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휴에 좀 달려본 소감입니다. 당연히 제대로 안 읽히는 비논리적인 글이니 간단히 요약해드리자면, 음,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디아 2의 열풍에서 굉장히 많이 벗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3이 나온다고 해서 딱히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1에 관해서는 지금도 마을 사람들 대사 하나하나를 되새길 수 있을 정도고 사람 치 떨리게 만들던 던전 음악(링크)이 생생하지만요. 그래도 2도 PC방에서 친구들과 맛은 봤었고, 뭐 이후로 던전 시즈 2도 해봤고 세이크리드 2도 해봤고 토치라이트도 해봤으니 이쪽 장르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곤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튼 긴 기다림 끝에 발매된 이번 3편은, 한국에서만 수십만 장이 팔리는 그 기대에 못잖게 한정판 판매 논란, 그리고 밸런스, 난이도, 경매장, 버그, 핑, 접속, 기타 등등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만큼 꽤 논리정연하게 왜 3편이 문제가 있고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 것인가를 주장하는 글들도 많이 있었고, 문제가 없다고 그런 글을 역비판하는 내용도 있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고 지금도 많죠.

그런 것들이야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다 알아서 보실 테니, 디아블로 2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 관점에서 3편만 놓고 평가하는 개인적 감상을 말해보죠. 일반 난이도로 21시간 정도 걸려서 맵 다 밝히고 상자 하나하나 다 열어보고 책 다 읽어보고 통 하나까지 다 때려부수고 NPC 대사까지 다 찾아 듣고 엔딩 본 다음에 악몽 난이도 조금 하다가 꺼버린 후 드는 느낌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글쎄요, 밍밍함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일단 스토리가 밍밍합니다. 제목에 디아블로가 달린 덕에 디아블로 시리즈는 시리즈마다 최종보스로 디아블로를 어떻게 부활시켜 때려잡아야 하는 운명이긴 합니다. 그 와중에서 이런저런 소리 해봤자 어차피 결론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거 다들 알죠. 블리자드에서는 이걸 좀 꼬아서 복잡하게 구성해보려던 모양이지만 사실 재밌게 만들 능력이 없다면 그냥 애초에 최대한 생략하고 단순한 스토리로 가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몬스터는 설정이 이렇고 역사적으론 이 동네 이렇고 설명은 많지만 기억에 남는 건 없고, 마을과 사막과 설원을 오가는 스테이지 구성 역시 진부하고, 이야기 전개를 생각해보면 왜 사건이 그렇게 일어나는지 별로 납득도 가지 않으며, 무엇보다 악마들이 너는 내게 상대가 안 된다! 넌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를 한결같이 중간보스고 최종보스고 녹음기처럼 반복해대는 거 듣고 있자면 차라리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싶어집니다. 결과적으로 NPC들이 농담 따먹기 하는 거 오며가며 듣는 게 메인 스토리보다 더 기억에 남으며, 사실, 그런 쪽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게 아이러니한 느낌이죠. 스타크래프트 2 때도 기억에 남는 건 메인보다는 사이드 스토리였는데.

연출 역시 밍밍합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게임 플레이 와중에는 별 연출이랄 게 없고 액트 사이사이마다 돈 왕창 퍼부은 (당연히 멋지기는 한) 동영상이 들어가는 매우 고전적인 연출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토리와 게임 플레이가 괴리된 방식은 아니거든요. 게임 플레이 와중에도 뭔가 사건이 벌어지고 대화가 나오지만 그럴 때는 참 90년대 일본 RPG스럽게도 캐릭터마다 얼굴 그림이 그려진 대사창이 뜨는 게 고작이고, 캐릭터가 아주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게 전부이며 시점조차도 바뀌지 않습니다. 애초에 3D 그래픽을 채택한 이유가 뭔데요.

그래픽도 밍밍하고요. 캐릭터 눈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구별이 힘들 정도. 덕택에 꽤 괜찮은 물리엔진이 들어가고 이리저리 난장판으로 때려부수는 데도 불구하고 사양이 낮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며 색감이 좋은 덕에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긴 합니다만, 게임플레이 와중에 별다른 연출이 없는 것도 떨어지는 그래픽을 티 덜 나게 하기 위해서일 거란 확신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아마 역시 저렴한 그래픽을 티 내지 않기 위해서겠지만, 3D 그래픽인데도 캐릭터를 화면 꽉 차게 당겨볼 수 없다는 건 상당히 실망스럽더군요. 장비 좀 바꾸고 나면 아 캐릭터 생김새가 이렇게 바뀌었군 하고 줌인해서 보는 건 이런 장르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일 텐데요.

게임플레이 자체도 밍밍합니다. 전투는 재밌습니다. 화려한 스킬 써서 몹들 쓸어버리는 거야 물론 재밌고 적들 펑펑 날려보내는 쾌감 역시 굉장하죠. 다양한 룬 조합과 클래스간의 차이 역시 (당연한 밸런스 문제를 제외하면) 상당히 잘 나왔습니다. 사실 전반적으로 굉장히 재밌는 축이죠. 하지만 시스템적으로 갑갑하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번호키 4개에 스킬을 4개만 등록해놓고 써야 하는 너무 단순한 시스템이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게 어렵게 만들며, 와우에서 따온 게 틀림없는 쿨타임 30초짜리 회복약과 여는데 한참 걸리는 포탈 역시 답답한 느낌입니다.  긴장감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라는데 그냥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살길 찾기가 힘들어 이러다 죽고 다시 해야겠다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만들더군요.

이 계열에서 전투를 빼면 남는 건 육성하고 탐험 정도일 텐데, 캐릭터 육성 역시 딱히 재미랄 게 없습니다. 각종 능력치는 자동으로 상승하게 바뀌었고, 스킬 역시 포인트를 쌓아 강화하는 대신 레벨이 오르면 스킬 특성을 조금 변화 가능하게 옵션이 주어지는 게 고작이죠. 블리자드에서는 어차피 스킬 다 똑같이 찍을 텐데 상관없지 않느냐는 태도던데, 그렇다고 그걸 아예 없애면 어쩌라는 건가요. 차라리 매스 이펙트처럼 자동으로 능력치를 찍어주거나 플레이어가 직접 능력치를 고르는 옵션을 선택 가능하게 하던가, 혹은 그냥 적당한 비용으로 리셋이 가능하게 하던가요. 이미 검증된 시스템을 없애버린다는 건 확실히 무리수라고 보입니다.

한편으로 이 장르에서는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것 역시 캐릭터 육성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글쎄요. 물론 노말 난이도밖에 못 봤긴 합니다만 경매장에서 훨씬 더 비싼 아이템들을 봐도 다양성이라던가 개성, 독특한 옵션, 뭐 그런 게 별로 보이질 않는 느낌입니다. 세트아이템도 별로 없어 보이고, 다양한 옵션이나, 넣을 수 있는 요소들은 전작에서도 충분히 많았는데 다 간략화되고, 그냥 힘 민첩 지능 얼마나 올려주는가, 초당 데미지는 얼마. 그런 것들밖에 거의 안 나오고 또 그런 것들만 신경 쓰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흰템들은 상점에 팔아도 돈도 거의 주지 않으니 애초에 왜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인챈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석들 옵션조차도 단순하고.

탐험 역시 재미없습니다. 맵 말이죠. 거의 모든 필드는 적당히 넓은 들판 한가운데 길이 있고, 길 따라 가면 되지만 싫으면 주변 조금 돌아다녀 봐라 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돌아다녀봐야 몹 더 잡고 아이템 조금 더 얻는 것뿐입니다. 가끔 길이 없는데 이 경우엔 역시 몹들과 아이템 상자, 그리고 지극히 드문 랜덤 이벤트와 두세 개의 랜덤 던전이 널린 휑한 벌판을 알아서 헤매야 합니다. 그나마 그 던전들도 랜덤하다는 느낌을 거의 주지 못하고, 구조도 대부분 상당히 짜증나는 형식입니다. 제법 많은 던전이 Y자 형태입니다. 한쪽에서 시작해서 길이 두 군데로 나뉘는데 한쪽은 옳은 길이고 다른 쪽은 잘못된 길이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한쪽 갔다가 막혀있길래 한참 돌아와서 다른 쪽으로 다시 한참 가야 되는 지루한 구조요. 차라리 진짜 복잡한 미로라던가 스위치, 퍼즐 등이 잔뜩 널려있는 방식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애초에 랜덤하다는 것도 말장난 수준이고 뉴 트리스트람 마을이건 사막 복판이건 심지어는 전쟁터조차도 맵과 주어지는 환경이 다 비슷비슷해서 돌아다니는 재미가 그닥 없습니다.

게다가 사이드퀘스트라는 게 없으니까요. 특정 이벤트 달성하면 좀 특수한 스킬이나 아이템이나 무언가를, 아니 하다못해 저 강력한 몹을 때려잡으면 좀 비싼 레어 아이템이라도 준다는 진부한 사이드퀘스트조차도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플레이어는 길 따라 가면 갔지 더 돌아다닐 동기가 없어지게 됩니다. 굳이 맵 밝히려고 돌아다니며 랜덤으로 센 몬스터 몇 개 만나서 운 좋으면 조금 더 좋은 아이템 몇 개 얻는 걸 목표로 삼을 순 있겠죠. 하지만 안 그래도 허한 필드에 목적이 부여되지 않으면 그저 밍밍한 빈 공간일 수밖에요.

마지막으로, 예상 가능하지만 음악까지도 지루합니다. 과거의 블리자드 게임 음악관을 정립했던 몇몇 작곡가들이 떠난 뒤의 블리자드의 음악은 예전 같지 않으니, 이번 디아블로 3도 음악이 심심한 건 놀라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 그래도 인스톨시에 흘러나오는 매우 산만하게 어레인지된 트리스트람 테마에 이어 적당히 진부한 러셀 브라우너의 메인 메뉴 음악을 최종장에 우려먹는 걸 듣다 보니 워크래프트 2의 휴먼 1, 디아블로 1의 트리스트람, 브루드 워 아리아, 디아블로 2의 던전 테마, 워크래프트 3의 A Call to Arms,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톰윈드까지 게임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명곡들을 뽑아내 주던 예전의 블리자드가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이번 판다리아 확장팩에는 제레미 소울이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딱히 어울릴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은, 당연하겠지만 결과적으로 꽤 심심한 물건이다 싶어졌습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했듯 장점도 있으며 그 장점을 깎아먹을 만큼 안 좋은 의미로 덜 밍밍한 것도 있습니다. 온라인으로만 게임이 가능하다는 거야 개인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고 보지만, 그놈의 로그인 에러. 에러 극복하고 접속이 되어도 핑이 400핑 찍고 500핑 찍고, 한국 서버가 자리가 모자라서 미국 서버로 우회 접속하게 돌려막기를 한 덕인데 가끔은 3000핑을 넘기는 일도 겪어봤습니다. 신호가 왔다갔다 하는데 3초가 걸린단 말인데 이 친구들 서버를 달에라도 만들었나요? 노말로 디아블로 잡다가 열두 번 죽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제가 발컨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게, 일단 핑 때문에 피하기가 힘든데 특수기술 맞으면 두 방에 죽더라고요. 좀 더 알아보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애초에 공격 애니메이션이 발동되면, 가령 적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칼이 몸에 닿기 전에 캐릭터가 피해도 무조건 맞는 걸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일부러 바꾸었다고 하던데, 핑 문제까지 겹쳐서 화면상으론 피했는데 그냥 죽는 걸 계속 보니까 상당히 짜증나더군요.

결과적으로 좋은 소리는 없습니다만...긍정적인 이야기도 좀 하자면, 어쨌건 5만 5천원으로 훨씬 더 재미없는 게임도 해봤으니 이 정도면 딱히 나쁜 것 같진 않습니다. 단지 명작은 확실히 아니고, 대작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네요. 와우 계정 끊으면서 함께 결재한 스타크래프트 2의 엔딩을 보고 뭔지 모를 애매한 감정에 휩싸였을 때 이후로, 블리자드가 확실히 내리막이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는 동기는 되었습니다. 물론 해보시는 게 나쁘진 않을 겁니다. 다만 기대는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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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미 충분히 긴 글이지만 어차피 제 글은 사람들이 거의 안 읽으므로 블리자드의 내리막에 대해서도 약간 이야기해볼까요.

뜬금없이, 비디오 게임의 발전사를 한 문장으로 말하라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기술의 발전으로 시스템적인 제약이 철거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게임은 현실이 아닙니다. 어떤 게임이든 현실은 아니죠. 때문에 현실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특정한 시스템과 장르의 틀을 도입합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굳이 비디오 게임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죠. 가장 오래된 ‘게임’중 하나인 장기가 초-한간의 전쟁을 장기판 위에, 실제 전쟁보다는 매우 간략화된 규칙으로 구현한 것에서 쉽게 생각해볼 수 있듯이 말에요.

장기의 룰이 비교적 단순하듯, 오래된 비디오 게임일수록 심각한 하드웨어의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매우 간략화되고 단순화되거나 추상적인 현실의 모습을 게임 속에 구현했습니다. 어렵지 않게, 퐁이나 테트리스 같은 물건들을 생각해봅시다. 특히 퍼즐 장르에서처럼 그러한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게임의 핵심 요소였으며, 잘 만들어진 시스템은, 장기가 그렇듯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장르적 공식으로서 정립되고 오래도록 쓰입니다.

하지만 기술의 제약으로 시스템의 확장이 가능해진 시대에 이르러 과거의 낡은 규칙과 장르들은 빠르게 시대에 뒤쳐진 것이 되어 사라져갔습니다. 가령 고전적인 어드벤쳐 게임들은 인공지능도, 복잡한 시스템도 필요 없이 화면에 그림 몇 장 펼쳐주고 마우스 클릭만 하면 되는 단순한 구조로서 과거의 뒤처지는 하드웨어 스펙에 걸맞은 게임이었지만, 3D 그래픽이 보편화된 시대에 있어서는 장르 자체가 잊혀져갑니다. 비슷한 예로서 메탈슬러그 같은 2D 사이드뷰 슈팅게임이라던가, 고전적인 탑뷰 방식의 RPG들, 오락실 건슈팅, 한때 유행했던 수많은 장르들이 쇠락하고 사라져갔고, 살아남은 것들은 변화하는 하드웨어적 스펙에 맞추어 자신을 확장시켰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경우로 FPS는 둠에서처럼 단순히 미로를 헤매며 화면의 적을 쏘는 물건에서부터 시작하여 멀티플레이와, 레이싱과 비행시뮬 등을 포함하는 복합장르로서의 모습에다가 영화적 연출을 결합하고, 콘솔 패드라는 입력도구에 최적화된 형태까지 선보임으로서 오늘날의 비디오 게임계를 점령하고 있죠.

결국 비디오 게임의 발전사는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규칙과 공간을 더 확장해나갈 수 있는 장르는 성공하고, 그러지 못한 장르들은 결국 잊혀져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 시점에서, 2012년, 2편의 10년도 더 뒤에 발매된 과연 디아블로 3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거죠. 1과 2 둘 다, 2D 그래픽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던 고정 쿼터뷰 시점과 마우스 클릭으로만 이동하는 참 오래된 시스템을 계속 유지해오면서, 고전적이다 못해 요즘은 찾아보기도 힘든 핵 앤 슬래쉬를 다시 한 번 되살려보는 것은 사실상 해당 장르가 고사하다시피 한 상황인데다 전편이 워낙 인기가 좋았던 판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디아블로 3은 단순히 기술 체계 좀 바꾸고 경매장 추가하고 하는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프랜차이즈로서 기능하며 적어도 전작의 이름값을 해내기 위해선 훨씬 더 혁신적인 변혁을 필요로 했었을 겁니다.

블리자드의 행보가 진부하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혁신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분명히, 디아블로 1은 액션 RPG라는, RPG인지 아닌지도 아리까리한 장르를 첫 탄생시켰습니다. 이후의 스타크래프트 1은 당시 넘쳐나던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계에서 액기스만을 모았지만 KKND나 유사 C&C 게임들과 비교하자면 참신하기 그지없었죠. 이어서 워크래프트 3 역시, 그리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역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보다는 이미 잘 정립되어 있는, 하드웨어적 제약에 맞게 생겨난 장르 시장에서 자신만의 요소를 몇 개 넣고 잘 된 것들을 배워내 섞은 뒤 만들어냄으로서 높은 완성도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블리자드가 와우를 만들고 확장팩을 줄줄이 내놓고 나서 6년 뒤, 2010년에 등장한 스타크래프트 2는 그런 의미에서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하드웨어적 발전으로 인해 실시간 전략 시뮬이라는 장르는 죽어 없어지거나,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나 월드 인 컨플릭트처럼 더 으리으리하고 희한한 형태로 변화한 뒤였죠. 2D 그래픽의 제약을 받지 않는데 조그마한 맵이 언덕 몇 개로 높낮이가 구분되는 제약이 필요할까요. 하드웨어가 월등히 강력해졌는데 여전히 유닛 제한을 200으로 묶어야 할까요?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잖습니까. 왜 기존의 제약에 얽매여야 합니다.

물론 애초에 시리즈의 정체성이 그런 게임인데, 후속작에서 게임 시스템을 완전히 갈아엎는 게 가능하냐는 반박이 가능할 겁니다. 그럼 스타크래프트 2는 전작의 시스템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게임으로 나왔어야 했냐고, 그게 과연 정식 후속작으로 취급이나 받을 것 같냐고, 팬들이 사주기나 할 것 같냐고 말예요.

그러나 결국은 이건 발매주기가 너무 길다는 데 문제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스타크래프트 1의 후속작이 나오기까지 11년 걸리고, 디아블로 2의 후속작은 12년 걸렸죠. 그 동안 게임계는 엄청나게 변화했습니다. 만약 블리자드가 최소 몇 년 정도의 주기로 시리즈를 냈더라면 지금쯤은 스타크래프트 4나 디아블로 5가 나왔을 테고, 1편과 비교해 시스템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겁니다. 중간의 시리즈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게임 시장에 맞춰 적절한 수정을 가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예요.

결과적으로 너무 긴 발매주기가 이걸 불가능하게 만든 겁니다. 물론 그것이 블리자드의 장인정신이네 하는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게임도 그 사이사이에 내놓았으므로 블리자드로서는 그렇게 발매주기를 줄일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콜 오브 듀티나 어쌔신 크리드처럼 일년마다 비슷비슷한 후속작을 좍좍 뽑아내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블리자드는 기존의 혁신성을 잃고 예전 유망 프랜차이즈만 뒤적거리는 데 그친다고 비판을 하던가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 2가 나오고도 2년이 지나가는데 아직 그 확장팩 군단의 심장은 언제 나올지 감도 안 잡히고 있습니다. 블리자드는 확실히 명작을 뽑아내주었던 회사이고,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후속작이 나온 스타 2와 디아 3은 잘 팔렸습니다. 하지만 과연 10년 뒤에도 사람들이 조금 시스템 다른 스타크래프트 3에서 시즈탱크 박고 마린에 스팀팩 먹이는 걸 좋아할까 싶네요. 물론 블리자드의 차기 프로젝트로 타이탄이 있긴 하지만 그건 또 몇 년 뒤에 나올는지.

그래서 바이오웨어는 제 사전에서 지웠고, 블리자드도 지워져가고 있고...음, 그래도 누군가 유망주가 또 나오겠죠. 어차피 요즘은 게임할 시간도 별로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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