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장르 작품이 빚어내는 최고의 캐릭터는 쿨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쿨하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건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한 우물만 판다는 소리입니다. 그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이상하다 해도, 남들이 욕하거나 비판하거나 비웃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거죠. 오로지 그 하나의 일에 평생을 걸고 사소한 흐름이나 감정에는 휘둘리지 않으며, 어떤 때에도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이런 캐릭터가 일반 작품이라고 없는 건 아니지만, 장르에서 더 빛을 발한다고 봅니다. 장르는 아무래도 일상 속의 비일상을 다루기 때문에 그만큼 특이한 사건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캐릭터는 특이한 사건을 다뤄야 하는 법.

 

이런 캐릭터의 전제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자기 삶을 다 바칠 정도로 매달리는 일이 있다는 것. 수많은 역경이 있더라도 결코 그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 일은 평범한 일반인이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괴상합니다. 그래서 온갖 따가운 눈총과 심한 잔소리를 듣습니다만, 정작 본인은 주변인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전혀 개의치 않죠. 오히려 자신의 일을 자랑하거나 자기 일을 몰라주는 사람을 도리어 비웃기도 합니다. 흠,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이런 패턴을 거쳐가죠.

 

여기에는 공식이랄까, 공통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꼽아보라면, 우선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라는 겁니다. 거의 예술가나 대가의 경지에 이르긴 했는데, 워낙 그 일이 괴상망측하다 보니 알려질래야 알려질 수가 없죠. 그래서 정작 이 캐릭터의 명성을 아는 이는 몇몇뿐입니다. 명성을 아는 이들도 불신의 눈초리를 보낼 때가 많고요. 또 대개는 주인공보다 조력자로 나와 충고나 조언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캐릭터가 성장을 하지 않고 감정의 동요가 없어서 주인공의 고난을 보여주기 충분하지 않거든요. 주인공으로 나온다 해도 성장하는 쪽은 도움을 받는 주변인물이죠. 거기다 특이한 일에 목숨 걸고 매달려서 그런지 다른 사람 감정에 신경을 잘 안 씁니다. 대인 관계가 나쁘다기보다 자신이든 남이든 감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게 좀 지나치면 민폐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독설을 쏟거나 말투에 가시가 돋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연애를 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누굴 사귀거나 결혼하지도 않습니다. 결혼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기 짝을 찾을 생각은 도통 안 하죠. 그만큼 자기 일에 열성적이긴 하지만. 또한 육체적인 일을 하기보다 정신 노동에 종사합니다. 설사 몸으로 뛴다 하더라도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일깨우는 정보 제공자 역할을 도맡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는 뜨겁긴 뜨겁습니다. 자기 일에는 내면의 열정을 불태우죠. 그런데 그 외에 다른 일은 냉소적으로 대하니까 쿨하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수많은 캐릭터들이 다 똑같지는 않고 쿨함을 드러내 보이는 방식도 다른데, 저는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매니아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셜록 홈즈. 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하는 짓을 보면 히키코모리(방구석 폐인)나 다름없습니다. 추론의 과학을 신봉하는 건 좋은데, 그것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을 안 써요. 그래서 그와 같이 지내는 지인은 홈즈를 괴짜로 보고 결코 좋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왓슨에게 하숙인을 소개해준 스탬퍼드가 그랬고, 거기다 도움을 받는 런던 경시청의 형사들은 대놓고 깔봅니다. 가끔은 왓슨조차 홈즈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이라고 책에 적었습니다. 살아생전 과연 홈즈를 완전히 이해해준 인물이 있었는지 의문이네요. 그렇다고 홈즈가 거기에 구애를 받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경찰 백 명이 와서 잔소리를 해도 홈즈는 자기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자문 탐정이라며 자랑과 설교를 해대기 일쑤입니다. 탐정을 무시하는 형사와 자기 자랑에 바쁜 탐정은 거의 만담이라고 할 정도로 웃깁니다만. 시리즈가 뒤로 가면서 홈즈는 유명인이 되어 민폐 인물에서 벗어났고, 이런 만담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너무 아쉽기도 해요. 언제까지나 경찰에게 괴짜로 남은 탐정이라면 좋았을 텐데.

 

다음으로 괴팍함이 눈에 선한 간달프가 있습니다. 간달프는 <호비트>와 <반지전쟁>을 뒤져봐도 거의 어느 페이지에서든 묘사가 한결같습니다. 두터운 눈썹을 쑥 내밀고 인상을 찌푸렸다는 거죠. 책에 주로 나오는 마법사가 간달프뿐이라 마법사들이 원래 이런지, 아니면 이 노인네만 이런 건지야 알 수 없습니다만. 늙은이 특유의 심술과 독선이 잘 맞아떨어져 꽤 걸출한 캐릭터가 탄생했습니다. 하여간 성격이 이래 놔서 어딜 가나 별로 환영은 못 받는데, 다른 왕국에서는 간달프가 참견이 심하고 안 좋은 소문만 몰고 다닌다고 흉을 보죠. 특히, 데네소르와 주고 받는 대화는 까칠함이 극에 달해 고개를 젓게 합니다. 피핀에게 역정을 내면서 바보 같은 투크!”라고 하는 장면도 대표적이고요. 사실 간달프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고, 사우론의 흉계를 물리칠 사람이 자기밖에 없으니까 몸이 달아서 중간계를 쏘다니며 싫은 소리를 하는 거죠. 이렇게 괴악한 늙은이의 모습은 이후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고, 성격 까칠한 노인이 조언자로 나온 판타지라면 간달프의 모방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드라큘라>에 나오는 아브라함 반 헬싱은 광기를 대변합니다. 브람 스토커가 쓴 원작부터 최근의 영화화에 이르기까지 반 헬싱은 작품마다 성격이 약간씩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게 어느 정도의 광기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사람은 이 세상에 흡혈귀나 유령 같은 건 없다고 믿는데, 반 헬싱은 그런 편견을 깨뜨려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혼자 목숨 걸고 초자연적인 존재와 대결해야 하니까요. 괴물을 상대하는 자는 괴물과 닮아가는 법. 그래서 반 헬싱은 부분적으로 미쳤습니다. 처음에는 애가 타서 도움을 요청했던 자들도 나중에는 이 교수의 행동에 치를 떱니다. 게다가 반 헬싱이 이렇게 나온 데에는 후대로 가면서 드라큘라가 동정표를 얻은 탓이 큽니다. 처음 소설에 나올 때만 해도 드라큘라는 완전한 악이었고, 반 헬싱은 여기에 대비되는 인자하고 정이 많은 노년의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드라큘라가 인기를 얻고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드라큘라는 착한 놈, 인간은 나쁜 놈의 구도가 성립되죠. 그 결과, 반 헬싱은 불쌍한 악마를 때려잡는 미치광이 노인으로 서서히 변했습니다. 쩝. 이런 미친 반 헬싱을 잘 연기한 게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캐스팅한 안소니 홉킨스. 영화는 과소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지만,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놓치지 말 것을 추천합니다. 이른바 원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딱 부러지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오로지 사냥 밖에 모르는 프레데터나 프로그램대로만 행동하는 터미네이터 등도 집어넣으면 좋겠는데, 이들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니라서 예시로 들기가 좀 그렇네요. 하지만 우직하게 에일리언을 때려잡는 프레데터나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존 코너 앞에서 총탄을 막아내는 T-800이 멋진 건 사실이죠. 외계인이나 기계라고 하더라도.

 

이런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는 건 그 분야의 프로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게 살인사건이든, 고대의 마법이든, 흉악한 악마든 간에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일생을 바칩니다. 가히 장인 정신이 느껴지지 않나요. 현실에도 장인은 많지만, 이들이 다루는 건 단순한 기예가 아닙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머지를 아낌없이 포기하니 희생 정신에 감동은 두 배로 뜁니다. 더군다나 현실 속 우리는 결코 저렇게 살지 못하니까 더 로망일 테죠.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가족, 친구, 사회가 발목을 잡죠. 그러니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쓰고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캐릭터가 멋있을 수밖에요.

 

써놓고 보니 예시를 든 캐릭터가 전부 영국 작품에서 나왔네요. 흔히 그런 농담을 하죠. 영국사람은 두 명이 한 자리에 있어도 절대 인사를 안 하다고. 아마 이런 무관심한 섬나라 기질 때문에 저런 캐릭터들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