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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에서 벌어지는 거미남과 파충류 괴수의 치열한 싸움. 이런 장면이 더 많이 나왔더라면….]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대략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악당 리저드였습니다. 리저드는 이름 그대로 도마뱀이며, 동물형 악당에 속하죠. 진짜 동물은 아니고 인간이 변이한 거지만, 어쨌든 겉모습이나 습성은 크고 포악한 짐승입니다. 슈퍼 히어로 영화에 이런 거대 몬스터가 나오는 경우는 꽤 드물기에 내심 리저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오랜만에 극장에서 파충류 괴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부푼 마음을 안고 극장을 다녀왔는데, 보고 난 소감은. 음, 글쎄요. 인상적이긴 했지만, 기대치를 만족하기는 부족했습니다. 이런 흉악한 짐승이 돋보이려면 아무래도 액션 연출이 뛰어나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애매해요. 컴퓨터 그래픽이나 영웅과 악당의 관계, 대결 구도 등은 그리 흠 잡을 데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2%가 아쉽더군요.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리저드와의 전투는 거진 협소한 장소에서 벌어집니다. 설사 야외 배경이라 하더라도 싸움 자체는 평면적이고요. 원작 코믹스에서도 리저드는 대개 하수구 등 좁은 곳을 기어 다니는 몬스터에 가까웠습니다. 스케일 넓은 공중전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실망하기 딱 좋습니다. 리처드 파커의 연구가 스파이더맨 탄생에 일조한다는 설정 때문에 커트 코너스를 고른 것 같은데, 그래서 블록버스터의 시원시원한 액션은 포기했죠. 이제껏 실사 영화 시리즈에 나왔던 악당들을 생각하면, 리저드의 이동 능력이 제일 별 볼 일 없습니다. 고블린이나 샌드맨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문어발 박사처럼 다리 여러 개로 건물 사이를 누비지도 못하고, 베놈처럼 끈적한 줄을 쏘지도 못합니다. 기껏해야 발톱으로 벽을 박거나 꼬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게 전부인데, 이걸로 쾌활한 공중전을 벌이긴 무리입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함인지, 리저드는 근력이 강한 적수로 나옵니다. 스파이더맨도 자동차 한 대쯤 우습게 집어던지는 힘을 자랑합니다만, 리저드는 그보다 힘이 세다는 걸 강조합니다. 스파이더맨이 제아무리 용을 써도 완력으로 당해내지 못하더군요. 하긴 체격 차이만 봐도 벌써 답 나오죠. 리저드는 짐승이고, 짐승답게 힘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은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거미줄을 쏘려고 하고, 리저드는 기를 쓰고 접근해서 힘으로 압도하는 풍경이 벌어집니다. 힘이 딸려서 그런지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상당히 폭넓게 활용하더군요. 특히 싸울 때는 근접 격투하기 보다 일단 거미줄부터 날리고 봅니다. 굳이 힘들게 다가가서 주먹으로 때리지 않고, 멀찍이서 공격한다는 개념입니다. 마치 속사포처럼 쏴대는 거 보고 놀랐어요. 민첩 계열과 힘 계열의 전형적인 대결 구도랄까. 판타지로 따지면, 도적과 전사의 싸움 정도?



또한 좁은 곳에서 싸우는 만큼, 광활함 대신 긴박감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협소한 장소에서 싸우면 정황상 스파이더맨이 불리합니다. 거리가 좁혀지면 거미남 입장에선 끝장이니, 비록 소규모 전투라 하더라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더군요. 리저드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저 좁은 복도에서 스파이더맨이 어디로 도망칠지, 무슨 수로 상대를 공략할지 두근거리면서 봤습니다. 이 부분은 참 좋았네요. 하수구에서 악어 괴물이 출몰하던 80년대 영화 <엘리게이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B급이긴 하나, 어둑하고 좁은 굴에서 악어에게 쫓기는 폐쇄공포증을 잘 드러냈지요. 하긴 리저드도 하수구 악어라는 미국 도시전설 영향을 받은 악당이니 <엘리게이터>와 코드가 겹치는 것도 자연스러울 듯합니다. (마크 웹 감독이 설마 이 영화를 참고했을 리는 없고, 그냥 겉보기만 비슷한 것이겠지만요.) 다만, 여기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겠습니다.



단점을 열거하자면 전반적으로 액션 강도는 높아졌으나, 분량은 줄어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일단 싸움박질이 벌어지면 미칠 듯한 스피드로 쾌감을 선사합니다. 스파이더맨은 좁은 곳을 뛰어다니며 연속으로 거미줄 사격하고, 리저드는 큰 덩치를 굴려가며 사정없이 할퀴어 댑니다. 넓은 곳에서 싸우는 시원시원한 맛은 없으나, 속도감으로 보상합니다. 공간이 좁기 때문에 더 빠르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이 작품은 청춘 로맨스와 성장기가 더 우선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스파이더맨이 초장부터 나오진 않습니다. 스파이더맨이 늦게 나오니 악당인 리저드가 더 늦게 나오는 건 당연지사. 리저드와의 싸움도 속도감이 빠른 대신 후딱후딱 넘어가고요. 초인 영웅이 악당과 조우하는 횟수는 많은데, 정작 각 잡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다른 슈퍼 히어로 영화는 영웅과 악당의 조우 횟수가 적지만, 일단 한 번 붙었다 싶으면 거하게 대판 싸우죠. 아무래도 전자보다 후자가 더 인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학교 복도에서 싸웠던 걸 빼면, 제대로 된 전투 장면이 없습니다. 앞서 말했던 하수구에서의 싸움은 긴박하긴 했으나 일방적인 습격으로 끝났어요. 기왕 이 곳에서 싸우는 만큼 수중전의 묘미를 좀 더 살려야 했는데 말이죠. 저는 리저드가 나오니까 당연히 하수구를 활용한 액션의 비중이 클 줄 알았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마구 도망치며 공포심을 조장하거나, 물 속에서 숨이 차도록 격투를 벌이거나 하는 것들이요. 원작 코믹스를 읽어봐도 그런 그림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리저드의 영역인데도 스파이더맨이 너무 쉽게 빠져나가고 전투가 단발적으로 끝나더군요. 아니, 이래서야 파충류 괴수를 기용한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게임 <아캄 어사일럼>에서 배트맨과 킬러 크록의 하수구 싸움도 이것보다 훨씬 조마조마했습니다. 영웅과 악당의 대결이 아니라 미치광이 악어가 잡아먹으려 덤벼들어서 도망치는 느낌이 들었고 손에 땀을 쥐었지요. 여름용 블록버스터 영화가 게임의 액션만도 못하다니, 으음. 이건 좀 아닌 듯하네요.



액션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이라고 하면 흔히들 마천루를 훨훨 날아다니는 광경을 떠올립니다. 홉고블린이나 벌쳐, 쇼커, 문어발 박사님 등을 상대로 싸울 때는 그렇죠. 허나 리저드는 대도시를 활보하는 게 아니라 구석진 곳에 숨어서 돌아다니는 몬스터입니다. 따라서 영화 전반의 액션도 악당에 맞추어 차별했어야 했습니다. 활공하는 쾌감보다 지하 소굴을 누비는 끈적끈적함이 묻어났어야 해요. 초인 영웅이 주인공이긴 하나, 영웅의 싸움법도 결국 악당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막상 영화는 하수구나 터널보다 대도시 풍경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스파이더맨의 활공은 1인칭 시점으로 찍거나 3D 효과를 강렬하게 주면서, 메인 악당인 리저드의 하수구는 대충 넘어갑니다. 한두 번 대도시 활공하는 거야 이해하겠는데, 영화 내내 이러니…. 이럴 거면 그냥 커트 코너스만 등장시키고 말지, 왜 굳이 리저드로 변신까지 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 날아 다니는 악당들도 많은 마당에.



오스코프 빌딩 꼭대기에서의 싸움도 혈청을 둘러싼 밀고 당기기일 뿐 정면 대결이라 하긴 부족합니다. 악당이 보통 인간도 아니고 거대 몬스터인데, 인상적인 전투 장면이 없다는 건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로서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액션이 답답하게 좁은 곳에서만 나오는 걸 떠나 액션 분량 자체가 적다는 뜻입니다. 이는 시리즈 1편이라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초인 영웅의 탄생을 논하는 터라 악당까지 세세하게 이야기할 여유가 없거든요. 이 때문에 악당의 존재감은 영웅의 완성을 위해 거쳐가는 길목에 가깝죠. 허나 그렇다 해도 영웅과 악당에게 비중을 골고루 주지 못한 건 감독의 실수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건 컨셉 문제인데, 대부분 전투가 스파이더맨이 죽어라 거미줄만 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그나마 길거리 깡패나 경찰에게 포위당했을 때 현란한 몸놀림을 보여주긴 합니다. 허나 깡패나 경찰과의 전투는 메인이 아닌 데다가 너무 순식간에 끝나는지라. 현실적으로 따지면, 아무리 몸이 날래다 해도 상대가 강력한 야수인 이상 접근해서 때리는 건 위험하긴 합니다. 허나 픽션에는 뻥과 과장이 필요한 법. 볼거리를 위해 일부러 총기를 버리고 주먹다짐을 하는 창작물도 숱한 마당인데 말이죠. 개인적으로 원거리 사격 액션을 선호하는 편인지라 거미줄 사격 위주의 전투도 즐겁게 봤습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스파이더맨과 리저드가 엉켜서 정말 피칠갑을 하며 싸우는 장면이 좀 들어갔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러면 리저드의 야수성을 표현할 수 있었을 테고요.



연기와 대사 때문인지 리저드는 원작과 달리 얼굴이 인간에 가깝습니다. 그래야 표정도 지을 수 있고, 말할 때 입 모양도 어색하지 않죠. 허나 도마뱀 몸뚱이에 인간 얼굴이 달려서 어쩐지 맥 빠지는 디자인입니다. 이왕이면 공룡 비슷한 괴수처럼 나오는 게 더 위압감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코너스는 인간형 도마뱀으로, 혈청 맞은 다른 피해자들을 동물형 도마뱀으로 표현했으면 어떨까요. 작중 전개를 보면, 리저드가 다른 도마뱀들을 끌어들이는 능력도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리저드의 지배를 받는 도마뱀 부하들과도 싸울 법했습니다. 혹은 리저드가 변신하는 악당이니까 <플라이>나 그런 부류가 그렇듯, 막판 최후의 대결 때 최종변신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겁니다. 도마뱀이나 공룡과 한층 더 닮은 모습으로요. 허나 마지막까지 변신 형태가 똑같이 인간형이라 좀 실망이었습니다. 솔직히 리저드라기보다 DC 코믹스에 나오는 킬러 크록이랑 더 닮았어요. 요즘은 킬러 크록도 동물에 가깝게 나오는 마당인데, 리저드가 인간 모습이라니.



그나마 간만에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도심 속 괴수를 보는지라 반갑긴 했습니다만. 감독이 좀 더 괴수물에 애정이 있거나 오마쥬를 했으면 싶었습니다. 도쿄 시장 농담으로는 좀 약했어요. 사실 거대 도마뱀이 출현하는 블록버스터라면 괴수물 팬에게도 추천할 정도가 되야 하는데, 그리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듭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리저드는 초인 영화 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동물형 악당입니다. 초인 영화의 악당은 대개 인간형인데, 유일하게 리저드가 예외 사례입니다. 그런 만큼 괴수다운 생김새와 도시를 파괴하는 구도를 잡아내려고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전투 역시 짐승답게 저돌적으로 싸우고,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는 등 야성적인 면을 드러냈어야 했고요. 영화 속에서도 충분히 야성적이란 느낌이 들지만,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나가서 광기에 사로잡힌 면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괴수물 감성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올바른 해답 아니었나 싶어요.



허나 감독은 피터 파커의 애정과 성장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정작 악당 리저드에게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커트 코너스에게는 신경을 많이 쓴 듯합니다만.) 등장 시간도 얼마 안 되거니와 액션 장면은 더더욱 분량이 적어요. 최초의 동물형 악당인데, 별 특색도 없이 소모하기만 해서 아까운 느낌이 들어요. 리저드가 나왔으니 당분간 동물형 악당이 초인 영화에서 또 등장할 일은 없겠지요. 다음 번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고블린이 나올 것 같고, 현재 촬영 중인 슈퍼맨 시리즈 <맨 오브 스틸>은 동물 악당이 없고, 배트맨 시리즈는 킬러 크록이 있으나 이번에 끝나고,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 등등을 고려해도 괴수 악당은 안 나올 겁니다. 아아, 아까운 리저드. 감독이 꼼수를 부려서 속편에 어떻게 나올 수는 없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화 자체가 나빴다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 제목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지, 리저드 몬스터가 아닙니다. 따라서 리저드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감독을 비판할 수야 없겠지요. 영화는 평가도 좋고 흥행도 순조롭고, 흥미롭게 잘 봤다는 관객도 많습니다. 저 역시 이전 시리즈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만 봐도 실실 미소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악당이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파충류 괴수를 좀 더 괴수답게 표현하지 못한 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마크 웹이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계속 찍는다면 좀 더 SF 장르적인 마인드를 키웠으면 싶네요.



※ 만약 샘 레이미가 리저드 나오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하수구 괴수물의 폐쇄공포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B급 공포 영화로 한 가닥 하시는 분이니까 좁고 어두운 분위기를 능히 재현할 수 있겠지요. 마크 웹은 (샘 레이미가 하지 못했던) 풋풋한 청춘물을 만들었으니, 자기 나름의 소임은 다 한 셈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