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솔라리스>와 <스피어>의 내용 누설 있습니다.


어떤 책을 잃다 보면, 가끔 다른 책과 설정이 겹쳐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공통점이 별로 없어도 중심 소재나 발상 때문에 다른 작품이 연상된다는 뜻입니다. <스피어>를 읽을 때 그랬는데, 불쑥 <솔라리스> 생각이 나더군요. 외계 존재가 인간의 생각을 읽고, 그걸 실체화시킨다는 개념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체화 사건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나죠. 두뇌를 투영해서 생각을 읽는 것도 대단한데, 그걸 물질화시키다니 굉장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솔라리스>는 소위 방문자들이 나옵니다. 솔라리스가 정거장 학자들의 사고에 침투하고, 그걸 바탕으로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 때문에 자살 소동까지 벌어지고, 주인공 켈빈에게는 죽은 아내가 찾아오죠. 적적하고 외딴 정거장에 누군가 불쑥 나타나니, 놀랄 수 밖에요. 이와 달리 <스피어>는 사람보다 해저 환경에 걸맞는 생명체가 나타나요. 작은 물고기부터 거대 오징어까지 종류도 천차만별입니다. 심해에 거대 오징어라니, 혼비백산 할 법하죠.


솔라리스가 어떤 식으로 생각을 읽는지는 잘 모릅니다. 작중에도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뇌파를 투영하는 실험도 했고, 항공기를 몰고 정찰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허나 주인공 크리스 켈빈은 정거장에 도착해서 그리 대단한 실험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스노우를 만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뿐이죠. 하지만 정거장이 솔라리스 위에 있는지라 생각을 드러내고 맙니다. 스피어는 커다란 구체인데, 그 안에 들어가야 생각을 읽는 듯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저도 모르게 그 안을 들어가지만, 막상 자기가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지 못해요. 구체 자체도 지능이 있어서 지구인을 끌어들이는 듯한 뉘앙스도 풍기고요. 어쨌든 솔라리스처럼 무슨 수로 물체를 만드는지 나오지 않아요. 그리고 스피어가 만들어낸 물체는 해저 기지 근방에 나타날 뿐, 특정인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덕분에 도대체 이 괴현상이 누구 때문에 생겼는지 사람들 간에 다툼도 벌어지죠.

참고로 솔라리스는 행성이고, 스피어는 사람보다 큰 구체입니다. 크기를 비교하면, 스피어의 능력이 더 뛰어날지도? 애초에 목적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요.


어쨌든 무슨 수로 물체를 만드는가는 차치하고, 중요한 건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솔라리스와 스피어는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 생각을 읽고, 실체화 시키느냐는 겁니다. 이것 역시 딱 부러지는 해답이 없습니다. 켈빈은 여러 가능성을 따져봅니다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하죠. 솔라리스가 자기 나름대로 사람과 소통하는 걸 수도 있긴 한데….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요. 켈빈은 플라즈마 바다와 접촉하려고 했지만, 바다 쪽에서 먼저 흥미를 잃었으니까요. 스피어도 구체적인 목적은 모릅니다. 단순히 램프의 지니마냥 소원을 이뤄주는 수준은 아닐 겁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구체와 그냥 접촉했다가는 어떤 대재앙이 일어날지 몰라요. 거의 무의식 차원을 읽기 때문에 구체와 접촉한 사람도 뭐가 나올지, 나오기는 할지 모르고요. 워낙 통제가 힘들어서 막판에 구체를 우주로 내보낼 정도였죠. 그것도 모두가 합의한 상태에서 가능했습니다.


솔라리스는 희한하게 사람의 아픈 구석을 건드립니다. 정거장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방문자가 누군지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절대 열지 않았죠. 화상 회의하는 것도 조심스러웠고요. 즉, 뭔가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는데, 그게 나타났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켈빈의 아내 하라(레아)는 지독한 말다툼 후에 목숨을 끊었죠. 켈빈은 그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고요. 스피어는 사람의 공포나 부정적인 감정을 건드립니다. <해저 2만리>를 읽고 거대 오징어를 두려워하면, 그걸 실체화합니다. 낯선 심해 물고기가 무서우면, 역시 그걸 만들어냅니다. 기지를 폭파할 정도로 끔찍한 상상을 하면, 마찬가지로 그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상상을 구현하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아요. 두 외계 존재 모두 사람의 어두운 구석을 파고 드는 습성이라도 있나 봅니다. 하긴 대상을 적나라하게 관찰하려면 그런 접근법도 필요하긴 하죠. 큰 사고로 이어져서 문제지.


솔라리스는 사람을 만들지만, 방문자는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켈빈은 아내가 두려워 로켓에 태워 우주로 날려버립니다. 기실 스노우도 비슷한 짓을 했죠. 하지만 또 다른 아내가 다시 나타나고, 아무리 추방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게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켈빈과 멀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정거장을 부수고, 수면제도 안 먹히고, 피투성이 상태에서도 금방 회복해요. 가히 초인이 따로 없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죠. 그저 사고를 투영해 만든 조형물에 가까우니까요. 스피어가 만든 물체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각을 반사한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가령, 소설책을 만들어도 내용이 없을 수가 있죠. 그 사람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다면요. 거대 오징어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진짜 오징어는 아닐 겁니다. 상상력에 따라 모양만 오징어인 허상일 수도 있고, 잠수함을 침몰시키는 크라켄이 될 수도 있겠죠. 결국 사람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인가가 중요합니다.


어두운 생각을 실체화시켜도 두 존재가 상징하는 바는 각각 다릅니다. <솔라리스>는 타자를 인식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다루죠. 켈빈은 갑자기 나타난 아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당황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속사정도 끝내 알아내지 못해요. 플라즈마 바다와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하지만, 상대는 별 관심이 없고요. 비단 주인공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솔라리스를 부단히 연구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죠. 이에 비해 <스피어>는 인간의 무의식과 상상력을 다룹니다. 구체는 상상을 이뤄주는 도구지만, 작중 그걸 제대로 다루는 이는 없다시피 합니다. 오히려 잘못 사용해서 봉변만 당하고, 해저 기지가 날아갈 뻔하죠. 주인공들은 여기에 잘못 접촉할 경우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하긴 구체와 접촉하고 핵미사일이 날아가거나,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상이라도 했다가는…. 그래서 아직 인류는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구체를 우주로 내보내죠. 인간의 상상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그게 어떤 식으로 돌아오는지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참고로 솔라리스는 머나먼 행성이고, 스피어는 심해에 가라앉았죠. 그래서 둘 다 고립/폐쇄된 공간입니다. 솔라리스 정거장에는 달랑 3명만 있어요. 지구에 연락할 수도 있지만, 괴사건이 벌어지는데 함부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죠. 방문자가 오는 마당에 진짜 지구인이 나타나서 혼란을 더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3명, 그것도 서로 비밀을 숨기려는 3명이 벌이는 신경전이 꽤 아슬아슬합니다. 비록 고립된 곳이지만, 사람 관계는 상당히 치열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스피어> 역시 전형적인 폐쇄 공포증을 유발합니다. 비슷한 책을 찾자면, <먹이>가 제일 비슷할 듯하네요. 하지만 여기는 바다 밑바닥인 데다가 장비 없으면 탈출도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웬 두족류나 물고기도 몰려오니, 폐쇄 공포증에 심해 공포증까지 섞었다고 할 수 있겠죠. 스피어의 실체화 사건만 해도 골치 아픈데, 수면은 저 멀리 있으니. 한여름에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읽으면 그럴 듯하겠습니다. (역시 여름에는 바다가….)


두 소설 모두 영화로 나왔죠. 허나 원작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하긴 힘듭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명작으로 남긴 했는데, 렘 본인은 싫어했다고 하죠. 이해할 수 없는 소통이 주제였는데,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으니까요. 스티븐 소더버그 영화는…. 도대체 왜 솔라리스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의아합니다. 죽은 아내와의 연애물을 만들려면 방법은 많았을 텐데요. <스피어>는 더스틴 호프만과 샤론 스톤, 사무엘 잭슨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배우들은 다 좋은데, 막상 연출은 별 임팩트가 없는 편입니다. 재미있기는 한데, 너무 무난하다고 해야 하나. 클라이튼 소설은 영화로 만들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반 작품은 깨알같이 쏟아지는 지식과 그걸 응용한 이야기가 재미거든요. 이는 텍스트 매체에서 유리하고, 영상을 강조하는 영화로는 만들기 어렵죠. <쥬라기 공원>이 흥행한 건 볼거리가 무지막지해서 그렇지, 소설을 제대로 반영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엇비슷한 소재(사념의 실체화)를 쓰면서도 두 소설은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은 사변이 강하고 묵직한데, 다른 한쪽은 기술적인 면이 두드러지고 호흡도 빠르죠. 물론 작품성과 아이디어를 따지면, <솔라리스>에 손을 들어주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스피어>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클라이튼이 스타니스와프 렘의 발상을 멋대로 빌려가서 3류 SF를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솔직히 그건 너무 심한 비평 같습니다. 관념을 실체화한다는 아이디어가 <솔라리스>의 전유물도 아니고, <스피어>가 그 정도까지 못쓴 소설은 아니니까요. 애초에 사변소설과 테크노 스릴러를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도 무리고요. 게다가 <스피어>는 전형적인 클라이튼 소설이라고 하기는 좀 무리죠. 이 양반은 상업주의 과학을 주된 소재로 삼는데, 이 소설은 갑자기 외계 존재가 나타나서 재앙급 사건을 벌이니까요. 작가 특유의 해박한 지식이나 속도감 있는 편집은 여전하니까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요. 비슷한 소재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평가하는 게 맞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