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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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창작물은 대개 공통된 공식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비슷한 특징들이 있기에 하나의 장르로 묶을 수 있는 거죠. 장르 창작물이 오래 되면 사람들이 그 공식에 익숙해지고, 그 나물이 그 나물인 것처럼 식상하게 느낍니다. 나중에 가서는 이런 공식을 깨거나 뒤집는 ‘장르 비틀기’가 나오고, 그렇게 비틀어진 공식이 또 다른 장르를 생산하기도 하죠. 영화 <캐빈 인 더 우즈> 역시 그런 장르 비틀기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영화는 별 생각없는 슬래쉬 호러 무비입니다. 철딱서니 없는 10대들이 모여 주말 나들이를 갑니다. 나들이 장소는 당연히 인적이 드문 외딴 숲 속의 오두막. 웬 이상한 아저씨가 나와 불길한 소리를 해대지만, 주인공들은 그런 소리를 귓등으로 흘린 채 놀기 바쁩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끈적거리는 술판과 섹스가 벌어지고, 위험한 살인마가 나타납니다. 그 뒤로는 죽이고 도망치고 비명 지르고 하여튼 그렇습니다.
예쁘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는 금발 미녀, 헛소리만 해대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찌질이, 몸집 크고 소리 지르기 바쁜 마초 운동선수 등은 여느 슬래쉬 무비에서도 곧잘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를 골라 놀러 가고, 괜히 서성거리다 죽어가며, 한심하게 도망이나 치다 죽기를 반복하죠. 허나 이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저런 클리세에 하나하나 필연적인 이유를 붙였다는 겁니다. 이런 인물들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어째서 뻔히 보이는 식으로 죽어 나가는지 설명합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캐빈 인 더 우즈>의 장점으로 다른 ‘장르 비틀기’와 달리 그냥 공식을 깨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덧붙입니다. 기존 호러 장르를 뒤집기보다 차라리 다른 장르로 전환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시작은 슬래쉬 호러였으나 그 끝은 전혀 다른 장르인 셈이죠. 개인적으로 이 점이 꽤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슬래쉬 호러 팬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만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슬래쉬 호러 무비로만 놓고 보면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 슬래쉬 무비를 즐겨보는 것도 아니고, 고어한 걸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서요. 영화 전개가 꽤 독특해서 뭐라고 하기가 애매하네요. 어쨌든 칼로 푹푹 찌르거나 톱으로 슬근슬근 썰어대는 등 나올만한 건 죄다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방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난장판을 벌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엽기적인 걸 꽤 싫어하는데, 그럼에도 피칠갑 수위가 그리 높다는 생각은 안 들더군요. 아예 작정하고 피칠갑을 볼거리로 집어넣은 게 아니라 영화 전개상 그래야 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장르 전환을 시도하는 만큼, 이 부분은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반 슬래쉬 무비를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관객이 있을지도?
한편으로 이 작품은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표방하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꼬집어내는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극장을 나오는 기분이 찝찝하고 개운치 않습니다. (뭐, 이런 허무주의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대단히 재미있겠지만요.) 단순히 슬래쉬 무비의 공식만 비트는 영화였다면 이런 결론도 나오지 않았겠지요. 그렇다고 철학이 깊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런 영화에 이만한 무게감이 실릴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등이라면 오래 전부터 이런 정서를 접했고, 그래서 공감할만한 감수성이 밑바닥에 깔렸습니다. 하지만 동양권 관객은 역사적 특성상 이런 작품의 주제에 동의할만한 정서가 없어요. 요즘이야 문화가 널리 개방되어서 서구의 다양한 감수성을 접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공감 못하는 관객이 더러 있을 듯해요.
그리고 이 아래로는 치명적인 내용 누설 있습니다!!!
- 하고 많은 괴물 중 하필 좀비가 나왔다는 게 좀 아쉬웠습니다. 좀비는 너무 평범하잖아요. 그렇게 괴물들을 잔뜩 모아뒀다고 설정했으면, 더 대단한 놈들을 내보냈으면 싶었습니다.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 엄청나게 커다란 뱀 있지 않았습니까. 킹 코브라를 몇 배는 뻥튀기한 듯한 그 놈이요. 그 녀석이 나왔더라면 진짜 좋았을 텐데요. 뭐, 제작진 마음이야 이해 합니다. 그만한 뱀이 자주 나오면 그만큼 컴퓨터 그래픽 사용이 늘고, 자연스레 제작비가 순식간에 올라갈 테죠. 뱀이 설치고 다니기엔 오두막이 너무 좁기도 하고요. 그래서 비교적 저렴한 분장으로 써먹을 수 있는 좀비를 내보냈을 겁니다. 게다가 좀비가 나와서 썰고 찌르고 해야 슬래쉬 무비가 되지, 그 뱀이 나왔더라면 괴수물이 되었을 걸요. 멍청한 10대들이 오지에서 죽어간다는 설정과 괴수물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쩝.
- 막판에 나오는 온갖 괴물, 유령들은 이전의 호러 무비를 오마쥬 혹은 패러디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호러 무비를 잘 안 봐서 모르겠는데, 눈썰미 좋은 관객들은 뭐가 어떤 패러디인지 다 찾아내는 것 같더군요. 살인마 광대나 이빨 발레리나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 뭐였는지는 자세한 기억이 안 납니다. 서구권에 유행하는 도시전설이나 공포 정서를 반영했을 수도 있지요. 서양인들은 광대를 그렇게 무서워하더군요. 괜히 조커나 크라운 같은 악당 캐릭터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사람 찔러 죽이던 유니콘은 일각수가 선하다는 발상을 뒤집은 괴물 같습니다. 거대 박쥐 역시 그냥 뱀파이어의 패러디 아닌가 싶고요. 하도 별별 괴물들이 다 나오다 보니, 오히려 늑대인간이 초라할 지경이었습니다. 사실은 전통적이고 강력한 괴물인데 말이죠.
- 조직 감독관으로 시고니 위버가 나오는 거 보고 참 골 때렸습니다. 이쪽 계열에서 워낙 인지도가 높은 배우라 여러 패러디 영화에 나온 경력이 있긴 해요. 허나 시고니 위버는 ‘괴물에 맞서 싸우는 정의롭고 강인한 인간’을 상징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괴물을 통제하는 사람으로 나오다니 기존 이미지와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감독관이 악당이라고 하긴 그렇습니다.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고대 신이 날뛸 테고 인류는 전멸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짓거리를 한 거죠. 그럼에도 주인공과 대치하는 상대역인 건 변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시고니 위버가 나온 김에 에일리언을 오마쥬한 괴물이 있나 싶었는데, 그런 괴물은 못 본 것 같습니다. 워낙 특이하게 생겨서 오마쥬하기도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그래도 이왕 골 때리는 영화를 만든 김에 넣어줬으면 좋았을 것을.
- 사실 제가 가장 기대한 건 막판에 등장하는 고대 신이었습니다. 은근히 크툴루나 다곤이 나오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암만 봐도 크툴루 신화랑은 별 관련이 없는 고대 신이라서 실망이기도 했습니다. 뭐, 거기서 다곤이 튀어나왔다면 말이 안 되기는 합니다. 얀스레이나 르레이의 심연에 있어야 할 수문장이 북미 숲속 지하에 있는 셈이니까요. 아, 그래도 진짜 다곤이었다면, 크툴루 신화에 획 하나를 긋는 영화로 남았을 텐데, 참 아쉽…. 어차피 크툴루에 저작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써먹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오두막을 날려버리며 등장한 손을 보니, 그리스 신화의 타이탄이랑 더 비슷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막판에 손이 나오며 끝난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곤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건 크툴루 신화가 아니라도 꽤 파격적인 코즈믹 호러라는 점에서 만족했습니다.