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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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작가들 중에는 몇 권 혹은 몇 십 권이나 되는 연대기를 쓰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주류문학과 달리 장르 문학은 설정이란 게 있어서 가능하죠. 가령, 가상의 행성 하나를 창조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행성의 생태계가 어떤지, 무슨 동물이 사는지, 거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진화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고 환경이 바뀌는지, 천년 혹은 만년 후의 모습이 어떤지 등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야기가 나오는 법입니다. 이거 책 몇 권은 쓸만한 분량이죠. 이럴 경우, 인물이나 사건보다는 무대 자체가 중심 요소가 되며, 좋은 설정이 훌륭한 주제로 승격하는 사례가 됩니다. SF/판타지가 아이디어 문학이라는 건 이 때문이죠. 설정놀음을 잘 한다고 좋은 작품이 꼭 나오는 건 아닙니다만. 창의적인 설정은 그만큼 번뜩이는 주제를 뽑을만한 바탕이 됩니다. (그러자면 남들이 도전하지 않은 길로 가야하는 실험 정신이 있어야 할 거고요.)
세상에서 연대기를 쓴 작가는 많고, 일일이 수를 거론하기 힘듭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한 사람 골라보자면, <듄>을 쓴 프랭크 허버트가 있습니다. 허버트는 사막 행성이라는 주제를 다듬기 위해 무려 6년간 자료 수집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 보상을 받으려는 듯 6부작이나 되는 대작을 펼쳤습니다. 그 후손도 남은 설정을 가지고 외전을 펴냈고요. (일부 팬은 이제 그만 좀 나오라고 할 정도.) 뒤로 갈수록 주제가 점점 요상해지는 것 같긴 하나 여하튼 길이 남을 연대기이긴 합니다. 이 책은 매년 최고의 SF를 뽑을 때마다 높은 순위를 놓치지 않는데, 다른 작가들이 보면 좀 억울해할 만도 합니다. 다른 작가들은 책 한 권을 쓸 때마다 설정, 사건, 인물을 새로 정하느라 골머리를 썩히는데, 허버트는 달랑 사막행성 하나만 만들어놓고 뼛속까지 우려먹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허버트가 작업분량이 적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이 작가에게서 <듄>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다작을 하는 작가들의 예는 보다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작이란 단순히 책을 많이 쓴다는 게 아니라 각 작품 수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다작은 보다 보편적인 방식이니까요. 설정 하나를 두고두고 써먹기보다 각 작품마다 설정을 새로 부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거죠. 물론 훌륭한 작가들은 다작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일관된 주제를 제기합니다. 쥘 베른은 <해저 2만리>나 <달나라 여행>, <지구 중심으로의 여행> 등에서 항상 가상의 여행기를 썼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라마와의 랑데부>, <유년기의 끝>, <2001 우주대장정> 등에서 인류가 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과 조우해 발전하는 걸 말했고요. 비슷한 지위를 누렸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시리즈물에 도전하긴 했어도 역시 여러 작품을 내놓았죠. 로봇 시리즈, 우주 시리즈, 파운데이션 시리즈 등. <파운데이션>은 그 자체가 연대기이기도 하지만, 아시모프에겐 <파운데이션> 말고도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유행한 이른바 테크노 스릴러 작가들도 다작을 했습니다. 마이클 클라이튼은 <콩고>, <스피어>, <쥬라기 공원>, <타임라인>, <먹이> 등을 발표했습니다. 매번 플롯이 똑같다는 비판이 있지만, 책은 잘 팔렸고, 상업주의 과학을 비판하는 주제를 관통했습니다. 로빈 쿡은 의학 스릴러를 유행시키며 히트를 쳤는데, <돌연변이>, <바이탈 사인>, <바이러스> 등이 유명합니다. 톰 클랜시는 과학기술보다는 군사/정치 분야에 상상력을 발휘한 사람으로 <붉은 10월호>, <공포의 총합>, <레인보우 식스> 등을 썼죠. 자기 이름으로 관련 게임도 많이 냈고, 앞으로도 나올 예정입니다. 댄 브라운은 역사 속에 숨은 음모론에 그럴 듯한 환상을 더하는 게 재주입니다. 딱히, 주제라고 하기는 그렇습니다만. 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다 빈치 코드>를 비롯해 <천사와 악마>, <디셥션 포인트> 등이 있고요. 앞으로 당분간 이러한 테크노 스릴러가 대중 SF를 주도할 것 같습니다.
이런 작가들은 설정 하나를 두고 가지를 치고, 또 치고, 또 쳐서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를 지경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한 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다른 책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작업할 분량이 더 많을 테고,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과정도 힘들 듯합니다. 물론 설정 하나로 연대기를 쓰는 것도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어느 작업이든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매너리즘을 피하려고 갑절의 노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어떤 노력을 했든지 간에 설정 하나만 만들고 그걸로 먹고 사는 건 빈약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책은 아니지만, 좋은 비교대상이 있으니 장르 영화계를 보죠. 흔히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를 비슷한 감독으로, 좋은 동료로 비교하곤 합니다만. 스필버그는 <이티>, <죠스>, <미지와의 조우> 등 수많은 영화를 감독/제작했습니다. 그런데 루카스는? 달랑 <스타워즈>가 전부입니다. 아무리 루카스옹이 천재적인 크리에이터니 어쩌니 해도 필모그래피에서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를 빼면 뭐가 남을까요. (그 하나 밖에 없는 <스타워즈>가 워낙 방대하긴 하지만요.)
러브크래프트는 좀 특이한 경우입니다. 다작을 하긴 했습니다. 본인은 아마 크툴루 연대기 같은 걸 만들 생각이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근간에 공통된 설정을 깔긴 했고, 심지어 다른 작가의 설정을 빌려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작품의 참된 면을 알고자 한다면, 다른 작품까지 일일이 찾아서 봐야 합니다. 문제는 작가 스스로가 설정을 짜는 데에 큰 관심이 없었고, 전우주적인 공포를 구현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근간에 깔린 희미한 설정마저 엉터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레이트 올드 원의 정체가 뭔지, 올드원과 올드씽은 어떻게 다른지, 니알라토텝은 그레이트 올드 원과 아우터 갓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등 헛갈릴 요소도 다분하고요. 후배 작가들이 설정관리를 해주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만든 게 아니죠. 이 사람은 설정 하나로 연대기를 만든 작가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작을 한 작가도 봐야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설정 하나로 우려먹은 작가로 생각합니다만. 독자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설정 하나를 연구한 작가를 나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작가들의 작품이 더 좋습니다. 설정을 만들어 우려먹더라도 그게 낫다는 겁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요. 왜냐하면 이런 작가들은 많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설정에 많은 공을 들였고 탐구할 거리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책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고 평생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책이 달랑 한 권으로 끝났다면 독자는 무진장 섭섭할 겁니다. 좋은 예로 <스타십 트루퍼스>가 있죠. 로버트 하인라인은 파워드 슈트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나 이게 나오는 작품은 <생명선>부터 <므두셀라의 아이들>까지 뒤져봐도 <스타십 트루퍼스> 하나뿐입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제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면요.) 파워드 슈트가 이후 미친 파급효과를 생각하면, 러프넥 크로니클 같은 걸 썼어도 좋았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하지만 하인라인은 그러지 않았고, 독자가 파워드 슈트로 설정놀음을 하고 싶어도 할 거리가 없습니다. 그저 책 한 권으로 뭘 하겠습니까. 거기다 파워드 슈트 설명은 몇 줄 되지도 않아요.
저는 그래서 연대기가 좋고, 시리즈물이 좋고, 프랜차이즈가 좋습니다. 가끔은 아이디어가 바닥나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극심한 상업주의에 빠져 시궁창이 되기도 하죠. 아니, 가끔 그러는 게 아니라 대다수 프랜차이즈가 그런 함정에 빠지죠. 그러나 그 중에는 진정 보석 같은 프랜차이즈도 있고, 평생을 걸쳐서 음미할 자료를 쌓아두고 가는 작가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까닭 때문에 작가들이 되도록 하나의 설정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우물을 파다 떠나기를 바랍니다. 다작을 할 시간이 있다면 연대기를 좀 더 늘리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작가와 작품과 독자가 있습니다. 그저 제 소박한 바람과 취향은 저런 쪽이라는 겁니다. 장르도 편식하는 건 건강에 안 좋고, 되도록 다양한 분야를 파고드는 것이 작가나 독자한테 좋을 테지만요.
톰 클랜시나 댄 브라운은 같은 캐릭터를 계속 써 먹는 사람이죠. 작품마다 테마가 달라지므로 연대기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서도.
캐릭터를 이어가면서 시리즈를 계속 쓰는 것이나, 설정을 이어가면서 시리즈를 계속 쓰는 것이나, 작가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해도 사실 할 말 없는 겁니다. 솔직히 새로운 캐릭터와 설정을 새로 만드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이미 성공한 등장민물과 설정을 써 먹으면 반은 먹고 가는 것이니까요.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장르문학이 유독 긴 시리즈가 많다고 너무 뭐라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실은 순문학이나 그런 쪽에서도 시리즈가 엄청나게 많아요. 긴 시리즈 중에 한 두 편만 걸작으로 회자되면서 살아남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주 널리 알려진 작품 중에, 알고보니 속편이 꽤 있어서 놀랐던 작품이라면...
<빨강머리 앤> - 무려 10부작이었죠. 잘 알려진 것은 1부 정도이지만서도. 남성 독자들은 2부 이상을 잘 못읽어 내립니다. 닭살이 돋아서 읽기 힘들죠. 하지만 여성 독자들은 2부 이후도 꽤 좋아라하더군요.
<작은 아씨들> - 알고보니 6부작이었습니다. 그런데 1부 말고는 별로 유명하지 않고, 잘 해야 2부까지 읽히곤 합니다. 출판사 측에서 후속편을 더 써달라고 하도 졸라서 조금씩 쓰다보니 시리즈가 불어났다고 하죠.
<초원의 집> - 8부작입니다. 이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을 만 합니다. 제 4부 이후부터는 모두 뉴베리 아너 상 수상작이어서, 시리즈 중 5편이나 뉴베리 아너 상을 받는 기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시리즈 중 최고작은 6부 <긴 겨울>입니다. 미국의 문학사를 다룰 때도 <긴 겨울>은 미국 문학 역사상 가장 우수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톰 소여의 모험> - 대개 속편 <허클베리 핀의 모험>까지만 알려져 있죠. 여기에 <톰 소여 아프리카 여행(기구 여행)>, <톰 소여 탐정이 되다>까지 4부작입니다. 3부 이후도 번역은 되었지만 구하기 쉽지 않죠. 작품의 가치는 2부가 최고이구요.
<삼총사> -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긴 소설이고 얼마나 속편이 긴 지 잘 몰랐습니다. 한국에 전체 분량이 완역으로 나오면 15권 분량은 족히 넘을 겁니다.시리즈 3~5부를 이루는 <철가면>을 최고작으로 치곤 하는데, 아직까지 완역된 적이 없죠.
<키다리 아저씨> - 이 경우 속편은 단 한 권 <다정한 적> 뿐입니다. 시리즈가 길어서 놀랐다기보다, 속편의 완성도와 재미가 전편과 버금가는 것에 놀랐었죠. 작가 진 웹스터가 아기를 낳다가 산욕열로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더 좋은 책을 많이 썼을 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연대기 작품... 저도 연대기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대기 작품을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만...
사실 연대기라는 것은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만,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단지 그 세계에서 활동하는 몇몇 주인공을 중심으로만 이야기가 펼쳐져 나간다면 모처럼의 좋은 세계가 한 개인의 일대기로 끝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에 많이 나오는 라이트 노벨... 연대기라기보다는 '캐릭터 소설'이라고 불리곤 하는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라이트 노벨을 폄하하는게 아니라, 연대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운게 많다는 말이지요.
연대기라면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인공만이 아니라 그 세계 자체에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이야기 하나하나 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할때, 그들 주인공 하나하나가 모두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상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며, 어떤 점에서는 더 힘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이 정해져 있는 이상 그것이 제약으로 작용하니까요. 혹시라도 기존의 인물이 등장한다면 그 인물의 설정이 제약을 가져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연대기 속에서 하나의 작품 속의 이야기는 그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사용자나 관객은 자신이 접하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길 바라지, 고작 외전이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연대기가 발전하다보면 -개인적으로- '프랜차이즈 작품'이라 불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의 세계를 여러 작가가 함께 다루는 것. <배틀테크>나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 등이 이런 부류겠군요. 아니, 근래에는 이런 작품이 더 많습니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원소스 멀티유즈라는 형태로 여러 제작자가 참여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건담> 시리즈 같은 것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프랜차이즈 작품은 그만큼 수가 많고 다양한 개성이 등장하지만, 서로서로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쉬운 일입니다.
그나저나 <스타쉽 트루퍼스>의 연대기 작품이라니... 정말로 저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런 점에서 <노인의 전쟁> 시리즈는 연대기적인 매력을 가져서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