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방공호에서 나오자 밤이었다. 뒤를 보니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다. 마치 지옥으로 가는 입구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그곳에는 더 이상 산 자가 없다. 그렇기에 거기 머무를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곳은 집이 아니었다. 진짜 집은 아직 저 너머에 있을 것이다. 벌써 몇 년 동안 집에 가 보지 못했다. 연희는 건강할까? 고양이는 건강할까?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간다.


 요즘들어 항상 유성우가 내린다. 조명 없는 심야, 방독면의 뿌연 플라스틱 창 너머로도 아주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잠시 거기에 정신이 빼앗겨 있던 차, 불현듯 들려오는 가이거 계수기의 노이즈에 발걸음을 서두른다. 가슴에 달린 기억자 렌턴은 회색 일색인 지면을 비추었고, 보호의의 내부는 땀으로 젖어 있다. 9월에 걸맞는 열대야다. 달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회색 지면에 발자국을 남기며 앞으로 앞으로 간다. 문득 역겨운 냄새가 난다.


 "뭐야, 저게."


 검푸르고 너무나도 거대한 살덩이가 반파된 편의점의 지붕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혹등고래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왜 고래가 여기에 있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동안 그 기이한 광경에 매혹되었지만, 어쨌든 계속 나아가기로 한다. 군 시설을 제외한 발전소가 대부분 정지했으므로, 거리에 인공광은 없다. 렌턴 빛과 달빛에 의지하여 어둠 속을 헤맨다. 달은 이전만큼 밝지 않다. 검게 보이는 월면 기지가 햇빛을 흡수한다. 대신 다른 달들이 있다. 한때 강대국의 무력을 상징했던 수백 km 단위의 궤도 병기들이 지금은 햇빛을 반사하여 새로운 달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은 파괴당하여, 이제는 밤 하늘을 수놓는 유성우를 내리는 구름 역할을 하고 있다. 파괴는 아름다움을 내포한다. 멀리 지평선에서 피어나는 버섯구름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단언컨데 일생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다.


 


 02


 적막을 깨는 기계음이 들리자, 나는 일단 몸을 숨겼다.


 무인 전차였다. 육족 보행형, 주포에 130mm구경 고폭탄, 열화우라늄 발칸포, 항속 거리 890km, 급속사 12초에 6발. 군대에서 익혔던 제원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정비대에 속해 있어서 여러 병기들을 이리저리 만져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저 기종은 위험하다. 일단 국군에 소속되었겠지만, 섣불리 감지당했다가는 포격당할지도 몰랐다. 무인 병기의 패턴 인식력은 그다지 신뢰할 수 없을 뿐더러 해킹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지역에서 병사들이 완전히 철수한지 3년, 아직까지 기동하는 것을 보면 주기적으로 무인 기지로 돌아가 보급을 받는 모양이다.


 "그래. 가라. 가."


 보행음이 멀어지자 나는 안도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옛 집을 찾는다. 온통 부서지고 박살난 거리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길을 찾는 것이 어렵다. 


 03


 아차. 그만 스마트폰을 떨어트렸다. 주워서 보니, 액정에 금이 가 있다. 어쩌지? 이제는 A/S를 받을 곳도-


 쾅!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등에 날카로운 바늘이 수십 개 박히는 것 같은 따끔함이 느껴졌다. 나는 곧 지면에 굴러 콘크리트 벽에 처박혔다. 발칸포가 정면으로 나를 향했다. 곧 있을 고통에 대비하여 이를 악문다.


 몇 초 간의 정적, 발칸포는 의외로 금방 회전을 시작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무인 전차는 곧 동체를 돌린다. 깡통은 깡통이었다. 적에 대한 처사 치고는 너무 관대하지 않은가. 몇년 전 tv의 청문회가 떠오른다. 투입된 세금 치고는 인공 지능의 감별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이야기였을 거다. 헛웃음이 났다.


 "방산비리가 날 살렸구만. 쿨럭쿨럭!"


 멀어지는 전차를 보며 심한 기침을 했다. 계속되는 기침 속에서 머지않아 방독면을 젖히고 검붉은 액체를 토했는데, 거기에는 작고 날카로운 금속 알갱이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와중 문득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덜덜 떨린다.


 "뭐야, 제대로잖아."


 무인 전차의 유압 모터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주위는 그야말로 정적만 가득했다. 방독면을 아예 벗어서 멀리 던져버렸다. 그제서야 밤하늘이 잘 보였다. 계속 피가 역류해서, 보호복 상의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콘크리트 벽에 비스듬히 기대 앉은 나는 멍하니 유성들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세고 또 셌지만 유성우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가고 싶었는데."


 언제까지 셀 수 있을지는 몰랐다.


 "가고 싶었어."


 단지 숫자 세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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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주인공의 목표와 방해하는 장애물은 있지만 재미가 없군요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