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宙易)
글 수 47
-걸오야. 입항하면서 근신 풀렸대. 놀러 가아자.
예상했던 대로다. 애초에 이번 사건은 모우가 신규 스타파이터들의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미 노비문서에 비공식 서명을 한 걸오와 미카는 금방 풀어줄 것이다. 그러면 방에 갇혀서 좀이 쑤신 미카가 놀러 올 것은 당연지사. 그 결과 지금 인터폰 화면에는 문 앞에서 서성이는 미카가 보이고 있었다.
“좀 있어봐. 씻고 나갈게.”
하늘이 주신 동점 찬스를 어찌 놓치랴. 걸오는 실실거리며 샤워실에 들어가 시원하게 사우나 한방 때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후로도 미카가 몇 번 더 문을 두들겼지만 걸오는 아랑곳 않고 느긋하게 시간을 끌었다. 이렇게 되면 지루해진 미카가 졸게 될 것이란 사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알려진 사실. 그때가 절호의 기회.
한참 뒤 문을 열자 역시나 문 앞에는 쪼그려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사타호 비행 전대장 오미크론 크루갈레시난 중령이 있었다. 갸웃갸웃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운 턱 선. 1점으로 하기엔 더없이 충분하다.
“자아, 이것으로 1대1 동점.”
걸오는 흐뭇하게 웃으며 저만치 걸어갔다. 그리고 미카를 향해 전력질주. 다음 달려오는 가속력을 그대로 살려 전력을 다한 킥. 평화롭게 자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턱선을 향해 솟구치는 실내화. 뭐? 실내화? 군화가 아니고?
뜻밖의 사실에 걸오는 당황했다. 샤워를 한 다음 깜빡 하고 군화 대신 실내화를 신고 만 것이다. 실로 뼈저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1점은커녕 0.5점도 감지덕지한 상황. 그러나 걸오의 실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 당황한 탓에 킥의 속도가 미묘하게 느려졌고 이 때 잠자던 무어인 여성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적대적인 운동에너지를 본능적으로 감지, 그 궤도에 자신의 이빨을 들이댄 것이다.
“켕!”
걸오의 발에 차인 미카가 밭은 숨과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고꾸라졌다.
“에? 에?”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누가 자신을 세게 걷어찼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도 못한 채 두리번거리다가 엉거주춤 서있는 걸오를 보자 방긋 웃는다.
“아아, 걸오야 미안해. 내가 깜빡 졸았지?”
싱글벙글 웃는 미카와는 대조적으로 침통한 걸오의 표정. 통증으로 보건대 아마 엄지 발가락이 나갔을 거다. 대답 또한 침통하다.
“오으으흐흐흥.”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고통에 걸오는 어금니를 악물며 들숨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런 걸오를 본 미카는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어? 피 냄새?”
미카는 갑자기 풍겨오는 피 냄새의 근원을 찾아 코를 킁킁대더니 곧 쭈그려 앉아 걸오의 발을 보았다. 발에서 배어 나오는 피가 실내화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안해 걸오야. 나 깨우려고 찼다가 이렇게 됐구나?”
미카는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있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자신을 걸오가 ‘힘차게’ 깨우다가 다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응?”
걸오의 눈치를 살피던 미카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다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거 무슨 냄새야?”
미카의 코가 걸오의 발등부터 시작해서 발목, 종아리, 허벅지를 훑어 올라간다. 그러다가 걸오의 허벅지 안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댄다.
“후에? 뭔가 이상한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나 방금 씻고 나왔다고!”
미카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걸오는 아랑곳 않고 다시 코로 그의 전신을 훑어댔다.
“야야야! 너 지금 뭐하냐니까!”
급기야는 걸오의 겨드랑이를 치켜 올리고 냄새를 맡은 다음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바둥대는 걸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럴 때는 반항해봤자 소용없다.
“음, 잘 모르겠네. 걸오야, 의무실 가자.”
“암이군요.”
군의관의 대답에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설명을 기다리는 미카와 달리 걸오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에헤? 암이 뭐야?”
“음, 무어인은 암이 없나요? 대다수 종족들의 세포에는 자기증식이라던가
수명에 대한 제한이 있어서 일정시기가 되면 성장을 멈추거나 죽습니다.
암이란 이런 제한이 사라져버린 변종세포로서 이상증식을 하는…”
군의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카는 안색이 변해서 손목에 달린 호출기를 작동시켰다.
“하하함장님! 큰일났어요! 걸오가 그거래요! 그때 그거!”
파닥이는 미카의 손목에 떠오른 모우는 언제나 그렇듯 냉정했다.
-침착하게 말하게.
“하유우! 그러니까 지금 걸오가 뭐라더라, 암?”
모우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아가미의 실룩거림으로 꽤 놀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 허둥대는 미카의 팔목을 낚아챈 걸오가 대신 말했다.
“제 몸이 좀 말썽을 피우는 군요. 걱정 마십시오. 제 선에서 해결할 테니까요.”
-그때 그 사건이라면 자네 혼자서는 안될 터인데?
“그때는 제가 일부러 그런 겁니다. 이번 것은 저도 모르는 우연한 사고라서요.
한번 겪었고 하니 쉽게 해결될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러나 모우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자네 지금 될 겁니다, 라고 했는가?
“아뇨. 쉽게 해결됩니다. 꼭, 반드시.”
화면에 비친 모우는 차갑게 걸오를 주시했다. 이럴 때의 모우는 백이면 백,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만약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갈 것이었다면 이 같은 시간낭비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좋도록 하게나.
모우의 영상이 사라지자 걸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왼손으로 미카의 양 볼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오른손가락들로는 어리둥절해 하는 미카의 세 눈을 세차게 눌렀다.
“꺄우웃!”
“이년이 지금 누굴 잡으려고!”
“하야야야! 아파~걸오야! 아파!”
“함장님한테 꼬바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 그랬단 말이지.”
“후에엣! 난 그냥 걸오 니가 걱정되서하야야야~!”
얼추 0.5점의 상황에서 걸오는 손을 풀었다. 이럭저럭 동점.
“그때와 증상은 같지만 원인은 달라. 내가 치료할 수 있다고.”
“정말? 지금은 륜도 없잖아.”
미카의 무서운 점은 어리버리하면서도 언제나 정곡을 후벼 판다는 거다. 걸오가 독살스러운 안광을 내뿜으며 다시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미카가 무서운 속도로 위빙, 덕킹, 스웨이를 해댔다.
“뭐하냐?”
걸오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손을 슬슬 돌렸다. 그러자 미카도 걸오의 손가락을 피해 슬슬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그 와중에도 머리는 미친 듯이 계속 흔들어 대면서 말이다. 이어 꽝하는 소리와 함께 거하게 벽을 들이받은 미카가 머리를 감싸 안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의무실 벽이 움푹 우그러진 것을 보니 꽤 아플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던 걸오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 아까 락샤헤이론 뭐시긴가로 소란스럽지 않았나?
“근데 아까 헤일 얘기는 어떻게 됐냐?”
걸오의 말에 바닥에서 낑낑대던 미카가 고개를 홱 들더니 잔뜩 찌푸려졌던 눈을 다시 똥그랗게 떴다.
“아, 맞다. 그거 함장님한테 말씀드릴려구 하는 데에~
그거 때문에 걸오 너를 만나려고 왔거든? 함장님한테 놀러 가자.”
그러면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은근슬쩍 걸오의 팔을 잡으려 한다. 이 패턴은 사적인 용무로 모우에게 깽판치려고 할 때 나오는 미카의 버릇이다. 즉 걸오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이다.
“놔라, 이년아!”
어찌어찌 팔을 뿌리쳤지만 이어지는 몸통태클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걸오야아~같이 가자.”
스타파이터쪽 일로 떨어지는 벼락은 걸오가 대신 나서서 맞아준다. 그러나 모진 년이 하늘에 대고 쇠꼬챙이를 쑤셔대는데 좋다고 따라다닐 일이 없지 않은가.
걸오는 무릎으로 미카의 배를 올려 차고 팔꿈치로 후두부를 내려찍었다. 어지간한 종족이었다면 기절, 또는 사망까지 가는 공격들이었지만 강건한 무어인에겐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잔뜩 화만 돋구었을 뿐.
이어지는 연타에 골이 잔뜩 난 미카가 씩씩거리며 걸오를 올려다 보더니 곧 입을 아앙하고 크게 벌렸다. 그리고 물었다.
“으아악!”
걸오의 비명에 이어 갈비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의무실에 울려 퍼졌다.
“음, 자네들 무슨 용무인가?”
전투통제실에 있던 모우는 갑자기 찾아온 걸오와 미카를 의아해하며 맞이했다. 혹시나 예의 암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것은 아닌 듯 했다.
“저기요, 함장님. 우리 배에 오기로 한 락샤헤이론 크루갈레시난 중령 말인데요.
안 오면 안돼요?”
머뭇거리며 꺼내는 미카의 말에 모우는 드물게 놀랬다. 오미크론은 평소 언행이 가볍고 뜬금없긴 해도 연방군 중령이자 아이사타호 비행전대장이다. 무턱대고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자네 무슨 소리 하는 건가?
락샤헤이론 중령이라면 지금 승선하고 있을 거네만.”
“와와와! 안돼요! 싫어요! 싫어요!”
“아니, 뜬금없이 그 무슨 소리인가. 자초지종을 말해보시게.”
모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미카를 보았다. 얼핏 듣기엔 밑도 끝도 없는 소리지만 오미크론 크루갈레시난은 모우가 신뢰하는 부하이며 일견 가벼워 보이는 말과 행동에도 언제나 깊이가 있어 항상 경청해왔다. 그러니 이번 얘기도 허투루 흘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싫어요, 나 헤일이랑 같이 있는 거 싫다고요.”
“그러니까 그 싫다는 이유가 뭐냔 말일세.”
평소 같았으면 애 저녁에 폭발하고 말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모우는 끈기 있게 질문을 계속했다.
“…그냥요.”
헌데 알고 보니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시선을 저쪽으로 돌리자 피곤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는 걸오가 보인다. 딱 보니 총알받이로 끌려온 듯싶다. 불쌍한 중생이로다.
모우는 이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며 차갑게 대답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어쩔 수 없네.
또 변경 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개인적인 이유론 변경할 수는 없는 일.”
“우아앙~앙앙~아앙!”
그러자 미카가 이번엔 바닥에 엎드려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울면서 힐끔힐끔 모우의 눈치를 살피는 게 이젠 기도 안 찬다.
“…울어봤자 소용 없느니라.”
“우이쒸! 웃어도 제 말 안 들어주실 거잖아요!”
처음에는 애원하다가, 안되니까 울다가, 급기야는 벌떡 일어나 함장의 어항을 걷어찬다.
“알면서도 행패란 말이렷다? 그년 심보 고약타.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이때 부를 사람은 닥탄 스제거 한 사람뿐. 미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잽싸게 도망쳤다. 끌고 온 걸오는 내버려둔 채.
모우는 아가미로 물을 한번 내뿜은 다음 걸오를 돌아다 보았다. 자세히 보니 이놈도 안 끌려오려고 발악을 했는지 여기저기 상처가 보인다.
“저 아이 도대체 왜 저러는지 혹 짐작 가는 게 있는가?”
“글쎄요? 쟤 막 나가도 이렇게 막가지는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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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한달만의 연재로군요.
이런 나태한 연재는 독자분들께 응징의 심판을 받아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단편이 올라갔으니 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