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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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대가 크면 실망도 또한 큰 법이다. 그래서 실망 하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고, 그것의 크기는 무한이었다. 많은 것을 기대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무엇을 원한 것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뜻이다. 미스캐토닉 대학의 천문과학부가 토성궤도에서 수신된 우주전파에서 어떤 문자적인 메시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단순히 우주 자기장의 한 종류에 불과할 뿐임을 수차례 언론에 밝혔음에도, 그리고 카이저 탐사대의 목적은 지적생명체나 외계문명의 발견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거듭 재확인 했음에도, 대중의 전반적인 열망은 대게 그런 것이었다.
밤바다의 바람이 무척 차갑고 거칠게 느껴져서, 동률의 어깨는 다소 움츠려 들었다. 마지막 가을 태풍이 곧 상륙할 것이라는 예보가 떠올랐다. 먹구름들 사이로 간혹 내비치는 만월을 볼 때마다, 동률은 침묵이 주는 무기력한 위안을 떠올렸다. 또한 피할 수 없는 공포가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음이 느껴졌다.
동률은 자기 자신에게 반문해보기도 했다. 그때 자신이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주변 세상은 소란했고, 사람들의 대화에서 카이저 탐험대가 이야기 소재로 등장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지만, 정작 자신의 일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변함없이 바빴다. 하루마다 수백 명이 입원하는 대학병원의 원장이 겪는 일상이 똑같이 반복될 뿐이었다. 수백 건의 보고서를 읽어야 했고, 수십 장의 입원 승인서에 사인을 했다. 매일 수십 명이 죽어서 병원을 나갔고, 출생신고서와 사망확인서를 행정 당국에 전송하는 보고서에 서명을 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주탐사선과 자신의 삶은 전혀 다른 세상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지구의 한계를 초월해서 다른 곳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 비록 자신의 삶에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그런 류의 상상에는 꿈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기대감은 다른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의 심정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지만 보다 나은 삶, 다른 희망. 그 꿈이 여지없이 실망으로 돌아선 이유도 지극히 단순했다. 별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2068년에, NASA에서 달 탐사 100주년 기념 계획을 발표하면서 야심차게 출발했던 보먼 18호가 제2차 달 착륙을 시도했던 그 날, 그 달은 승무원 셋의 목숨을 암석과 이끼만 가득한 얼음대지 속에 묻어버렸다. 그로부터 11년 후 러시아 제국의 야심찬 부활에 대한 대외 선전적 성격이 짙었던 마스 플레이션 유인선이 화성 궤도에 접근하기도 전에 통신이 마비되고, 연락이 단절된 때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거리 우주 탐사 계획은 줄기차게 시도됐다.
카이저 탐사선이 지구를 떠나 토성궤도의 근처까지 접근해간 18일 동안, 지구로 전송되어온 사진과 동영상들은 하나 같이 보통 사람들의 기대와 무관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무한한 어둠속에서 방랑하는 별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하고 공허한 검은 사막일 뿐이었다. 그 어두운 황무지 사이에서 드문드문 빛나는 유성체들이 전송하는 이미지의 뜻은 일반인들의 기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럼 대체 무엇이 그런 엄청난 열광을 이끌어냈을까? 독립 이후 100년의 역사동안 경제성장 외엔 이렇다한 대외적 과시거리가 없어 왔다는 국민적 열등감이 근원이었을까? 우리의 기술력으로 최초의 우주탐사선을 출발시킨 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그것도 단 한 번도 인류의 발길이 닿은적 없는 미지의 별, 토성을 향한 탐험대를 조직한 것에 대한 자부심?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달을 이제 더는 쳐다보기가 싫어졌다. 그것은 만월의 간사한 속임수일 뿐이었다. 사악한 달은 죽음의 정상위에서 무엄하게 군림하고 있을 뿐이었다. 먹구름이 저것의 간사한 얼굴을 가려주면 좋을 것만 같았다. 헤령의 발작은 항상 만월이 떠오르는 주기로 강도가 극심해졌다. 만월이 뜨는 날에 가까워질수록 고통의 세기 또한 강해졌고, 만월이 지나면 가라앉기를 반복 해왔던 것이다. 달이 완전한 원형에 진입했다가, 조금씩 벋어나는 그 삼일이 지나면 모든 발작은 물러나고, 믿을 수 없는 평온이 찾아오곤 했다. 이제 동률은 만월이 물러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이 논리와 과학적 사고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를 소망해보는 경험은 거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밤의 달은 해변 위에 장엄하게 솟아있었다. 어느 누구의 대적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 * *
“강헤령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선 안 돼.” 새벽빛이 지안의 얼굴을 비췄다. 초췌하고 창백한 납빛이 구름에 가라앉은 어두운 햇살에 떠올랐다. 생기 없는 그의 눈빛이 동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격리병동에 갇혔어.” 동률이 답했다. 그는 세 번째 맥주 병을 두 모금째 비우고 있었다. 안주로 삼을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속이 쓰려왔다.
“평생 거기서 나오지 못할 거야.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진 모르겠지만, 16살만에 모든 인생이 거기서 끝나버린 거야”
“그것으론 부족해. 그 아이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 아이는 이제 리예의 딸이야. 고대의 종족의 일원이야.”
리예. 고대의 종족.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더 원(Elder One)’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미국 학자들은 이미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서 나름의 연구를 진행해왔고, 일정한 명칭을 붙여두고 있었다. 그것이 천문과학 팀이나 고생물학 연구자들이 아닌 고전문학 문헌학 연구자들에게서 진행되고 있었단 사실이 너무나 뜻밖이긴 했지만 말이다. 동률은 석 달 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질문이 떠올랐다. 미스캐토닉 대학의 고전문학 석좌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그의 계정에 글을 남겼었다. 그는 헤령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미스캐토닉 대학은 오래전부터 카이저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탐사대의 주축이었던 천문과학부가 아닌 고전문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제가 이런 관심을 표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시기도 하실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저희 고전문학부는 천문과학부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엘더 원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지면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긴 힘들겠습니다. 또한 말해준다 해도 전혀 믿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카이저 16호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호성씨가 일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해버렸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유일한 생존자인 그의 둘째 딸인 강헤령이 당신의 병원에 입원했단 것이 사실입니까? 응급실로 구조되어 올때부터 자신의 몸에 심각한 자상을 입혔단 풍문이 사실인지요?’
“고전문학부는 카이저 탐사계획이 기획될 때부터 천문과학부에 간섭을 했었다더군.” 동률이 말했다.
“자네는 헤령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겠지. 그들은 토성탐사 계획에 대해서 초기부터 격렬히 반대해왔다는 사실말이야.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짓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미치광이 취급은 그들이 받아야 했지. 21세기에 고대 금서를 들먹이며, 첨단과학의 영역에 제동을 걸려했다는 시도 자체가 멍청하게만 보였을 거야.”
카시니 1호의 엔진이 꺼져 버린 것은 2017년, 3년 후에 2호의 엔진이 꺼져버렸다. 그 후부터 60여 년간 인류의 눈길이 토성을 향한 적은 없었다. 토성은 인류에게는 풀 수 없는 미지의 별로, 그리고 인류와는 무관한 별개의 운명을 지닌 별처럼만 여겨졌다. 적어도 위성 타이탄에서 송출된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불가해한 메시지를 지구인들이 수신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우주자기장이 아니었어.” 지안이 말했다. “어떻게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 우주자기장이란 우주를 아주 목적 없이 떠도는 전파들이 간혹 지구 곳곳에 설치된 우주 안테나에 불규칙하게 수집되는 것을 뜻해. 하지만 그때 수신된 전파는 달랐어. 우주 전파가 어떤 궤도에서 정확하게 지구를 향해 송출되는 경우는 그 이전에는 절대 없었어. 마치 궁수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듯이, 그것은 타이탄에서 지구를 향해 송출되었던 거야.”
하지만 그들은 언론에 그런 사실을 공표하기를 거부했다. 과학자들의 세계는 항상 가설로만 둘러싸여 있으니까. 의심은 그들의 기반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문학부는 이미 그 때부터 무엇인가를 짐작하고 있었다. 특히나 호지슨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불안한 꿈에 시달렸다고 한다. 문헌학부 교수로 살아오면서 그토록 불안한 꿈을 꾼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직후부터 그 꿈이 대학의 희귀장서 보관실에 봉인된 어떤 고대의 금서와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동률이 지안에게 물었다.
“네크로노미콘이란 책에 대해서 들어보았나?”
동률은 지안의 초췌한 눈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도 못지않게 흐릿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속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지안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 * *
그것은 삼차원의 영상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조차, 그 책을 읽는 다른 이의 눈이 있었다. 헤령은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을 때의 첫 충격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소름끼치도록 오싹했다. 날짜를 세진 않았다. 아빠가 조난된 우주탐사선에서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난후, 하지를 막 지난 첫 번째 보름 때부터 였을 거라 짐작될 뿐이었다. 그 이상한 눈의 시선은 만월의 주기와 관계가 깊었다. 마치 달의 눈을 통해 세상 전부를 내려다보고 싶은 듯이, 만월이 떠오르면 자신의 검은 눈을 치켜뜨는 것이었다. 가려움은 항상 잠복해 있었다. 미칠 듯이 가려웠다. 피부속에서 알 수 없는 괴생명체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감각이 자기를 점점 장악해오고 있는데,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더 큰 괴로움이었다.
아빠는 자기방속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우주 탐사 이전에는 일 때문에 보기 힘들었던 얼굴을, 이제는 자기 내면에 파묻혀서 더는 볼 수 없었다. 밤이 깊어져도 방의 불을 키려고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거울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거울만 쳐다보면 헛것을 보는 전형적인 정신병자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아빠가 느꼈던 고통을 모두 이해하게 됐다. 눈을 감을 때마다 지옥이 보였다. 아빠가 직접 보았던 그 지옥을 이제는 자신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빠가 토성의 이심 궤도로 진입할 때부터 겪었던 일을 모두 보았다. 이계의 생명체들끼리 공유하는 기억의 전이였다.
아빠는 타이탄의 북반구에서 회오리치는 폭풍의 눈을 향해 초소형 우주 안테나를 쐈다. 더 정확히, 그가 기획하고 설계한 마이크로 우주 전파를 폭풍의 눈 너머에 있는 세계를 향해 발신했던 것이다. 코데사에 잡히는 수신 전파는 없었다. 토성 저편에서 아무런 응답도 오지 않았다. 카이저 호는 타이탄 궤도를 이틀 더 비행한 후, 코데사 프로젝트를 잠정적인 실패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폭풍의 눈을 가장 가까이서 본 탐사대원들은 그 영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탐사대원 모두가 공감했다. 코리는 그 풍광이 마치 심연의 한복판에서 휘몰아치는 그랜드캐니언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마이크는 폭풍의 중심부에 떠 있는 검은 눈이 지옥을 향해 입을 벌린 심연의 입 구멍 같이 보인다고 했다. 누구보다 강호성 자신의 실망이 컸다. 그가 코데사 프로젝트의 총책이었으니. 그는 코데사의 분광기에 스캐닝된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식물이나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광물로 짐작되는 흔적은 드문드문 나타났다. 하지만 표면의 풍속이 965킬로미터로 짐작되는 그 어마어마한 풍동을 향해서 내려갈 순 없었다. 어느 정도는 충분히 예상한 결과였다. 외계문명과의 교신이란 하나의 가설일 뿐이었다. 카이저는 우주탐사 역사상 가장 머나먼 별을 향해간 최초의 유인선이라는 성과를 달성했다. 행성 궤도를 휘감는 맹렬한 풍속에 휩쓸리지 않는 탄탄한 선체를 완성해낸 것 또한 성과였다. 그러나 실망감과 패배감을 넘어서는 두려움의 감정이 그들을 옥죄어 왔다. 그들 모두가 보아선 안 될 것을 보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검고 사악한 눈, 불의 고리와 같던 소용돌이, 그 주변에서 들려오던 것처럼 느껴지는 요란한 북소리는 착각이라 믿으려고 애써도 현시처럼 생생했다. 모든 승무원들이 잠들 때마다 그런 것을 꿈에서 보았다. 호성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들이 미스캐토닉 대학의 연구팀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과 고전문학부 간에 토성탐사 계획을 두고 미묘한 알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고전문학부의 경고는 아무 힘도 없었지만, 그들은 줄기차게 요구했다. 타이탄의 중심부위를 항해중이더라도, 그것을 눈으로 보려 하지 말 것, 코데사를 발신할 계획을 가능한 재고할 것, 설령 어떠한 메시지를 응답받더라도 즉각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말 것. 그들은 그런 것을 요구했다. 천문과학부의 입장에선 재고해볼 가치도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타이탄에서 온 우주 전파를 수십 차례나 스캐닝해서 잡아낸 음성 주파를 예측하고 있었단 사실은 다시 생각해봐도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 소리를 알고 있었을까?
‘크툴루 파탄.’
고전문학부는 이 문장의 뜻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단지 그것이 결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될 주술적 문장이라고만 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극소수의 언어학자와 문화학자들만이 그 뜻을 알고 있으며, 절대로 암송하거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고 했다. 천문과학팀은 그 경고를 미신적인 헛소리로 일축했다. 대학 전체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이제 모두가 그 주문을 듣고 있다. ‘이아, 이아, 크툴루 파탄.’ 조용하고 느린 음성으로 들려왔다. 마치 머나먼 저편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부름처럼. 헤령에게도 그들의 부름이 들렸다. 헤령은 그들이 보여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카이저호의 탐사대원들은 기술 결함으로 조난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서로를 죽였다. 지구에 착륙하기 훨씬 이전부터 카이저호에 살아남은 사람은 헤령의 아빠 한사람 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의 눈으로 동료들을 보았다. 증오의 눈으로 이전까지 친구였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 자신의 감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들의 인간적 감정은 이미 우주선과 함께 실종되고 없었다.
* * *
두려움은 그저 만화책을 보는 평범한 밤에 찾아왔다. 아빠가 집에 돌아온 후 첫 번째 찾아온 보름밤이었다. 뻔한 만화책이었고, 수십 번도 봤던 내용이었다.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소녀, 연쇄살인마, 울창하고 고적한 숲속에 숨은 피에 굶주린 흡혈귀들. 만화책은 헤령에게 남다른 힘을 갖고 있었다. 현실 밖으로 나오면 만화속의 캐릭터들은 생명력이 없었다. 만화 밖에 있는 세상 속의 진짜 악마들에 비하면 나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캐릭터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의 힘에 불과할 뿐이었다. 늑대소녀는 만화 밖으로 나오면 옆집 할머니가 키우는 푸들 강아지만 봐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들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늑대소녀, 무한하고 공허한 어둠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악하고 교만한 시선, 헤령은 그 움츠러든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던 만화 장면속에는 늑대들에게 겁탈당하는 소녀가 있었다. 보름 동안 소녀는 자신의 내면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야수적인 본성과 맞서 싸워야 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점점 그녀는 그것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의 본연적 감정임을 이해하게 된다. 마침내 보름달이 뜨는 밤에 소녀는 변한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소녀는 악의 화신으로 부활하는 자신을 기쁨에 충만한 감정으로 맞이한다. 소녀는 양치기의 지팡이를 지고 한 무리의 사냥개들을 이끌고, 달이 떠오르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 개들은 지옥에서 데려온 늑대들이다. 소녀의 손에는 손가락 마디마다 해골 얼굴이 장식된 반지가 박혀 있다. 그것들 전부 갓난아기의 뼈로 만들어진 것이다.
헤령은 소녀의 순수하게 사악한, 감정 없는 눈이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눈으로 만화속의 소녀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상황을 이해하게 된 순간 표현할 수 없는 소름이 끼쳐왔다. 헤령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펼쳐보았다. 오른손이었다. 손가락을 굽히는 마디마디에 붉은 종양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만화속의 늑대소녀가 멋진 보석장식으로 수놓은 그 마디 부위마다 자기에겐 흉측하고 소름끼치는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창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창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백한 만월뿐이었다. 생기를 잃은 싸늘한 인상만을 전해오는 차가운 빛이었다. 그 침묵하는 시선에서 그녀는 자신을 음탕하게 바라보는 사악한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헤령은 천천히, 유심히 자신의 손을 다시 한편 살폈다. 가려움이 차츰 밀려왔다. 낯설고 더러운 생명체가 자신의 손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손가락 끝부분부터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빨간색 동그라미가 지문이 있는 그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모든 손가락의 마디 부위마다 불긋케 물들어 오르고 있었다. 구역지기가 올라올 것만 같이 징그러운 느낌이엇다. 검지를 입에 갖다 대 그것을 깨물었다. 순간, 어떤 것이 목구멍이 타고 넘어 들어왔다. 목구멍이 막히고 가시가 박힌 듯이 뱃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반강제적인 의지로 토악질을 해댔지만, 그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헤령은 미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몸서리쳤다. 이제 더는 그녀가 자기의 육체의 주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썩기 시작하는 생선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숨도 잠들지 못한 첫 번째 만월의 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아빠가 왜 자기 방밖으로 나가길 그토록 거부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그녀의 아빠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빠가 두려움에 떨면서 의학사전을 뒤적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마치 눈앞에서 곧바로 보이는 것처럼 생생한 장면이었다. 아빠는 의학사전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책에 적힌 내용이란 아무 병이나 다 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그런 종류의 병들 뿐이었다. 헤령은 새벽녘에 이르러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들었다.
깨어나자마자 손에 붕대를 둘둘 감았다. 구급상자에 들어있는 소량의 붕대는 별 쓸모가 없었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 부위마다 시커먼 눈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이 세상을 내다보는 그 시선이 소름끼치도록 전해졌다. 그들은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화속의 악마들이 빛을 증오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감정이었다. 그들은 감정은 모순적이었다. 그들은 아직 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엔 유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그들에게 낯선 세상을 노려보고자 했다. 헤령은 그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통해 새 생명을 얻고자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몸에 탄 탑승객이었고, 그녀의 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길 원하고 있었다.
방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밥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말도 무시했다. 오늘밤에도 만월이 뜰거란 사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으로 해가 지고 어둠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손에 생겨난 모든 눈들이 아빠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빠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빠의 몸속에 들어있는 그들이 그 영상을 그녀에게 전송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커다란 식칼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왼손이었다. 칼끝이 오른손의 손바닥에 자라난 검은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눈들이 혐오의 눈길로 아빠를 노려보고 있었다.
팔목이 잘려나가는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두가 함께 느끼는 아픔이었다. 모든 눈들에게서 일그러진 혐오의 감정을 볼 수 있었다.
헤령은 단숨에 아빠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이 잠겨있었지만, 그녀의 오른손은 세 번 만에 문잡이를 부셔버리게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는지, 그녀 자신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보름 만에 다시 본 아빠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의 형체가 아니었다.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빠가 다시 식칼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다른 눈을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헤령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왜 손을 뻗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절망에 일그러진 아빠의 몰골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위치에서, 아빠를 보여주는 눈이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생겨난 검은 눈이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빠의 일그러진 내면을 비추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 황급히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였다. ‘이쪽으로 다가오지마. 엄마. 여기에 오면 안돼.’ 헤령은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자기만이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아빠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눈들이 모든 생각을 시각적으로 변환시켜 보여주고 있었다. 손을 뻗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능이 그녀의 생각을 거부하였다.
손바닥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엄마의 얼굴을 그 검은 눈이 보여줬다. 그 눈이 보여준 다음 장면은 아빠의 방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촉수였다. 아득한 심해에서 서식하는 것 같은 흉측한 문어의 다리 같은 것이 엄마의 발목을 낚아챘다. 헤령은 엄마가 아빠의 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 엄마를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소름도, 혐오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같은 감정조차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모두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방안에서 꿈틀거리는 촉수들이 희미한 빛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무언극을 하는 그림자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엄마의 블라우스를 찢는 것을 보았다. 좌절과 공포의 깊은 늪에 빠져 질러대는 엄마의 비명과는 다른 비명들이 방안 곳곳에서 들려왔다.
헤령은 이층의 언니방으로 달려갔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삼학년인 언니에게 헤령은 언제 철이 들지 모르는 아이였다. 언니가 그녀에게 하는 모든 행동과 말투에는 빈정거림이 섞여있었다. 더욱 싫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언니가 빈정대는 지적을 할 때 마다 맞서 싸울 논리가 떠오르지 않은 자신이 싫었다. 싸울 용기조차 없는 자기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언니를 향해 그 손을 뻗은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침대 아래 숨어 있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서 끄집어 낸 행동은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언니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 그때의 감정은 누구의 것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열여섯 해동안 같이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기억과 감정의 공유는, 그 순간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여자가 징그러운 해충처럼 보일 뿐이었다.
언니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을 때, 검은 눈은 만월의 시선을 보여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달이 지금 오직 이 집안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그들과 그녀를 모두 기괴하게 만족시키고 있었다. 방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널부러져 있는 어여쁜 여자의 나체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묘한 흥분감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섯 살 난 남동생은 벽장 속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다. 그 아이도 더는 남동생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이 아이가 징징 거리지 않았던 때가 떠오르지 않았다. 때를 쓰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얻어냈다. 무엇이든 용서받았다. 어리다는 특권 하나만 믿고 기어오르고 닦달하는 이 아이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도 해충일 뿐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검은 눈을 뻗었다.
시간은 그저 덧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헤령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아빠도 줄곧 이런 행동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들을 앞에 두고 몇 시간씩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숟가락, 담배, 술병. 그런 것들을 앞에 두고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 그들이 아빠의 몸에 탑승했을 때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는 행동이었다. 그들에게 낯선 세상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길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범하고 익숙한 세상을 그들의 장소로 바꾸고 싶어 했다. 낯설고 기괴한 영상이 가득한 섬뜩한 흉가 같은 곳으로 말이다. 그들의 뒤틀린 욕망은 마침내 성취감을 이뤄냈다.
갑자기 모든 눈들이 다시 아빠에게로 쏟아졌다. 아빠의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다시 아빠를 보았을 때, 아빠는 넝마처럼 찢겨진 엄마의 시체를 앞에 두고 절규하고 있었다. 아빠의 손이 다시 식칼을 쥐었다. 그가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그 행동을 막고 싶은 욕구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느껴졌다. 하지만 그 때의 감정은 그들의 욕망과는 달랐다. 모든 눈들이 아빠를 향해 보내는 증오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이 일었다. 그 순간에서야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순간에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냉소와 증오의 눈으로 아빠를 노려보는 그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