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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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맥스> 시리즈는 인류의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핵전쟁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텍스트 가운데 <매드 맥스>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는 스타일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지 밀러는 <매드 맥스>를 통해 완벽하게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물론 그조차도 돈 존스의 <소년과 개>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이를 테면, 제록스와 스티븐 잡스의 관계랄까.) 조지 밀러가 시도한 것은 서부극의 무대를 핵전쟁 이후의 사막화된 지구로 바꾸어 피 한 바가지를 쏟아부는 것뿐이었으나, 그가 성취한 것은 그보다 훨씬 놀랍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스타일은 당대의 수많은 창작가들에게 도무지 베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을 이끌어냈다. <매드 맥스>가 없었다면, 맥스 로카탄스키가 없었다면, 우리는 <북두의 권>의 켄시로도, <폴아웃>도, <보더 랜드>도, <더 로드>도, 하다못해 <워터 월드>마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위 평론은 잡지 <씨네 21>에서 발췌했습니다. 허지웅 평론가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비평입니다. 전반적으로 동의할만한 글이지만, 몇 가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보이죠. 우선 '핵전쟁 디스토피아 가운데 <매드 맥스>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운 텍스트가 없다'는 문장입니다. 아마 저 평론가는 조지 밀러의 영화가 핵전쟁 창작물의 큰 형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종말 작품이 전부 저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죠. 암울한 근미래를 가정한 1편은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황무지 아포칼립스를 보여준 건 2편입니다. 그런데 2편의 개봉연도는 1981년 12월입니다. 사실상 1982년에 개봉한 셈이죠. 문제는 그 이전에도 핵전쟁을 소재로 삼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숱하게 나왔다는 겁니다. 핵탄두 개발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이 이걸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 분야의 진짜 원조로 대접하는 스티븐 베네의 <바빌론 물가에서>는 심지어 2차 대전 이전인 1938년에 나왔죠.
평론에서 언급한 <소년과 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 평론가는 돈 존스 영화를 거론했는데, 사실 영화 이전에 벌써 할란 엘리슨이 1969년에 소설을 출판했죠. 영화 평론가니까 원작 소설을 놔두고 영화 이야기만 꺼내는 거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로드>가 <매드 맥스>의 후예인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코맥 매카시가 저 영화를 봤는지, 얼만큼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어요. 게다가 소설이 영화의 후계자라는 표현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기실 <매드 맥스>가 없었더라도 <더 로드>는 얼마든지 나왔을 겁니다. 왜냐하면 멸망한 세상에서 생존자가 방황하는 이야기는 벌써 메리 셀리가 <최후의 인간>에서 써먹었으니까요. 비록 이 작품은 핵전쟁이 아니라 질병 아포칼립스지만, 인류 멸망과 소수 생존자와 기나긴 여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모든 아포칼립스 작품의 대선배입니다. 그리고 메리 셀리가 이 작품을 쓴 이후로 비슷한 책은 수도 없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니 코맥 매카시가 조지 밀러의 영향권에 있다는 말은 잘못 짚은 셈입니다.
사실 핵전쟁과 폭주족 같은 소재도 로저 젤라즈니가 <지옥의 질주>에서 먼저 사용했지만, 그 점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사막화 아포칼립스도 제임스 발라드가 <불타버린 세계>에서 묘사했지만, 그것도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차피 소설과 영화는 방법론이 다르니까요. 아울러 저 평론에서는 아포칼립스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고, 디스토피아라고 불렀네요. 문명 붕괴는 아포칼립스에 가까운데 말입니다. 물론 <매드 맥스>가 수많은 대중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핵전쟁 아포칼립스의 원조는 아니며, 이것과 전혀 관계 없는 작품들도 수두룩합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렇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좋아하는 독자 중에도 <매드 맥스>에 시큰둥한 사람이 많을 겁니다. 허지웅 평론가가 실수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그만큼 SF 소설에 무관심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종말을 주제로 여러 장편 소설과 단편집까지 나왔는데, 그걸 안 봤다는 뜻이니까요. <씨네 21>에 기고할 정도의 평론가가 저렇게 책을 안 읽었다는 사실이 좀 아쉽습니다. 설마 책을 읽고서 저런 평론을 썼다면 그것도 문제고요.
※ 저 평론에서는 케빈 코스트너도 <매드 맥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코스트너가 <매드 맥스>와 상관없이 황량한 세계 자체에 관심이 많다고 봅니다. <워터 월드>에서 그렇게 욕을 먹었는데, 그 다음에 <포스트맨>을 또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포스트맨>은 데이빗 브린이 <매드 맥스> 이전에 일찌감치 쓴 소설이죠.
2015.06.23 03:56:03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라고 스타크래프트를 베낀 영화가 있는데."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대중 문화에 익숙하고 특정한 작품에 심취한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것의 원류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핵전쟁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이 매드맥스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건 조금 너무 심한 과장이죠.
북두의 권이나 폴 아웃이 분명히 매드 맥스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폴아웃만 해도 매드맥스 이전의 무수한 핵전쟁 디스토피아물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나 핵쉘터 같은 시스템들은 매드맥스와는 천보 이상 거리가 있는 개념인데 말입니다.
북두의 권조차 매드 맥스가 영향을 준 것은 복장이나 분위기 정도만이 아닐까도 생각되고 말이지요.
허지웅씨가 저렇게 평론한것은, 아무래도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인 시각적 효과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그냥 오타쿠의 한계(...)라 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