리는 진흙 구덩처럼 시커먼 눈. 지구는 그저 눈깔사탕을 씹는 것처럼 토성의 위속에서 허물어졌다. 그런 영상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지안은 비명을 질렀다. 그런 꿈을 꿀 때마다 영혼의 한 조각을 잃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영혼의 전부를 그들에게 흡수당할 것이다. 그들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지금으로선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야돼?”
동률이 뒤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지안을 고개를 들어 짐칸의 창밖을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낯선 이유는 그의 눈으로 이곳의 풍경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이유는 그의 몸을 이용해서 그들이 이곳을 찾아온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갈림길이었다. 비포장도로로 진입하는 지점이었다. 경사가 미친 듯이 앞과 옆으로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곳, 조그만 언덕들이 머리와 머리를 잇대면서 맞부딪치듯이 맞물리는 곳, 등산객들도 찾지 않는 깊숙한 곳이었다. 그 산은 높지 않은 야산이면서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제법 울창한 숲을 형성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들어가. 더 들어가면 계곡이 있어.”
지안이 대답했다. 지안은 가끔 동률의 운전 실력을 비웃었다. 쉰 이 넘은 성인답지 않게 운전대만 잡으면 소녀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묵묵히 있었다. 그의 2059년형 사륜구동차는 자같밭을 달리는데 거침이 없었다. 돌밭길을 성큼성큼 디딜 때마다 요란한 덜컹거림이 전해져왔다. 소음과 진동이 다시금 지안의 의식을 희미한 경계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상상과 꿈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깊은 잠에 들 때마다 보이는 영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인간과는 달랐지만 인간과 비슷한 형체들, 넝마처럼 너덜한 검은 수의를 치렁하게 걸친 형체들, 그들의 검은 천 밖으로 튀어나온 손과 발에는 물갈퀴가 붙어 있었다. 그 시커먼 형체들이 거석 기둥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날 죽여야 돼.” 동률은 지안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잠꼬대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무덤을 찾는 게 먼저야.” 동률이 대답했다.
사륜구동차의 요란한 진동을 느끼면서 지안은 화성을 상상했다. 아직 인류의 발길이 닿아본적 없는 별,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도 암석과 자갈 밖에 볼 수 없는 황무지의 별. 화성을 인간이 탐험한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류가 그 별을 꿈꿔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화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붉은 죽음의 별일뿐이었다.
다시 그들의 형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 중의 한 명이 물갈퀴 달린 손으로 제단위에 놓인 책을 펼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기괴한 도형과 이상한 기호로 가득한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다. 그 자가 책의 한 페이지에 적힌 주문 비슷한 것을 암송할 때, 지안은 그 기괴한 음성을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개구리와 도롱뇽 같은 생명체가 인간의 음성을 발성하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차토구아 크툴루 파탄. 그나 바담피스 아포라고몬.”
동률은 하마터면 운전대의 손을 놓을 뻔했다. 급브레이크를 밞았을지도 몰랐다. 지안이 잠결에 중얼거린 그 주문, 그것이 지옥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암흑의 존재들이 보내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스캐토닉 대학의 호지슨과 이메일을 교환하면서 그는 헤령과 지안이 암송하는 그 해괴한 주문의 뜻을 계속 물었다. 하지만 호지슨은 결코 그 말들의 의미를 해석해주길 거부했다. 만약 당신이 그 뜻을 알게 된다면 결코 제 정신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미쳐버리거나 광증을 거부할 방법은 자살 외에는 없을 것이라면서.
대신 호지슨은 지안이 보내는 전문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며, 그들의 중얼거림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님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를테면 “판클루 글루나파”라는 문장 뒤에 “크툴루 리예”라는 문장이 따르지 않는지, “흐즐롱퀴”로 시작하는 발음하기 힘든 긴 단어 뒤에는 항상 “차토구아”라는 단어가 뒤따르는지 묻는 식이었다. ‘크툴루, 차토구아. 그런 이름들은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될 것들에게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는 아닐테지만요.’ 호지슨에게서 가장 최근에 받은 이메일의 내용이 떠올랐다.
먼 바다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변너머로 폭풍우를 담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번개가 물위로 하나둘씩 내리쳤다. 하지만 동률의 몸이 떨려오는 것은 자연의 그런 현상과는 무관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 두려움의 원인인지도 몰랐다. 동률은 한 번도 이해 한적 없는 감정이었다. 과학에 대한 신념이 생긴 후부터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에게 미지란 단지 아직 이성의 영역이 닿지 않은 분야일 뿐이었다. 불가해란 아직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명칭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자그마한 계곡이 나타났다. 가느다란 폭포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짙은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워서 조금 음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빼면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폭포일 뿐이었다.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허리도 잠길 것 같지 않은 작은 연못이 지키고 있는 이런 별 볼일 없는 곳에 열여섯 구의 시체를 묻어둘 수 있을까? 동률이 부삽을 들 때부터 지안은 예감할 수 있었다. 놈들은 그의 몸에 탑승했고, 언제든 그 몸을 이용할 수 있다. 그를 이용해서 그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를 이용해서 그들의 시체를 옮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항상 붕대 속에 놈들을 숨겨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지속되는 요구를 영영히 뿌리칠 수만은 없었다.
동률은 삽질을 한참동안 해보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자갈덩이를 겉어내고 축축한 모래알갱이까지 파헤칠 수 있었다. 서투른 삽질이 계속됐지만, 자갈덩이를 한참 동안 파헤쳐도,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없잖아.”
동률은 진흙으로 축축해진 부삽을 집어던졌다. 얼굴이 온통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진흙더미가 만든 언덕쪽으로 걸어가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몹시 지쳐보였다. 비를 가득 담은 먹구름이 계곡을 완전히 덮기 시작했다. 지안은 굳이 시체를 찾겠다면 해가 지기 전에 찾아야 한다고 그를 재촉했지만, 폭풍우가 잔뜩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시간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놈들이 내 몸을 이용해서 옳긴 거야. 내가 잠든 동안에 말이야.”
“너한테는 한쪽 팔이 없고, 두 다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걸을 수조차 없잖아. 그런 몸으로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매장하고, 파헤치기 까지 했다고?”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동정심이 가득했다. 지안은 휠체어 바퀴를 천천히 밀면서, 사륜구동차의 운전석으로 끌고 갔다. 그는 반쯤 열린 창문너머로 손을 뻗어, 운전대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자네가 이 차를 움직이는 거랑 비슷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마음만 먹으면 이 차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겠지만, 맘만 먹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어. 그거랑 똑같아. 그들은 내 몸에 탑승했고, 내 몸을 이용해서 어디든 갈 수 있어. 그놈들은 내 몸에 탄 탑승객들이야. 이제 내 몸을 조종하고 있지. 날이 갈수록 나는 나 자신을 지키기 힘들어. 요즘 들어선 거의 꼬박 하루를 내 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낼 때도 있어. 잠이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 동안에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정신이 들어보면 그 외딴 오두막집에 있을 뿐이야. 멍하니, 휠체어에 앉은 채로.”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안아.”
“자네도 내 몸속에 무엇이 들어와있는지 알고 있어. 그런데도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 뿐이야?”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자네가 살인범이 될 수는 없어.”
“자네는 나를 죽여야 해. 그 사람도 자네에게 경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보름달이 네 번 뜨기 전까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동률의 눈모양이 자신도 모르게 휘등그레졌다. 그는 결코 지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적이 없었다.
“다알아. 내안의 그들이 자네의 생각을 다 읽어서 나에게 보여주고 있어. 자네는 나를 봐야 정확히 봐야돼. 내가 아직도 인간인지 봐야 한다고.”
지안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쓸 수 있는 손은 하나 뿐이었지만 모든 매듭이 단선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다. 온 몸을 감은 붕대들이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 * *
헤령은 눈을 떴다. 꿈속에서 달이 지나갔다. 보통의 달이 아닌 토성의 영혼 주위를 스쳐가는 달, 타이탄이었다. 토성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눈을 꿈뻑거렸다. 타이탄이 토성 궤도를 네 번 비행하고, 토성의 눈이 네 번째 끔뻑거렸을 때, 그녀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토성의 눈으로 모든 우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까마득한 우주를 아무 목적 없이 떠도는 모든 행성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지식도, 빛도, 이름도 없이 굴러다니는 무한대수의 별들 중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 하나의 별이 있었다. 지구였다.
헤령에게 그것은 볼품없는 조그만 별일뿐이었다. 배구공처럼 걷어차면 아무 곳으로나 튕겨 나갈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 이 별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이 가재의 발처럼 커다란 집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충동 때문에 손을 뻗쳤고, 그 충동은 지구라는 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고통과 아픔을 듣게 했다. 지구에 속한 모든 것들이 처절하게 울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성가시고 짜증나는 비명일 뿐이었다.
그녀는 집게손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지구의 양쪽 경사가 움푹 찌그러졌다. 바람 가득 담긴 튜브를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지구는 두 조각으로 찢어져버렸다. 양쪽으로 박살난 두개골처럼,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뜻밖이었다. 포도주가 가득 담은 유리병이 깨져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어두컴컴한 우주의 벽면 한구석을 적시고 있었다.
헤령은 다시 눈을 떴다. 놀라움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기에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더없이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폐쇄병실에는 창문이 없지만 그녀는 먼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만월이 자신을 포근한 시선으로 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감금병동에는 화장실도 샤워시설도 없었다. 심지어는 창문조차 없었다. 우주 저편의 머나먼 곳에 있는 존재들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이미지를 전송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제 저녁 네 번째 보름달이 떴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필요가 없었다. 눈들이 모든 세상을 다른 차원으로 보여주면서, 그녀는 이제 인간이란 대상조차 사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의 논리적 과정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유추나 직관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말이다.
감금병동을 감찰하는 오늘의 당직관은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였다. 그는 사십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자기 관리에 무척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적당한 키에 나이답지 않은 피부의 탄력, 군살없는 몸매등은 완벽한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한 나이대의 이성에겐 충분히 어필한만 했다. 하지만 헤령에겐 그뿐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연상의 남자에게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수 있었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녀의 몸에 침입해온 이후로, 지금까지 타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단 1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관심조차 아니었다. 그저 생각이 보여질 뿐이었다.
그녀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그 남자의 정신이었다. 정신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것은 보는 것과는 다른 능력이었다. 감지기로 타인의 뇌파 신호를 읽어낼 순 있지만, 그것을 라디오의 주파수로 변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고 황량한 우주라는 사막에서 무수한 별들이 하나의 거대한 눈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당직관은 헤령을 처음 봤을 때 그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여동생이 있었다. 헤령과 비슷한 시절에 병치레가 잦았다. 아주 닮은 것은 아니었지만 선량한 눈매가 여동생과 닮았다. 얼굴에 가득한 피칠, 특히 입가 주변의 핏덩이는 끔찍한 사고의 현장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의 것으로만 보였다. 그 피가 방금 젊은 남자 의사의 목을 물어뜯어서 생겨난 것이란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목덜미가 줄기째 찢어져 그 의사가 긴급 수혈을 받고 있단 주변의 이야기도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어쨌든 지금 그녀는 감금병동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은폐되어 있다. 909호 병실, 사람들은 그녀를 909호의 괴물이라 부른다. 문주위로 하얀 커튼을 쳐서 병실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햇살 하나 들어올 창문조차 없는 완벽한 감금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지금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틀림없이 들리고 있었다. 억제대를 차고 있는 괴물이 살고 있는 방안에서 누군가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웠지만 밀려오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 지금껏 909호에 갇힌 여자가 정말 괴물인지 직접 확인해본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난 보름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감금병동에 갇힌 환자들 모두가 치유불능의 광증을 앓고 있다는 점에선 똑같은 처지였지만, 유독 그녀에게만 어떤 외출도 허락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하루에 네 번 허용되는 화장실 출입 시간과 사흘에 한번 있는 샤워조차 자신이 아닌 특별 관리인이 동행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감독관들중에서 그녀의 상태를 직접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물이란 단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럼 대체 909호에는 누가 있는거지?’
그가 커튼을 열어젖혀 문 상단의 책가방만한 유리창살 너머로 불빛을 비추며 들여다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꿈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아리따운 소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는 양 옆으로 벌어져 있었고, 왼 손은 다리 사이의 그 부분에, 오른손은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이제껏 어느 여자도 그에게 보여준 적 없었던 달콤하고 음탕한 유혹의 눈길이었다. 그 어두운 방안에서 욕정 가득한 음탕함이 관능적인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있었다. 문을 열어젖히고 있다는 사실 또한 눈치 채지 못했다.
단지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날 보러 와. 아저씨. 그동안 나를 보고 싶었잖아? 어서와.’ 그녀의 음성이 실제로 들린 것인지, 아님 그렇게 들리는 듯한 착각인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단지 그 희고 축축한 얼굴을 어루만졌고, 하와를 유혹했던 붉은 사과 같은 입술에 입을 포개었을(하지만 실제의 그 입술은 납덩이같은 칙칙한 잿빛이었을) 뿐이었다. 세상 누구와도 나눠본적 없는 격렬하고 달콤한 키스를 주고받았다. 그의 손은 팽팽하고 육각적인 몸 이곳저곳을 더듬고 있었다. 마침내 다리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갔을 때, 그 움푹한 곳의 부드러운 축축함에 모든 감각을 내맡기고 있을 때였다.
무엇인가 그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뱀의 독니처럼 날카로운 것이었다. 혀와 혀를 간지럽히고 있을 때도, 그리고 손으로 몸을 더듬는 동안에도 듬성듬성 끈적끈적하고 흐물흐물한 살갗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런 불쾌감도 없었고 오히려 흥분을 고조시키기만 했다. 이제 그의 몸을 유린하는 것은 죽음의 차디찬 손이었다. 그 거칠고 쭈글한 손이 안과 밖에서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죽음보다 더한 통증이었다. 상어의 이빨 같은 것에 물린 사람이라면 느껴보았음직한 그런 아픔, 그 차갑고 냉습한 고통의 실체를 보기 위해 시선을 내렸을 때 그가 본 것은 이미 잘려나간 자신의 손목이었다. 그는 쓰려져서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뒹굴었다. 속수무책의 공포감이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게 했다. 잘려나간 손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본 순간에는 고통조차 차츰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희뿌연 어둠 너머에서 그가 눈으로 본 것은, 그녀의 다리 사이 음부, 그곳에 자라난 눈이었다. 그 눈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악의를 내뿜고 있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이 지옥의 눈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