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요.

 RPG 팬이라고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이오웨어 RPG는 네버윈터 나이츠 이후 물건은 제이드 엠파이어 빼고 빠짐없이 다 해본 입장에서, 정작 그 전설의 시작이었으며 누구나 명작으로 꼽던 발더스 게이트는 초반만 조금 하다 말았다는 건 왠지 모르게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도 도입부 좀 하다 말았고 폴아웃 2도 도입부 좀 하다 말았고,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의 미국 2D 아이소메트릭 RPG 명작들은 이상하게 손이 안 가더라고요. 한참 뒤에 관심이 생겼을 때는 하기엔 너무 늦었다 싶고, 수십 시간은 기본적으로 잡아먹는 분량 역시 이제는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그냥 신경 안 쓰고 있었죠.

 헌데 얼마 전에 빔독이라는 조그만 회사에서 발더스 게이트 1과 2를 좀 개량해서 인핸스드 에디션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습니다. 정작 발매되었을 때는 그 개량이란 게 추가적으로 돈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지만, 어쨌건 좋은 기회다 싶어 그걸 사서 몇 달 동안 한 200시간 넘게 플레이한 끝에 1편부터 바알의 왕좌까지 완전히 끝장을 봤군요.

 감상은...글쎄요. 재밌지만 낡았다, 아니면 낡았지만 재밌었다 정도겠네요.

 그래픽적으로 낡았다거나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낡기는 낡았다는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모바일 게임이 넘쳐나는 시대에 어차피 몇 시간 하다 보면 신경 쓰이지 않게 되죠.

BG2_2.jpg -이게 그래픽적으로 못났다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물론 등장인물 얼굴은...음...취향이므로 존중해줍시다.

 오히려 신경 쓰게 되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그리고 게임 분위기적으로 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친절한 요즘 게임들과 달리 이 적을 어떻게 때려잡아야 하는가,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하는가를 표시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요.

 사실 도입부 지나고도 꽤 오래도록 이해 안 가는 것들이 많기도 많습니다. 캐릭터의 방어력 수치는 낮을수록 좋은데 그리고 갑옷에 표시되는 방어력 보너스는 숫자가 높을수록 좋다던가. 저 파란 공 뒤집어쓴 마법사는 왜 아무리 패도 데미지가 안 들어가는가의 문제라던가. 좀 더 익숙해지고 나면 스턴은 뭘로 풀어야 하고 메이즈는 뭘로 풀어야 하며 디스펠 매직과 브리치와 리무브 매직의 차이가 뭔가에 대해 또 한참을 고민하게 되죠. 매뉴얼 보면 PDF로 220페이지짜리 받으라고 되어 있고.

 이런 거야 게임이 나온 지 15년도 지난 지금은 구글에서 몇 번 검색하면 2001년경에 누군가가 인터넷 게시판에 쓴 질문 글이 나와서 간단히 해결이 가능한 문제지만, 그래도 파티 전멸에 전멸에 전멸에 또 전멸을 겪고 난 다음에는 꽤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그게 꼭 나쁘다기보다는, 그냥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판타지라면 이 정도 테마곡은 응당 깔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표절 논란은 아쉬운 일이지만.

 RPG적인 면을 보자면 멋진 반전에 심리적 갈등에 꽤 깊은 이야기고, 에픽 판타지급의 규모고 차원을 넘나들고 근사한 음악이 깔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고 충분히 멋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애초에 화려한 컷씬 같은 걸 물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대사가 적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후 바이오웨어가 오바스러울 정도로 동료들에게 개성을 주고 대화 이벤트들을 왕창 터뜨려댔던 것들에 비견하자면 약간 심심하다는 느낌이더군요. 2편에서는 훨씬 나아졌지만.

 사실 그런 면에서도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고 해야겠군요. 뭔가 이야기 중심으로 심도깊게 풀어나가는 물건일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생각보다 이야기의 밀도는 높지 않고 어떻게 적 때려잡아야 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리고 D&D의 마법사는 정말로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그 외에도 가뜩이나 좁은 길목이 많은데 헤매기 바쁜 길찾기 인공지능. 마법사보고 딱 타이밍 좋게 모여 있는 적 중앙에 운석 하나 떨어뜨리라고 명령 준 뒤에 앞열의 전사에 신경 쓰고 있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 명령을 씹고는 쿼터스태프 꺼내든 다음 근접전을 하려고 드는 전투 인공지능. 바닥에 아이템 떨어진 것 좀 주워서 팔려는데 뭐 그리 귀찮은 게 많은가 등등.

 이 인핸스드 에디션이란 것도 그런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나온 거지만, 결과물은 좀 미묘하다 싶습니다. 원작을 안 해본 입장에서 얼마나 개량되고 개선되었는지는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자잘한 버그들을 종종 마주치게 되고, 이것저것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동료가 몇 명 추가되고 블랙 핏이라는 미니 게임도 추가되어 나왔는데, 썩 나쁘지는 않지만 굳이 따지고 들면 원작만큼 잘 만들지는 못했고 새로 추가된 부분도 버그가 많습니다. 빔독이 언젠가 발더스 게이트 3을 내놓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잡고 있는 거야 좋지만, 능력이 의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BG2_1.jpg -투기장에서 적들과 싸우는 미니게임인 블랙 핏의 한 장면. 그나마 빔독 이 친구들은 유머 감각은 그럭저럭 있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불행히도 인생 최고의 게임으로 꼽기에는 너무 늦게 접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영화도 소설도 아닌, 매해마다 신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는 게임이란 동네는 결국 갓 나왔을 때 접할 수 있는가가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물론 그토록 나온지 오래된 물건이라도 하는 동안은 재밌었기는 합니다. 정말 재밌었냐고요? 네, 정말로 재밌었어요. 어쨌건 기본 그 자체는 남아 있고 그리 세월이 지나고도 들인 돈도 시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여전히 훌륭하다는 걸 느끼기 충분하니까요. 다만 그래도 좀 낡은 것 같고, 좀 더 나을 수도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아쉬움이 좀 남을 뿐이죠. 분명히 그 시절 모 게임 잡지에서 발더스 게이트 CD를 준 걸 갖고 있었던 건 확실한데, 어디서 잃어버렸던 걸까 다시 생각해보게 될 만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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